草食 / 조영석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터진다. 검은 눈물의 속눈썹을 적신다.
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
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를 감아누르며
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
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올린다.
책장을 찢어 그는 입 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
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
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 너머로 넘기고 나서
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자들의 가시를 솎아낸다.
검은 눈물이 입가로 흘러든다. 재빨리
그는 다음 페이지를 찢어 눈물을 빨아들인 다음
다시 입 속에 넣고 느릿느릿 씹는다.
입술 오므려 송곳니를 뺃어낸다.
그의 이빨은 초식동물처럼 평평해진다.
다음 페이지를 찢어 사내는 송곳니를 싸서 먹는다.
검은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텅 빈 눈동자 속에 활자들이 채워진다.
선명한 유령 / 조영석
그는 일종의 유령이므로 어디든 막힘없이 떠돌아다닌다.
그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다.
다만, 개들이 알아채고 짖을 뿐이며 비둘기들이 모여들 뿐이다.
그에게는 땅이 없지만 발을 딛는 곳이 모두 그의 땅이다.
그는 사람의 집이 아닌 모든 집에 세 들어 살 수 있다.
쥐와 함께 자기도 하며, 옷 속을 바퀴벌레에게 세 주기도 한다.
그의 땅은 기후가 사납다.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모래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없다. 그가 지나가면 그의 땅은 사라지므로.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물과 먼지를 빨아들여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그의 옷은 그의 살갗이다.
그의 몸은 카드와 화투 마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것들을 먹었는지 그것들이 그를 먹었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발효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썩어가는 생선대가리 냄새가 난다.
사람들, 저마다 작은 집과 작은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몸만큼의 권리를 지닌 채 실려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칠 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우면 의자는 침대가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객차가 되었다.
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는 냄새의 포자를 뿌리며 번식한다.
포자를 덮어쓴 사람들은 잠재적 유령이 된다.
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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