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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 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지 않았다


 



이상한 욕실 / 강성은


당신의 몸은 조금씩 사라져 간다

거품도 나지 않는 얇은 비누 토막처럼

당신의 몸을 감추어주던 외투는

당신의 몸보다 훨씬 견고하고 아름다워서

거울을 보며 당신은 외투만 생각했다

욕실에서 가끔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와 마주쳤지만

욕실에선 도무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서 당신의 몸은

구멍 속으로 날마다 조금씩 흘러들어갔다

욕실 밖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외투는 덜렁거리며 혼자 걸어다녔다

태양이 늘 머리 위에서 빛났다

지친 새들이 떨어져 길을 덮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생긴 구멍이 점점 커져갔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잠도 오지 않았다

이제 뿌연 거울 속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누군가 욕실 문을 열었다

다 해진 외투가 거울을 보며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의 비명은 그대로 돌아와

당신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있었다


 



사춘기 / 강성은


어머니의 접시들을 꺼내자

접시 속에서

장미꽃이 뛰쳐나오고

고양이가 뛰쳐나오고

죽은 어머니가 뛰쳐나왔어요


장미꽃과 고양이와 어머니는

온 집 안을 뛰어다니며

나를 찌르고, 물고, 목 졸랐어요

날마다 나는 포크를 들고 그들을 쫓느라

그해 겨울의 태양이 실종되었다는 기사조차 읽지 못했죠


그러는 사이 나는 거인처럼 자랐고

어느 날 집은 모래처럼 주저 앉았어요

장미꽃과 고양이가 어머니를 붙잡아

접시에 담아 비벼먹고 포크와 접시까지 씹어먹자

일 년치 밀린 잠이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악몽일까요, 태양은 일 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고

모래바람은 심장 속까지 불어오고

내 키는 자꾸만 자라 하늘까지 닿았어요

태양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자꾸만 지나가요


 



죽은 태양이 뜬 날 / 강성은


아무도 타지 않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려간다

눈먼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새들도 따라 날았다

달려오던 트럭에 그림자 하나가 치었다

습관적으로 신호등이 눈을 감았다

녹색 곰팡이들이 사방에서 쓸쓸히 피어났다

쇼윈도 안에선 폭넓은 치마가 백년째 불타고 있었다

불 속에서 늙은 배우들이 연극 연습을 했다

아무도 불을 끄지 않았다

누군가 공원 벤치에 앉아 죽은 태양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 태양의 붉은 피가 반짝거리며 죽은 자들의 이마를 찔렀다

묘비명들이 희미하게 짖어댔다

잠든 아이들만이 거리를 기웃거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잠들었다

죽은 태양의 유령이 거리를 뒤엎었다

죽은 자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 속에서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


 



혼자 있는 교실 / 강성은


나의 노트 속에는 폴라로이드 같은 안개

안개 속에는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밤나무 숲과 국도가 있어요

나는 펼쳐진 노트 속으로 들어가 국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숲에선 사소한 불빛 하나 나타나지 않고

국도는 물 속처럼 어둡고

가끔 죽은 고양이가 느낌표처럼 벌떡벌떡 일어서요

나는 흘러가는 노트 속의 산책자

내 기록들의 방관적 수취인

맨발로 일렁이는 국도 속을 걸어가지요

누군가 책장을 넘겨요

바람이겠죠

혼자 있는 교실엔 늘 바람이 불었어요

밤나무 숲이, 국도가, 내가 흔들려요

국도 저 끝에서 환한 전조등 성난 개들처럼 달려와요

수마의 바퀴들이 일제히 나를 밟아요

몸은 유리알처럼 부서져 느리게 어디론가 굴러가요

문득 가로등이 커지고

지나온 길마다 붉은 융단이 깔려요

아이들이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쳐요

선생님이 휘파람을 불어요

바람이 나를 읽어요

바람이 나를 정신없이 넘겨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까지 읽어요

바람이 나를 지워요

나도 나를 자꾸만 지워요

너덜너덜해진 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 있는 걸까요

혼자 있는 교실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렸어요

나는 말랐다 젖었다

써졌다 지워지며

아무 데도 닿지 않아요


 



성탄전야 / 강성은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 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 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 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 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속으로 들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입 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올라갔다

TV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룩한 밤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심사평]


강승은씨의 '12월'외 5편의 시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방식이 세련되고, 시간을 공간으로 구축하는 방식도 안정되어 있다. 일견 강성은씨의 시는 각기 다른 색깔과 재질을 가진 텍스타일을 이어붙여 만든 조가보처럼 보인다. 이 보자기의 각각의 조각들은 시를 쓴 사람의 교묘한 바느질에 의해, 시적으로 변용된다. 한 편의 시 안에 작은 조각들인 사물들이 진입하자 그 사물들은 시인의 공감각적 비유, 의인화의 과도한 사용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시적 자아의 시간 속으로 삼투하여, 사물의 속성과는 다른 정체성을 노정한다. 이를테면 '바람은 씹히고, 구름은 취하고, 애인은 요리되고, 달은 나와 체스를 두고, 앨범은 칼을 들고 같은 식이다. 이렇게 변용된 이미지들이 '시간'을 표상하는 제목들 아래서 배치되거나 병치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 틀은 이 시를 쓴 시인만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더구나 시 한 편 한 편에서 드러내고 구축한 세계가 너무 비좁다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그러나 완성도, 깔끔한 문장 처리 등의 장점을 높이 사 강성은씨의 '겨울'외 다섯 편을 당선작으로 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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