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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너츠의 하루 / 조인호


잘 튀겨낸 도너츠일수록 구멍은 둥글다

팔팔 끓는 기름마냥 꿈자리가 사나운 밤 속에 몸을 담갔다가 일어난 아침 둥근 창문을 열면

바람은 밀가루 반죽처럼 배배 꼬이면서 불어온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지문이 내 몸에 하얀 밀가루 자국을 남기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다

옷을 입으면 툭툭 떨어지던 단추들은 모두 어디로 굴러갔을까

우유배달원 대신 현관문을 두드리는 건 옆집 아줌마의

둥근 훌라후프 사이로 빠져나온 뱃살 소리

나는 그 출렁출렁한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늘 내 목에 얹힌 둥근 올가미 같은

하루를 꾸역꾸역 삼켜야 한다

목마른 듯 덜 깬 잠은 커피처럼 하루 내내

몽롱한 향기 풍긴다 혹은 도너츠에 솔솔 뿌린 설탕가루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지하철 입구로 들어서면

우르르 달려드는 개미떼, 구멍난 내 몸을 짊어지고

순식간에 열차 한 귀퉁이로 몰아내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박스 포장된 일터 안에서도 내 몸에 난 구멍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화장실 가듯이

동료들은 내 몸을 통과하여 변기 구멍에 볼일을 본 후

물을 내린다

꾸르륵, 다시금 나의 구멍난 하루가

내리막길 바퀴처럼 어딘가로 끝없이 달려가는 소리

온종일 귓구멍에서 울려대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 / 조인호


어느 날 나는 알라딘 씨를 본 적이 있었다


불현듯 목이 말랐고 그럴 때, 시원한 코카콜라를 마셨다

움켜쥔 병을 살살 문지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콜라의 요정들

재빨리 공기중으로 사라지기 전, 소원을 한 모금 마셔버린 후

코카콜라의 마지막 일 퍼센트, 그 비밀원료에 대하여 알아차린 날 세상은 바뀌었다

엉뚱하게도,

동물원을 탈출한 북극곰들이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활짝 펼쳐진 신문 밖으로 접혀 있던 알라딘 씨가 터번 위에 묻은

모래알을 툭툭 털며 걸어나오다가 ,

북극곰에게 엉덩이를 덥석 물리고

총탄 같은 이빨 자국을 털며 일어났지만

검정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에게 붙잡혀

검정 차에 실린 채 도로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먼 아라비아 폭격당한 고향마을을 떠나온

알라딘 씨가 남긴 것이라곤,

내리막길 따라 또르르 굴러가는 아직 뜨거운 몇 알의 단피들

유언처럼 가물가물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화약바람이 불고 가로수들이 떨궈내는 코카 잎,

매직아이처럼 빙글빙글 어지럽기만 한 세상은

알라딘 씨가 꿈꾼 신기루일까

지난날 알라딘 씨가 낙타를 묶어뒀던

오아시스 대추야자나무의 그늘 속 어두운 비밀 한 가닥을

잘록한 허리 깊숙이 빨아들이던

콜라병이 우뚝 서 있었을까


알라딘 씨가 그리운 오늘, 하늘을 올려다보면

제트양탄자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고등어 나르시시즘 / 조인호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 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 유치원에 갈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지 등줄기를 따라 푸른 멍 자국이 생겼지 선생님과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턱밑에서 뻐끔거리는 아가미 밖으로 펄떡펄떡 흘러나왔지 온몸이 자꾸만 축축해져 화장실로 쉼없이 달려갔지 오줌싸개라는 별명도 붙었지 만나서 반갑다 고등어 친구야 끔뻑끔뻑 인사하던 내 짝꿍은 개구리 왕눈이였지 점심시간마다 긴 혀로 도시락 주변을 윙윙거리던 파리들을 하나씩 잡아먹었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집 안 가득 물이 출렁거렸지 유리거울 속에 둥글게 물이 고여 있었지 나는 거울 속을 헤엄치며 놀았지 거울 밖에서 어머니는 얘야, 숙제하고 놀아야지 그래야 똑똑한 고등어가 된단다! 소리치며 나를 찾았지 그럴 때마다 나는 낚시줄에 걸려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지 입 안에서 피가 흐르고 나는 말을 잃어버렸지 성장할수록 여드름 같은 비늘이 얼굴까지 돋아났지 그러다 사랑을 만났지 무슨 선물을 줄까 밤새 고민했지 사랑아 담백한 고등어 통조림 좀 먹어볼래? 그렇게 사랑은 떠났지 그리고 이제 나는 다 큰 똑똑한 고등어 한 마리,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 방울방울 높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토익 점수가 그리워 밤늦게 종종걸음으로 영어학원을 다니지 하루가 저물고 잠에서 깬 새벽 무렵,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신선하게 살아계셨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셨지 얘애,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시지 무서운 나는 프라이팬 위로 도망치지 그러자 어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을 준비하시지 지글지글 익어가는 나를 노려보며 내 깊은 잠을 깨우시지 때마침 따르릉 울리는 자명종은 유치원에 갈 시간을 알리지 어머니가 발라준 생선살을 먹은 나는 오늘도 똑똑해져야지




장미의 요일 / 조인호

 

가시에 목을 찔린 후 나는 우산을 쓴다

활짝 펴진 우산이 나의 목을 베어먹는다

달랑 남은 나의 몸만이 밤 골목을 걷는다

네온 간판 불빛을 받아먹는 붉은 핏방울

닫힌 너의 창문에 비스듬이 기대다가

달아오른 빰을 유리에 문지르며 주르륵,

흘러내린다 창문 너머 너는 칼로 도마 위를

내리친다 초인종이 울리고 축축한 나의 몸만이

절뚝거리며 들어와 도마 위로 가지런히 눕는다

송골송골 가슴 밖으로 핏기가 어려 있다

잃어버린 나의 얼굴 모양을 기억하던 손

이제 칼자루를 잡은 너의 손, 허공에 장미 잎

같은 궤적을 남기며 내리칠 때마다

창 밖을 서성이는 얼굴 빈혈을 앓듯 창백하다

도마 위 수북이 쌓여가는 장미 잎 붉은 무덤

너의 무덤은 향기로워서 목 없는 나의 몸은

움찔움찔 경련한다 오래 길들인 칼날 끝

물들어가는 붉은 비명 이마를 만지며 기절

하고 싶었지만 목 없는 몸뿐이다

잠시 비바람이 창문을 두들긴다

달력을 걸어둔 창틀에 박힌 녹슨 못

한 송이 장미마냥 피어 있다 둥글게

꽃봉오리가 가두어놓은 요일은 붉게 칠해진

비 오는 일요일 가시에 목이 찔린 후

당신은 우산을 쓰는가

가슴에 붉은 장미를 안고 우산 아래

목 없는 당신의 몸만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밤길을 걸어간다



카프카의 작은 술집 / 조인호


이태원 역, 뒷골목을 걷다보면 네온사인

흐릿한 카프카의 작은 술집을 만난다

그 술집 어디에서 카프카는 찾아볼 수 없으나

좁은 지하계단을 내려가 침침한 까마귀 날개

같은 커튼을 넘기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술잔을 기울이는 그들이 있다

두 다리를 꼬고 앉았지만 다리 많은 지네마냥

지퍼는 하복부를 악물고 늘어져있다

악몽의 밤마다 아름다운 변신을 꿈꾸는 그들은

여장남자, 그들이 마시는 술은 캄캄한 기름 같아서

액체이면서 불타오른다

그 불길 속에 자신의 인면피를 남김없이

태운다 검은 연기가 드리우는 그들의 얼굴은

여자이다 남자이다 하지만 언제나

흐릿하다 테이블 위 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술은 출렁거리며 회오리 모양 어딘가로

점점 빨려들어가듯 사라진다

술잔 끝 테두리에 묻어 있는 립스틱의 흔적

어둡다 두 갈래로 포개진 입술은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듯

좁은 지하계단을 벗어나려 까마귀 날개처럼

푸드덕거리는 뒷골목에는

꼭꼭 숨었던 단단한 알껍데기를 깨고

이미 떠나가버린

카프카의 작은 술집을 만날 수 있다



축구 / 조인호


병실 창 밖엔 비가 내립니다


나는 아버지와 축구를 합니다 슛이 날아올 때마다 쾅쾅쾅 서정없이 번개가 칩니다 공사판 목수였던 아버지, 나무 속에 박히다 만 못처럼 병원 침대에 구부러져 있습니다 복수 찬 배를 품은 아버지의 모습은 둥근 축구공을 끌어안은 골키퍼 같았습니다 나이스캐치입니다 회전하며 날아가던 축구공, 눈물이 핑 돕니다 시합이 거세질수록 장대비는 쏟아붓고 그라운드는 암세포가 전이된 아버지 뼛속처럼 여기저기 축구화 스파이크에 짓눌린 구멍만 숭숭 늘어갑니다 혹시 오늘은 빗맞은 망치질이었을까요 아버지의 구부러진 등골 위로 잘려나간 푸른 잔디가 풀풀 날립니다 그것은 싸늘한 통증 같은 푸른 불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라운드에 그대로 누워버렸습니다 하얀 옷의 심판은 아버지의 반쯤 풀린 눈을 향해서 노란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차라리, 내게 망치를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박히다만 못을 쭉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수중전 경기가 한창인 휴일이었습니다 죽은 목숨 같은 오프사이드 선이 전광판을 가로질렀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나보다 먼저 그라운드를 뒹굴며,


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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