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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문학동네 신인상 시 당선작] 최예슬 변명 외 4편

 

 

 

변명

 

 

이곳 아테네는 혼란스러운 도시입니다

시민들 사이로 회의주의가 유행하고

음유시인 마을은 감수성 과잉입니다

예언가의 말처럼,

고귀한 사람들이 비극적 공동체로

몰락하는 것입니다

 

나는 살찐 돼지입니다 철학은 모르고 예술은 조금 할 줄 압니다

벽에 윤곽선 그리는 일로 근근이 먹고 살지요 이것은

하늘의 색깔과 우리들의 관계, 공간과 느낌 따위를 붙잡는 일입니다

관공서에 그려진 온갖 윤곽들은 내가 붙여놓은 것이에요

쇠약한 빛, 풍만한 언어, 공간의 명암

알고 싶은 부분만 도려내어 스티커처럼 붙여놓을게요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식사시간을 경멸합니다

겨울과 여름 내내 먼지투성이 외투를 걸치고 광장을 떠도는데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먹지 않고를 반복합니다

야위어가는 영혼을 간신히 붙들고는

네 자신을 알라며 호통을 치던 광경,

도대체 얼마나 헐벗어야 만족할는지요

그의 고집을 못 이긴 예언가들은 광장을 떠나기 시작하고

여벌의 외투와 무도회에서 남겨진 음식을 조금 얻어와도

소크라테스는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신들을 노래하던 자리에 벌거벗은 조각상만 남아 있습니다

아테네 청년들은 나날이 타락하고

시민들의 식사시간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불법체류자 마을에는 병을 악화시킨다는 약이 떠돌고

닭 모가지 비틀어오던 주술사들은 신전 앞에서 유령이 되었습니다

신전을 걸어잠근 주정뱅이 문지기는 며칠째 소식이 없어요

 

사실은 말입니다

우리 돼지들은 아테네에서 가장 회화적이고 음악적입니다

눈을 감아도 뜬눈처럼 밤을 지새우는 예민한 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첩을 꺼내 보이는 감각적인 종족,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동안 눈과 코와 귀를 열렬하게 감각하는 것임을

광장 한가운데서 고백하려 하는데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것보다 죄악인 것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것이라며 고집을 부립니다

자신의 우리에서 기르던 돼지에게 병을 의탁하는 인간이라니,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아니 부끄러운 건 내 마음일까요

그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웅크린 채 한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내가 소크라테스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단지 정기적인 소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작문시간

  

 

놀라지 말아요 오늘 숙제는 내가 발표할게요

나는 위대한 천재는 아닙니다 단지 솜씨 있는 발견자입니다

오늘 아침 마술사의 집에서 붉은 발을 가진 외동딸이 태어났어요

외과의사는 외동딸의 발목을 잘라버렸고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할 수 없이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다니기 시작했지요

독학자는 주현절이면 광장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댑니다

—사유는 왜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가!

그는 허름한 지성의 겉옷을 뒤적이며 행인들의 답가를 기다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광장의 시계탑을 이리저리 옮겨대며 노래하지 않아요

밑그림을 두 번 세 번 덧칠하는 화가들, 일부러 삐뚤삐뚤한 단면의 세공사들,

지하 골목의 뜨내기들, 도서관을 지키는 문지기와, 기뻐하지 않는 행상인들

그들은 독학자를 이기적인 난봉꾼, 고집쟁이 외동딸로 비난합니다

하늘에서 죽은 쥐떼가 구름에 떠밀려 흘러갑니다

단호한 오월의 날씨에 혁명이란 시민들의 여분의 감정

무너지는 첼로 연주의 음계에서 제국과 인생이 흘러나와요

우리는 모두 재즈클럽의 악사, 당신의 허밍에 마을의 운명이 달린 거죠

(너 같은 빌어먹을 몽상가들 때문에 대도시가 이 모양인 거다!)

쉿, 휘파람도 불지 말아요, 나약한 운명들이 술통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는데

외동딸은 자신에게 부재하는 것이 신념인지 현대식 시민정신인지

알지 못한 채 붉은 말을 돌려받으러 외과의사를 찾아 길을 떠났고

 

나는 교실 뒤편에서 백조의 목을 힘껏 비틀었습니다*

얇고 긴 목이 산산조각 바스라질 때까지

주홍색 활자들이 뚝뚝 새어나올 때까지

 

* 엔리케 곤살레스 마르티네스, 「백조의 목을 비틀어라」에서 인용.

 

 

 

 

비밀의 왕국

  

 

         먼 옛날 비밀이라는 작은 왕국에 일곱 백성이 살고 있었다

         유난히 비밀이 많던 거짓말여왕, 일곱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들을 모두 사형할 것을 명령했고……

         이것은 두더지 서기관이 비밀리에 옮겨적은

         일곱 백성들의 유언장

 

 

  귀머거리 시인

   고독에 대한 풍문이 들려오면 마을 언덕에 모닥불을 피워주세요. 흉가에서 들썩이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보고 싶어요.

 

   어린이

   일기를 쓰는 것은 숙제였으므로 일기장에는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어. 엄마가 죽으면 염소에게 일기장을 먹

여야지.

   (엄마에게는 비밀인데요. 나는 시도 쓸 줄 알아요. 어제도 꿈속에서 엄마가 죽는 시를 썼다구요.)

 

   소심한 혁명가

   모두 각자의 리듬으로……

 

   쌍둥이 심장

   너와 나의 경계에서 잠들고 싶다 그것은 너도 되고 나도 되는 것. 열렬한 왼편 냉담한 오른편. 웃음이 울음처럼 터지려

고 합니다.

 

   원더보이 알바

   간신히 스물다섯 번째 스테이지. 동전 몇 푼에 원더보이 노릇도 지긋지긋하군. 좀처럼 판은 깨지지 않고. 빌어먹을 못

생긴 공주는 어디에 있길래.

   왜 당신의 전략은 늘 그 모양입니까 지겨워 죽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서툴렀습니까. 오늘은 어제를 입은 내일과도 같아서 늘상 처음 하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나, 두더지  

   나의 진실은 거짓말이에요. 당신께 진실해지는 순간 나는 거짓이 되어버리죠. 나의 엄마 거짓말여왕은 내가 왕국에서

가장 진지한 서기관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달라요 나는 왕국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시인입니다.

 

백성들을 죽이고 왕국에 홀로 남은 거짓말여왕

너무 심심한 나머지 거짓말 놀이를 시작했다

자신은 여왕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여왕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또 거짓말을 낳고……

결국 자신이 여왕인지 아닌지 헷갈려 광기에 사로잡혀

영원히 비밀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나,

      그러니까 나는…… 누구일까

 

 

 

 

마지막 뮤즈

  

 

바다와 나무가 그려진 춤을 추기 위해 빈손으로 떠나왔습니다

세계는 고집스런 사람들이 불행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고

곤궁한 시기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구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우리들의 삶은 뒤틀려 있습니다.

오늘도 희극 배우를 꿈꾸는 나의 아버지, 무용한 인생이 전부이고

테이블 위에 올라 반주 없이 스텝을 밟는 여동생의 버릇

당신은 선술집 간이침대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며 한 달을 보냅니다

색채, 감정, 데생이 남용되는 스승의 기보법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구겨진 종이 조각일 뿐이지요

사교계의 볼거리라곤 외줄에 매달린 곡예사의 묘기.

나는 토슈즈 몇 켤레와 연회복을 비싸지 않은 값에 팔아버립니다

한동안 오렌지가 열린 과수원을 달려가는 꿈에 뒤척이고

깨어나면 한 병 술조차 마실 수 없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겠어요

가난은 열정에 도취된 군중들의 정서입니다.

선과 형상을 빚어넣어 예술가의 본능을 되새기는 귀머거리 화가

음표들이 실종된 악보를 뒤적이는 브라스밴드의 리더

비극적인 코러스에 맞춰 자라나는 우리들의 인스피레이션

자유분방한 음악, 피어나는 미모사,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나의 계절도 우울한 도시생활도 조화로운 동작으로 피어나겠지요.

오랫동안의 투병생활과 향수, 신경쇠약으로 지쳐 있겠지만

당신은 위대한 화가이며 시인이고 조각가이며 극작가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광대극이 끝난 후 시민들은 극장을 떠나갈 테지만

우리가 추었던 그것은 한낱 몸짓이 아닙니다

청춘을 지탱하는 춤의 열망, 춤보다 리드미컬한 당신과 나의 서사,

이별할 때에는 발끝으로 서는 버릇.

당신이 무대에서 혼란과 열정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계의 몰락을 아주 조금 늦추는 나의 작법입니다.

 

 

 

 

 

외출

 

 

      1

수술실 늙은 여의사는

익사한 선인장에게 물을 붓고 있었다

마른 시간으로 호흡하던 얼굴은

검은 선인장으로 옮아가던 중이었고,

그것은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자세

 

“죽어가는 것들은 불필요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가시가 돋아나는 것은 곤란합니다

관계는 선명해질수록 불행한 거예요

당신의 선인장을 뽑아버리고, 나를 깨끗이 비워주세요

나의 이력은 죽음으로부터 시작하거든요

엄마가 사준 빨간 가방을 힘차게 열고 나왔고

그날부터 운명의 게이지는 조금씩 소모되고 있어요

나는 죽어가는 중입니다

운명을 덜어내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사뿐사뿐 죽음을 낳고 싶어요”

 

늙은 여의사는 나의 자궁을 벌리다 말고 속삭였다

선인장은 죽지 않았어요 단지 불감증일 뿐이에요

 

      2

죽음으로 달려가는 즐거움의 여자

미처 연애가 즐거운 줄 몰라서 글을 쓰지 못했다

이것은 선인장의 불감증에 대한

화분 여사의 병상일지

 

      사치스런 감정을 신봉하는 늙은 여의사

      익사한 선인장을 데려왔고

      나의 자궁에는 물컹이는 살덩이가 맺혔다

      선인장양은 불감증이었다

      불행히도 자신의 선명함을 알지 못했고

      죽어간다는 자괴감에 취해 가시를 피우지 않았다

      그녀 안에서 돋힌 가시들로 온 내부가 멍이었다고

      벙어리 해부학자의 침묵이 전해왔다

  

      3

선인장을 뽑고 빈 화분만 남은 늙은 여의사,

나의 자궁을 벌려 가득 물을 붓다 말고 속삭였다

우리의 배경은 너무 오랫동안 절망이었습니다

 

 

최예슬 시인 약력

 

*198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마로니에여성백일장 장려상. 정보문화대상. 2010년 전국만해백일장 일반부 장원.

*현재 이화여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재학중.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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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눈 / 김재훈


가장 위험한 상처는 적막 속에서 태어난다


총성이 울리고

공중의 새가 통째로 떨어지는 밤에는 어떤 짐승이든

전속력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아름다운 옛 애인들은 항상 전속력으로 떠났고

아름답다는 말 속에는

숨 가뿐 동물들이 살고 있다


숨:

한 아름다움이 다른 아름다움 속으로 파고드는 것

(당신은, 당신이 잠결에 스스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 본 적 있는지)


혹은

갑자기 열리는 하나의 상처,

구름들


구름이 하나 흘러가고


나는 구름에 취해


감정,

그리고 감정의 정치를 감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입술을 물게 하는 어떤 감정은,

生을 통째로 삼키거나 차라리 던져버리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뭉쳐진 눈(雪)과 흙 속의 감자와 우리의 뿔을

동일한 각오로 단단하게 만들지


무엇이든 상하게 하고 싶은 날이 있다

몸통보다 커다란 뿔을 세우고 돌진하는 짐승들

마치 그 뿔이 부러지길 바라는 듯이


하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런 걸 정말 각오라 말해도 좋을까


간신히 희미해지는 구름의 전속력

겨우 그만한 각오를 품고

내가 나를 뭉쳐 공중으로 던져버릴 수 있다면


해 저무는 늦은 오후의 주택가에

아무도 모르게 검은 눈이 날릴 것이다

 

 



공허의 근육 / 김재훈


삼월에 고백했는데 지금은 구월, 서사도 없이 시간을 흘러서

이름 붙이지 못한 구름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수년간 방치된 흉가가 드디어 무너졌을 때는 장마가 지나고

매미 울고 뜨거운 여름도 지난 뒤라고


어쩌다 마른 잎사귀를 밟았지만 다시 보면 죽은 매미였다

무너진 집은 무너지기 위해 얼마나 오래 허공을 뒤틀었을까


그늘과 함께 주저앉아버리는 모든 통증의 끔찍함에 대하여 잠시,

나는 생맥주를 마시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는다


정말 그래 매미라는 풍선, 잔뜩 부풀어오른 여고생들은

한꺼번에 울어버리고 울어버린 만큼 떡볶이를 먹지


몸 아픈 구름들이 이빨을 떠는 저녁 지상의 모든 그림자가

치통처럼 부풀어오른다 피가 고인 입술에 입맞춰주겠니


저기 풍선이 하나 날아간다 울음이 울음 속에 스미듯이

허공으로 작고 빨간 허공 하나가 아랫입술을 물고

 

 



비늘꽃 / 김재훈


  아, 저 무성한 비늘,


  봐, 내 팔뚝에 소름이 돋고, 손가락은 뱀처럼 길게 늘어나지, 내가 너를 만지

면 붉은 손톱 밑에서 가느다란 혀가 자란다, 설익은 무화과를 먹으면 혀가 갈라

진단느데, 혓바늘 하나하나 갈라져서, 혀가, 머리털처럼 덥수록이 길게 자라,

개천 둑에 열린, 설익은 무화과를 따먹은 일뿐이었는데, 콸콸 넘쳐흐르는 장마

철 개천을 보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간지러운 작은 고추를 만지작거렸을 뿐인데,

  문득,

  다친 새끼고양이가 가여워 산 채로 땅에 묻어주었을 뿐인데, 무덤을 덮은

흙이 잠깐 갈라지다 마는 걸 보았던 일뿐인데, 무화과나무 아래에선,


  모를 거야, 몽정의 밤들, 파란 혀를 지상까지 길게 내린 달빛이 내 얼굴을

핥던 밤, 나는 달아날 줄 모르는 송아지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따뜻하구

나 파랗게 무섭구나 끄덕거렸는데, 내 손톱달에서 혀가 길게 자라는 지금,

너는 고양이의 귀 같은 꽃, 송아지의 주둥이 같은 꽃, 혀를 길게 풀어헤쳐 내

깊숙이 뿌리내릴 테야, 수천 마리 나비로 하르르, 날아드는 거야,


  눈뜨지 마, 잠들어, 작은 무덤처럼 잠들어,


  비늘꽃, 비늘꽃, 무덤꽃, 비늘꽃,



 

 


찰스나 나나 / 김재훈


낮잠을 자는

누이 옆에 앉아 사과를 깎는다


서툰 칼질로 속살을 두껍게 베어내다가

나는 그만,

누이의 잠꼬대를 들어버렸다

찰스, 아니야 찰스


잠든 누이를 바라보니

키가 한 뼘은 줄어들었다

누구일까 찰스는

그도 과일을 깎는 데 서툰 걸까


작아지는 누이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데

한 손에는 사과

다른 손엔 과도를 들고 있다

괜히 찰스가 미워진다


누이는 어디서 그런,

하지만 찰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니

일단 찰스를 용서해볼까 하는 요량이지만


용서라는 건 또 뭔가

그럴듯하게 멱살 한번 잡아본 적 없고

그야말로 침대에 누워 벽이나 차는 주제에

누이 꿈속의 찰스를

용서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누구일까 찰스는 누구일까, 자꾸만

이제는 인형만큼 작아진 누이의 잠꼬대를

엿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안 돼 찰스

형님, 해봐 찰스

따위의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아

찰스를 불러내서는

사과가 담긴 쟁반 앞에 마주 앉았다


우리 둘은 어지간히 쑥스러운 모양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숨이나 수고 있다가

동시에 아 근데, 하고

고개를 드니

누이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사과나 먹으면서

누이를 기다리자고 말하려는데

내 어깨를 두드리며

찰스가 먼저 입을 연다

형님, 해봐 찰스


뭐라는 거니 찰스

형님, 해보라니까 찰스 말조심해 찰스 장난 말고 찰스 재미없어 찰스 미친

거니 찰스 이건 아냐 찰스 뭔 지랄이야 찰스 까불지 말고 찰스 멱살 잡고 찰

스 뒹굴면서 찰스 야 이 새끼 찰스 죽고 싶니 찰스 가만 안 둬 찰스 이빨 물

어 찰스

제발 좀 찰스

제발 좀 찰스


아, 정말 누이는 정말 어디로 간 걸까

못생긴 사과가 키득거린다



 

쿠키 / 김재훈


사다리

시계

종이컵

질서와 정지


달고 딱딱한 쿠키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에 대하여

인간의 성분에 대하여


입 벌린 채 음식을 씹는 사람들과

춤추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도서관

어린이

슬리핑백

구름과 겨울


예보와 다른 폭설이 내린다

곧 그친다는 소문이 돌지만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흩날리거나 쏟아지는 것


펭귄에 대한 정의가

펭귄의 것일까


서가에 주저앉아

만지작거리는


주머니 속 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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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탁 / 이선욱

 

그러니까, 가문 벌판이었다 

저녁이면 한 무리의 염소들은 그늘로 떠났고

목동의 손만 홀로 남아 벌판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서 타자를 쳤다 

타자를 쳤다

캄캄한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솔가지 타는 소리가 허공에 퍼졌고

타자기에선 부서진 사막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다 닳은 잉크처럼

어둠에 날리는 글씨와 함께 

이따금씩 타점이 강하게 울렸으니

휘어지는 바람을 따라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달라지기도 했다

목동의 손은 가벼웠다 

몸은 없고 손만 남았으므로

말없이 서술하는 시간은 

활자판의 중심처럼 칸칸씩 이동할 뿐

꿈꾸듯 망설이는 타법은 아니었다 

다만 슬픈 꿈의 오타만이

하얀 털뭉치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궁극의 어떤 형상 같았으나

궁극에는 자라지 못할 운명이었다 

자판은 타법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니면 무언의 잦은 행갈이였을까 

어딘가 어둠은 글썽거렸고

그것은 타이핑한 글씨체였다 

때로는 벌판을 도는 메아리처럼

같은 문구를 연달아 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땅금 갈라지듯

목동의 손뼈가 더없이 두드러졌다 

사방으로 난 길은 없었으나

벌판의 한가운데였다

끊이지 않는 

서술의 발소리처럼 

손끝에는 굳은살이 피어났고

그렇게 타자를 치던 어느 날이었다 

어둠에 날리는 글씨들은 점점 더 흐려졌고

타자기에선 부서진 낙타의 뼈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달아 같은 문구를 치고 있을 때였다

모가 닳은 자판 하나를 누르는 순간 

무형의 뒤늦은 타점이 울렸다

무언가 손등에 떨어졌다 

빗방울이었다

 

 

 

박수 / 이선욱

 

박수를 칠 때마다 

순탄하게 살았던 전생과 

어딘지 모르게 닳은 삶이

문득 겹치고 

사랑이 옛사랑과 자리를 바꾸고

한 박자 통증 같은 

그런 타이밍과는 무관하게

소리가 뒤늦게 손을 찾아오거나 

반으로 갈라진 외계를 발견할 때

바람은 죽고 

바람에 굳은 굴곡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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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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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책 / 주원익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다

책장을 펼치면 나는 소리없는 번개처럼

흘러가버린다

지금 막 열리고 있는

행간 밖으로

쓰여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당신은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건너왔다 나를 펼칠 때마다

당신은 시간처럼 넉넉한 여백이 되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순간의 페이지들

잿빛 구름을 뚫고

버려진 왕국의 미래가 펼쳐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당신의 문장들을 가로지른다

내가 책장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이미 흘러가버린 침묵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는

그 아득한 지평에서

당신은 처음 나를 건너왔다

읽혀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한 권의 책이 미래처럼 놓여 있다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고

당신이 나를 건너가는 동안

미래는 이미 흘러가버린 문장들


침묵은 침묵 속에서 지속된다



뱀파이어의 노래 / 주원익


  내 피를 마셔요 아름다운 당신 내가 드릴 것은 창백하고 순결한 영혼의 방탕일 뿐 보이지 않는 저 안개의 유형지에서 까마귀들은 버려진 종탑을 종일 선회하며 낡고 두꺼운 울음을 흘리고 있어요 불길한 구름이 박쥐떼처럼 몰려와요 황금빛 광기의 철문이 봉쇄되는 소리가 들려요 우리의 심장을 결박하는 상징들 녹물 맺힌 사슬에 감긴 금욕의 십자가들 죽음보다 깊은 불멸의 잠에서 당신이 깨어나도록 내 피를 마셔요 검은 양복을 걸친 사도들이 죽어도 눈감지 않는 눈동자처럼 꿈속에서 우리의 헐벗은 그림자를 추적하고 있어요 눈깔 없는 개들이 몰려와 짖어대고 출구 없는 환상의 미로 속으로 환상을 가두고 있어요 어서 눈을 떠요 내 몸 안에서 불행한 당신 내 팔다리 없는 영혼을 통째로 들이마시고 이 황량한 부재의 시간들을 거슬러가요 까마득히 멀어지는 핏빛 구름의 성채들을 꿰뚫고 당신을 기다리는 무덤은 내 안에 없으니 몸 밖의 어둠이 우리를 배반하기 전에 내 피를 마셔요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새벽빛의 서늘함으로 당신의 시선을 온통 불살라버리고, 나는 영겁의 목마름에 헐떡이고 있어요 내가 드릴 것은 지옥의 성수처럼 투명하고 차디찬 영혼의 방탕일 뿐 내가 천 년을 살고 당신이 단 하루를 살아도 당신에게 흡수되고 싶어요



시계바퀴 세공사 / 주원익


  그는 아침이면 이 분주한 도시를 움직이는 커다란 시계탑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 시계는 드넓은 광장이 복판에 솟아 있어 길을 가는 누구라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세공사는 그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기다란 초침에 매달려 하루 종일 걸레질을 한다 거인의 그림자처럼 광장을 건너가는 불순한 시간들, 세계는 한 뭉치의 망가진 시계인 것이지 그는 매시 정각마다 뻐꾸기처럼 중얼거리며 시계탑이 황혼 속에 늘어지는 오후를 맞는다 하늘로 열림 돔에서 계시처럼 떨어지는 함 줌의 금빛 가루들을 올려다보며 그는 이제 시계탑의 우람한 기둥을 감아도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시계의 중심추가 박혀 있는 꼭대기의 방으로 올라간다 그는 모난 톱니바퀴들을 세심히 관찰하면서 가끔 시계의 온전한 체계를 일탈한 몇 개의 나사들을 두들겨팬다 곡장 구리스를 치고 빠진 자리를 채우고 나니 세공사는 슬슬 머리가 무거워진다 초승달이 초저녁의 시간을 가리키면 탑 꼭대기에 걸터앉아 잠시 쉬던 세공사는 비로소 번쩍이는 금속 연장을 내려놓는다



비밀들 / 주원익


나는 그대에게 말합니다

그대의 비밀을 놓아버리세요

비밀이 듣지 못하도록

그대는 나에게 말합니다

숨길 수 없는 마음의 고독

그대는 텅 빈 상자를 열어

나의 말들을 가두네요

침묵이 갇히네요

폭풍 한 점 그대의 정수리 위로 지나가고

불타는 하늘의 재들을 바라봅니다

잿더미 속에 빛나는 보석들

그대의 비밀은 타오르지 않습니다

비밀은 그대를 가두지 않습니다

나는 상자를 열고 재를 모아

비밀에게

내 것이 아닌 비밀을 보여줍니다

비밀 아닌 것이 없는 마음들을

말없는 그대에게 놓아버립니다

그대는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불꽃의 화환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말합니다

비밀이 듣지 못하도록




죽음의 눈 / 주원익


나는 빛이다 입을 벌린 나의 눈

(그는 너를 집어삼킨다)

전-깃-줄 타는 호랑이여

시선 속에 풍경을 구겨넣고

빛의 발톱이 세계를 할퀸다

호랑이 한 마리 정수리를 밟고

총총히 건너간다

(너는 죽음이야 - 생 가운데)

너는 죽음이야 - 죽음 가운데

그리고 하얀 불꽃들 -

검은 심장의 꽃불 속으로 사라진다

정오의 태양은 목구멍 속으로 쑤셔박히고

잿더미가 입 안에서 출렁거린다

나는 죽음이야 죽음 가운데

그는 나를 집어삼키고

몸 안의 호랑이가 심연을 뱉어낸다

- 너는 외눈박이였지

내가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전-깃-줄 타는 호랑이여

너는 이 구부러진 빛을 씹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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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너츠의 하루 / 조인호


잘 튀겨낸 도너츠일수록 구멍은 둥글다

팔팔 끓는 기름마냥 꿈자리가 사나운 밤 속에 몸을 담갔다가 일어난 아침 둥근 창문을 열면

바람은 밀가루 반죽처럼 배배 꼬이면서 불어온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지문이 내 몸에 하얀 밀가루 자국을 남기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다

옷을 입으면 툭툭 떨어지던 단추들은 모두 어디로 굴러갔을까

우유배달원 대신 현관문을 두드리는 건 옆집 아줌마의

둥근 훌라후프 사이로 빠져나온 뱃살 소리

나는 그 출렁출렁한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늘 내 목에 얹힌 둥근 올가미 같은

하루를 꾸역꾸역 삼켜야 한다

목마른 듯 덜 깬 잠은 커피처럼 하루 내내

몽롱한 향기 풍긴다 혹은 도너츠에 솔솔 뿌린 설탕가루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지하철 입구로 들어서면

우르르 달려드는 개미떼, 구멍난 내 몸을 짊어지고

순식간에 열차 한 귀퉁이로 몰아내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박스 포장된 일터 안에서도 내 몸에 난 구멍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화장실 가듯이

동료들은 내 몸을 통과하여 변기 구멍에 볼일을 본 후

물을 내린다

꾸르륵, 다시금 나의 구멍난 하루가

내리막길 바퀴처럼 어딘가로 끝없이 달려가는 소리

온종일 귓구멍에서 울려대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 / 조인호


어느 날 나는 알라딘 씨를 본 적이 있었다


불현듯 목이 말랐고 그럴 때, 시원한 코카콜라를 마셨다

움켜쥔 병을 살살 문지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콜라의 요정들

재빨리 공기중으로 사라지기 전, 소원을 한 모금 마셔버린 후

코카콜라의 마지막 일 퍼센트, 그 비밀원료에 대하여 알아차린 날 세상은 바뀌었다

엉뚱하게도,

동물원을 탈출한 북극곰들이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활짝 펼쳐진 신문 밖으로 접혀 있던 알라딘 씨가 터번 위에 묻은

모래알을 툭툭 털며 걸어나오다가 ,

북극곰에게 엉덩이를 덥석 물리고

총탄 같은 이빨 자국을 털며 일어났지만

검정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에게 붙잡혀

검정 차에 실린 채 도로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먼 아라비아 폭격당한 고향마을을 떠나온

알라딘 씨가 남긴 것이라곤,

내리막길 따라 또르르 굴러가는 아직 뜨거운 몇 알의 단피들

유언처럼 가물가물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화약바람이 불고 가로수들이 떨궈내는 코카 잎,

매직아이처럼 빙글빙글 어지럽기만 한 세상은

알라딘 씨가 꿈꾼 신기루일까

지난날 알라딘 씨가 낙타를 묶어뒀던

오아시스 대추야자나무의 그늘 속 어두운 비밀 한 가닥을

잘록한 허리 깊숙이 빨아들이던

콜라병이 우뚝 서 있었을까


알라딘 씨가 그리운 오늘, 하늘을 올려다보면

제트양탄자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고등어 나르시시즘 / 조인호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 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 유치원에 갈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지 등줄기를 따라 푸른 멍 자국이 생겼지 선생님과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턱밑에서 뻐끔거리는 아가미 밖으로 펄떡펄떡 흘러나왔지 온몸이 자꾸만 축축해져 화장실로 쉼없이 달려갔지 오줌싸개라는 별명도 붙었지 만나서 반갑다 고등어 친구야 끔뻑끔뻑 인사하던 내 짝꿍은 개구리 왕눈이였지 점심시간마다 긴 혀로 도시락 주변을 윙윙거리던 파리들을 하나씩 잡아먹었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집 안 가득 물이 출렁거렸지 유리거울 속에 둥글게 물이 고여 있었지 나는 거울 속을 헤엄치며 놀았지 거울 밖에서 어머니는 얘야, 숙제하고 놀아야지 그래야 똑똑한 고등어가 된단다! 소리치며 나를 찾았지 그럴 때마다 나는 낚시줄에 걸려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지 입 안에서 피가 흐르고 나는 말을 잃어버렸지 성장할수록 여드름 같은 비늘이 얼굴까지 돋아났지 그러다 사랑을 만났지 무슨 선물을 줄까 밤새 고민했지 사랑아 담백한 고등어 통조림 좀 먹어볼래? 그렇게 사랑은 떠났지 그리고 이제 나는 다 큰 똑똑한 고등어 한 마리,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 방울방울 높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토익 점수가 그리워 밤늦게 종종걸음으로 영어학원을 다니지 하루가 저물고 잠에서 깬 새벽 무렵,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신선하게 살아계셨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셨지 얘애,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시지 무서운 나는 프라이팬 위로 도망치지 그러자 어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을 준비하시지 지글지글 익어가는 나를 노려보며 내 깊은 잠을 깨우시지 때마침 따르릉 울리는 자명종은 유치원에 갈 시간을 알리지 어머니가 발라준 생선살을 먹은 나는 오늘도 똑똑해져야지




장미의 요일 / 조인호

 

가시에 목을 찔린 후 나는 우산을 쓴다

활짝 펴진 우산이 나의 목을 베어먹는다

달랑 남은 나의 몸만이 밤 골목을 걷는다

네온 간판 불빛을 받아먹는 붉은 핏방울

닫힌 너의 창문에 비스듬이 기대다가

달아오른 빰을 유리에 문지르며 주르륵,

흘러내린다 창문 너머 너는 칼로 도마 위를

내리친다 초인종이 울리고 축축한 나의 몸만이

절뚝거리며 들어와 도마 위로 가지런히 눕는다

송골송골 가슴 밖으로 핏기가 어려 있다

잃어버린 나의 얼굴 모양을 기억하던 손

이제 칼자루를 잡은 너의 손, 허공에 장미 잎

같은 궤적을 남기며 내리칠 때마다

창 밖을 서성이는 얼굴 빈혈을 앓듯 창백하다

도마 위 수북이 쌓여가는 장미 잎 붉은 무덤

너의 무덤은 향기로워서 목 없는 나의 몸은

움찔움찔 경련한다 오래 길들인 칼날 끝

물들어가는 붉은 비명 이마를 만지며 기절

하고 싶었지만 목 없는 몸뿐이다

잠시 비바람이 창문을 두들긴다

달력을 걸어둔 창틀에 박힌 녹슨 못

한 송이 장미마냥 피어 있다 둥글게

꽃봉오리가 가두어놓은 요일은 붉게 칠해진

비 오는 일요일 가시에 목이 찔린 후

당신은 우산을 쓰는가

가슴에 붉은 장미를 안고 우산 아래

목 없는 당신의 몸만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밤길을 걸어간다



카프카의 작은 술집 / 조인호


이태원 역, 뒷골목을 걷다보면 네온사인

흐릿한 카프카의 작은 술집을 만난다

그 술집 어디에서 카프카는 찾아볼 수 없으나

좁은 지하계단을 내려가 침침한 까마귀 날개

같은 커튼을 넘기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술잔을 기울이는 그들이 있다

두 다리를 꼬고 앉았지만 다리 많은 지네마냥

지퍼는 하복부를 악물고 늘어져있다

악몽의 밤마다 아름다운 변신을 꿈꾸는 그들은

여장남자, 그들이 마시는 술은 캄캄한 기름 같아서

액체이면서 불타오른다

그 불길 속에 자신의 인면피를 남김없이

태운다 검은 연기가 드리우는 그들의 얼굴은

여자이다 남자이다 하지만 언제나

흐릿하다 테이블 위 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술은 출렁거리며 회오리 모양 어딘가로

점점 빨려들어가듯 사라진다

술잔 끝 테두리에 묻어 있는 립스틱의 흔적

어둡다 두 갈래로 포개진 입술은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듯

좁은 지하계단을 벗어나려 까마귀 날개처럼

푸드덕거리는 뒷골목에는

꼭꼭 숨었던 단단한 알껍데기를 깨고

이미 떠나가버린

카프카의 작은 술집을 만날 수 있다



축구 / 조인호


병실 창 밖엔 비가 내립니다


나는 아버지와 축구를 합니다 슛이 날아올 때마다 쾅쾅쾅 서정없이 번개가 칩니다 공사판 목수였던 아버지, 나무 속에 박히다 만 못처럼 병원 침대에 구부러져 있습니다 복수 찬 배를 품은 아버지의 모습은 둥근 축구공을 끌어안은 골키퍼 같았습니다 나이스캐치입니다 회전하며 날아가던 축구공, 눈물이 핑 돕니다 시합이 거세질수록 장대비는 쏟아붓고 그라운드는 암세포가 전이된 아버지 뼛속처럼 여기저기 축구화 스파이크에 짓눌린 구멍만 숭숭 늘어갑니다 혹시 오늘은 빗맞은 망치질이었을까요 아버지의 구부러진 등골 위로 잘려나간 푸른 잔디가 풀풀 날립니다 그것은 싸늘한 통증 같은 푸른 불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라운드에 그대로 누워버렸습니다 하얀 옷의 심판은 아버지의 반쯤 풀린 눈을 향해서 노란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차라리, 내게 망치를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박히다만 못을 쭉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수중전 경기가 한창인 휴일이었습니다 죽은 목숨 같은 오프사이드 선이 전광판을 가로질렀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나보다 먼저 그라운드를 뒹굴며,


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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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 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지 않았다


 



이상한 욕실 / 강성은


당신의 몸은 조금씩 사라져 간다

거품도 나지 않는 얇은 비누 토막처럼

당신의 몸을 감추어주던 외투는

당신의 몸보다 훨씬 견고하고 아름다워서

거울을 보며 당신은 외투만 생각했다

욕실에서 가끔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와 마주쳤지만

욕실에선 도무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서 당신의 몸은

구멍 속으로 날마다 조금씩 흘러들어갔다

욕실 밖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외투는 덜렁거리며 혼자 걸어다녔다

태양이 늘 머리 위에서 빛났다

지친 새들이 떨어져 길을 덮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생긴 구멍이 점점 커져갔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잠도 오지 않았다

이제 뿌연 거울 속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누군가 욕실 문을 열었다

다 해진 외투가 거울을 보며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의 비명은 그대로 돌아와

당신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있었다


 



사춘기 / 강성은


어머니의 접시들을 꺼내자

접시 속에서

장미꽃이 뛰쳐나오고

고양이가 뛰쳐나오고

죽은 어머니가 뛰쳐나왔어요


장미꽃과 고양이와 어머니는

온 집 안을 뛰어다니며

나를 찌르고, 물고, 목 졸랐어요

날마다 나는 포크를 들고 그들을 쫓느라

그해 겨울의 태양이 실종되었다는 기사조차 읽지 못했죠


그러는 사이 나는 거인처럼 자랐고

어느 날 집은 모래처럼 주저 앉았어요

장미꽃과 고양이가 어머니를 붙잡아

접시에 담아 비벼먹고 포크와 접시까지 씹어먹자

일 년치 밀린 잠이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악몽일까요, 태양은 일 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고

모래바람은 심장 속까지 불어오고

내 키는 자꾸만 자라 하늘까지 닿았어요

태양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자꾸만 지나가요


 



죽은 태양이 뜬 날 / 강성은


아무도 타지 않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려간다

눈먼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새들도 따라 날았다

달려오던 트럭에 그림자 하나가 치었다

습관적으로 신호등이 눈을 감았다

녹색 곰팡이들이 사방에서 쓸쓸히 피어났다

쇼윈도 안에선 폭넓은 치마가 백년째 불타고 있었다

불 속에서 늙은 배우들이 연극 연습을 했다

아무도 불을 끄지 않았다

누군가 공원 벤치에 앉아 죽은 태양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 태양의 붉은 피가 반짝거리며 죽은 자들의 이마를 찔렀다

묘비명들이 희미하게 짖어댔다

잠든 아이들만이 거리를 기웃거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잠들었다

죽은 태양의 유령이 거리를 뒤엎었다

죽은 자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 속에서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


 



혼자 있는 교실 / 강성은


나의 노트 속에는 폴라로이드 같은 안개

안개 속에는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밤나무 숲과 국도가 있어요

나는 펼쳐진 노트 속으로 들어가 국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숲에선 사소한 불빛 하나 나타나지 않고

국도는 물 속처럼 어둡고

가끔 죽은 고양이가 느낌표처럼 벌떡벌떡 일어서요

나는 흘러가는 노트 속의 산책자

내 기록들의 방관적 수취인

맨발로 일렁이는 국도 속을 걸어가지요

누군가 책장을 넘겨요

바람이겠죠

혼자 있는 교실엔 늘 바람이 불었어요

밤나무 숲이, 국도가, 내가 흔들려요

국도 저 끝에서 환한 전조등 성난 개들처럼 달려와요

수마의 바퀴들이 일제히 나를 밟아요

몸은 유리알처럼 부서져 느리게 어디론가 굴러가요

문득 가로등이 커지고

지나온 길마다 붉은 융단이 깔려요

아이들이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쳐요

선생님이 휘파람을 불어요

바람이 나를 읽어요

바람이 나를 정신없이 넘겨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까지 읽어요

바람이 나를 지워요

나도 나를 자꾸만 지워요

너덜너덜해진 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 있는 걸까요

혼자 있는 교실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렸어요

나는 말랐다 젖었다

써졌다 지워지며

아무 데도 닿지 않아요


 



성탄전야 / 강성은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 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 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 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 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속으로 들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입 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올라갔다

TV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룩한 밤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심사평]


강승은씨의 '12월'외 5편의 시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방식이 세련되고, 시간을 공간으로 구축하는 방식도 안정되어 있다. 일견 강성은씨의 시는 각기 다른 색깔과 재질을 가진 텍스타일을 이어붙여 만든 조가보처럼 보인다. 이 보자기의 각각의 조각들은 시를 쓴 사람의 교묘한 바느질에 의해, 시적으로 변용된다. 한 편의 시 안에 작은 조각들인 사물들이 진입하자 그 사물들은 시인의 공감각적 비유, 의인화의 과도한 사용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시적 자아의 시간 속으로 삼투하여, 사물의 속성과는 다른 정체성을 노정한다. 이를테면 '바람은 씹히고, 구름은 취하고, 애인은 요리되고, 달은 나와 체스를 두고, 앨범은 칼을 들고 같은 식이다. 이렇게 변용된 이미지들이 '시간'을 표상하는 제목들 아래서 배치되거나 병치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 틀은 이 시를 쓴 시인만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더구나 시 한 편 한 편에서 드러내고 구축한 세계가 너무 비좁다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그러나 완성도, 깔끔한 문장 처리 등의 장점을 높이 사 강성은씨의 '겨울'외 다섯 편을 당선작으로 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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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食 / 조영석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터진다. 검은 눈물의 속눈썹을 적신다.

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

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를 감아누르며

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

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올린다.

책장을 찢어 그는 입 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

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

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 너머로 넘기고 나서

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자들의 가시를 솎아낸다.

검은 눈물이 입가로 흘러든다. 재빨리

그는 다음 페이지를 찢어 눈물을 빨아들인 다음

다시 입 속에 넣고 느릿느릿 씹는다.

입술 오므려 송곳니를 뺃어낸다.

그의 이빨은 초식동물처럼 평평해진다.

다음 페이지를 찢어 사내는 송곳니를 싸서 먹는다.

검은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텅 빈 눈동자 속에 활자들이 채워진다.





선명한 유령 / 조영석


그는 일종의 유령이므로 어디든 막힘없이 떠돌아다닌다.

그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다.

다만, 개들이 알아채고 짖을 뿐이며 비둘기들이 모여들 뿐이다.


그에게는 땅이 없지만 발을 딛는 곳이 모두 그의 땅이다.

그는 사람의 집이 아닌 모든 집에 세 들어 살 수 있다.

쥐와 함께 자기도 하며, 옷 속을 바퀴벌레에게 세 주기도 한다.


그의 땅은 기후가 사납다.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모래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없다. 그가 지나가면 그의 땅은 사라지므로.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물과 먼지를 빨아들여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그의 옷은 그의 살갗이다.


그의 몸은 카드와 화투 마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것들을 먹었는지 그것들이 그를 먹었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발효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썩어가는 생선대가리 냄새가 난다.


사람들, 저마다 작은 집과 작은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몸만큼의 권리를 지닌 채 실려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칠 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우면 의자는 침대가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객차가 되었다.

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는 냄새의 포자를 뿌리며 번식한다.

포자를 덮어쓴 사람들은 잠재적 유령이 된다.


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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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 / 송승환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에서는 눈부신 햇살도 죄어들기 시작한다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은 새들을 몰고 와 쇳소리를 낸다 그 속에 기름 묻은 저녁이 떠오른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그만큼 깊어지는 어둠 한번 맞물리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떠올랐던 별빛마저 쇳가루로 떨어진다 얼어붙어 녹슬어간다


 봄날 빈 구멍에 새로운 산골이 차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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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남극 / 조동범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배낭을 꾸린다. 창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당신은 소풍을 떠나려 한다. 배낭 안에 바나나 따위는 없다. 동물원 가는 길, 위로 비구름 지나간다. 당신은 배낭을 메고 소풍을 간다. 우산도 없이, 폭풍을 뚫고 가는 소풍. 이 길이 끝나면 비 그치려나. 신발 안의 빗물이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비에 젖어, 당신은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낸다. 나침반의 바늘은 고집스럽게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바늘의 끝을 따라가면 빙산을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은 비를 맞으며 동물원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펭귄을 만나리라.


  동물원의 펭귄, 물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비에 젖은 당신, 유빙처럼 살아온 삶이었느냐고, 남극을 잊었느냐고 펭귄에게 묻는다. 펭귄은, 극점에 담겨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두 눈 가득 남극을 담고.





거미집 / 조동범


  바람이 불 때마다 거미집이 출렁였다. 거미집 사이로 이슬이 두런거리고, 안개 속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미집. 나는 과수원의 언저리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동구 밖에는 첫차가 잠시 솟아오르다 사라졌고 무른 사과 몇 알이 비탈을 굴러갔다. 느티나무 기대 있던 입간판이 자꾸만 내 쪽으로 쓰러졌다. 마을을 향해 난 길에는 하우스용 비닐이 노랗게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몇 대의 버스가 승객을 기다리다 지쳐 돌아갔을까. 친구는 오지 않았다. 무채색 지붕 위로 천천히 저녁이 왔다. 거미가 내게 말했다. 친구는오지 않을 거야. 거미집을 향해 나는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그러나 돌멩이만큼만 입을 벌려 돌멩이의 힘을 가늠해보는,


  구멍난 가슴 속의 거미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 조동범


  투명한 냉동고의 서늘함 속에 꽃잎처럼 피어 있는 아이스크림. 냉동고는 천천히 꽃잎을 지우고 있다. 아이스크림 판매원은 무료하게 손톱을 만진다.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에선 빠른 템포의 음악만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판매원은 자신의 손을 뺨으로 가져간다. 냉동고의 서늘함이 판매원의 뺨 위에서 얼음처럼 부서진다. 냉동고에 손을 넣을 때마다 판매원은 살의를 감지한다. 냉동고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판매원은 생각한다. 마감을 넘긴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밤이 깊어질수록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더 밝고 서늘해져.

  거리의 사람들은 빠르게 심야로 흘러간다. 판매원의 좁은 미간이 예리한 주름을 만든다. 냉동고의 모서리에서 은빛 조각이 서늘하게 빛난다.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롭게 심야를 맞고 있는 중이다.

  평화롭게 심야가 다가오고,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로운 살의로 가득 찬다. 평화로운 살의를 가로질러 판매원은 냉동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냉동고에서 죽음. 판매원의 마지막 온기는 수증기를 만들어 냉동고의 덮개를 가린다. 판매원은 희미하게 사라지는 냉동고 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푸른 낯빛을 하고 서늘하게 누워 있는 판매원은 고요히 보인다.

  꺼지지 않는 간판만이 심야를 밝혀주는,

  은빛 조각 서늘하게 빛나던 심야 아이스크림 판매점,

  위로 하현달이 하늘을 가르고 있다.

  깊고깊은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버거킹을 먹는 여자 / 조동범


그녀는 버거킹 마니아.

화창한 봄날 눈부시게 화장을 하고 버거킹으로 간다.

택시가 만들어주는 버거킹과의 거리

이십 분 내내 그녀는 버거킹만을 생각한다.

친구도 없는 외출.

버거킹은 그녀의 애인이다.

빛나는 바닥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햄버거 왕국.

그녀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버거킹을 기다린다.

드디어 버거킹이 등장한다.

그녀는 버거킹의 이미지를 먹는다.

버거킹의 간판을 먹고

빛나는 바닥을 먹고

화려한 네온 기둥,

화장실의 변기까지 먹어 삼킨다.

정오의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이미지를 구워 햄버거를 만든다.

버거킹의 시종들은 세련되고 친절하며

버거킹을 집어드는 그녀의 손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누구나 공주가 된다.

버거킹 마니아, 그녀는

버거킹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이미지의 왕국, 버거킹으로 간다.





둘둘치킨 / 조동범


명동 둘둘치킨 앞에서 애인을 기다린다.

튀김닭 냄새가 자신의 영역을 그리는 둘둘치킨,

앞으로 퇴근하는 사람들 지나간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유리 너머의 닭을 바라본다.

오지 않는 애인.

튀김옷을 둘둘 말아 입은 닭들의 천국 안에는

몇 개의 만남과 사소한 시비,

닭들의 죽음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서로 넘나드는 일도 없이.

경계는 늘 견고하다.

오지 않는 애인.

둘둘치킨의 네온이 켜진다.

닭들이 분주히 기름으로 들어간다.

몸 안의 수분이 빠져나가기 전에

경쾌하게 튀겨지는 닭,

오지 않는 애인.

나는 둘둘의 경계 밖에서 시계를 본다.

뜨겁게 펼쳐지는 닭들의 천국 둘둘.

그곳으로 한 무리의 양복이 들어간다.

둘둘치킨 안에서 간간이 즐거운 폭죽이 터진다.

나는 둘둘의 경계 밖에 있다.

몇 개의 만남의 사소한 시비,

닭들의 죽음으로부터

비껴 있다.

오지 않는 애인,

을 기다린다.

둘둘 돌아가는 닭들의 천국,

지루한 닭들의 장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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