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첩(幻帖) / 김종훈
― 길
길을 잃고 흐르던 몸이 닿은 그곳
내 마음의 집터, 폐허로 남아 있네
어디로 흐르던 길이었나
상처로 얼룩진 몸을 이끌고 걸었던 길은
적막하여 오가는 이 아무도 없었네
풀풀 피어오른 먼지
발등을 덮어 절뚝이는 걸음으로
짐승들이 오가던 길 따라,
그대도 모르게 걸었던 세월들
환첩(幻帖) / 김종훈
― 이끼
문 밖이 곧 저승이라 했거늘
줄 끊어진 악기나 풍풍거리며
이제야 겨우 관 뚜껑 하나 짜 맞추고
다시 일어설 자리 찾아 나선 마음
길을 잃었나
밥 먹는 시간 길어지네
흔적 없음이여, 이미 지나간 세월이여
누가 꾸민 음모일까?
어느새 내 몸 이끼 돋아나 사방으로 퍼지네
환첩(幻帖) / 김종훈
― 아지랑이
낮술 퍼먹고 누운 자리
벚꽃 지던가
황사바람 불던가 푸석푸석
사막 펼쳐진 세월아 봄날아
모래를 씹는다…… 환멸의 옛사랑…… 흘러흘러 세월가면 무엇이*…… 상처만이 몰래몰래 쓰릴까…… 무덤 위로 쏟아지는 햇살 말아 마시고…… 환하게 취해서…… 너 왜 울었니?
色情 꾸벅꾸벅 드나드는 물렁한
몸뚱이
타오르는 냄새 아지랑이
* 주: 김수철 노래 중에서
소요산*에서 소요(逍遙)하다 / 김종훈
초여름 비 그치고
자재암 향내 따라 걸으며
바람에게 묻는다
삶은 죽음 밖에서 이루어지거늘
언제나 그 문 열리겠는가
바람은
내리는 폭포나 올려보란다
감은 눈까풀을 간질이며
* 주: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산
묘비명 / 김종훈
―그날 이 글을 기록한 이는 누구인가
바다거북 등껍질에 적힌 글을 옮겨
여기 묘비를 세운다
1
달이 뜨지 않았다.
산이 끓어오르며 숲과 바위를 녹였다.
섬은 기둥 없는 검은 지붕을 마치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머리에 이고 있었다.
고래 기름 횃불을 든 사람들이 침을
뱉어내며 해변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
섬이 가라앉는다 했고, 누군가는 바다 끝
벼랑으로 떠내려간다고 반박했다.
촌장이 급히 세운 제단에서 암소
한 마리가 태워졌다. 자정이 넘어설 무렵,
이미 사람들의 넋은 공포와 입맞춤한 지
오래였다. 늙은 장로들은 뼈마디가 무너지는
한숨을 빠진 앞니 사이로 내쉬었다. 사내들은
모래 속으로 머리를 처박거나 가까이 있는
여인들과 간음하며 혓바닥을 잘근잘근 씹었다.
초경을 막 시작한 계집아이들은 모두
비린 엉덩이를 바다로 향하곤 주문을 외웠다.
사람들 머리 위로 황금 부리 새떼가 고양이
울음소리로 날고 있었다. 눈 없는 물고기들
물 밖으로 기어나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동굴에서 기어나온 뱀들은 앞선 뱀의
꼬리를 삼키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 제단의
불이 꺼져갔다.
기어이 촌장이 제단으로 뛰어들었다. 하나 둘
계집아이들이 실성해 넘어지며
깔깔거렸다. 사내들과 여인들은 상대를
바꾸어가는 난교를 풀지 않았다. 장로들은
스스로 목을 매거나 바위를 들어 서로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바다 멀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들려왔다.
2
오오 주문도 번제도 소용없느니
오로지 혼란만이 진정케 하리라
하늘이 모든 빛을 버리고
지층이 울부짖으며 요동치니
모든 뿌리 있는 것들은 뽑힐 것이요
모든 날개 있는 것들은 공중에서 부딪혀 떨어지리라
하물며 뿌리도 날개도 없는 것들이여
오직 살아 있음이 죄이니라
'문예지 신인상 > 문학동네신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0) | 2012.03.04 |
---|---|
제3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김충규 (0) | 2012.03.04 |
제3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이영수 (0) | 2012.03.04 |
제1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0) | 2012.03.04 |
문학동네 신인상 소개 (0) | 2011.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