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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_ 이방인(외4편) / 장혜령

                                                          심사위원 : 김경주, 김민정, 이원 (시인)

 

이방인 (외 4편)

 

   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불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

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에

전학생의 시점으로

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

초조해질 때마다

별들 사이에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삼키는 연습을 하는

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

깡통 속엔

씹다 뱉은 성냥들이

붉게 차오르곤 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더 말할 것은 없습니까

 

들판 같은 책상 위로

캥거루 한 마리가 뛰어간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이상하지,가

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

 

어디선가

새들의 농담이 들리고

 

그의 배후를 바라본 것은, 저 나무가 유일하다

 

 

 

눈의 손들

 

 

 

   내가 스물셋이었을 때, 남자는 서른둘이었다. 발을 심하게 다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느꼈을 때, 그 사람을 만났다. 남자는 무릎을 한쪽 발을 절고 있었다. 걷지 않는다 해서 고통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몇 번씩 주사기로 내 발에서 물을 빼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날 흩날리는 길 위에서 그는 내게 유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겐 일본인 아내를 둔 아일랜드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여자는 딸을 낳고, 아이에게 유키雪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는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마치 눈처럼 사라졌어.

  그에게, 유키는 Snow와는 다른 단어였다. 그는 Snow를 눈으로, 유키라는 단어를 죽음과 아름다움 사이의 것으로 기억했다.

 

   부부는 유키가 죽은 몇 년 뒤, 아이를 가졌다. 아이는 유키와 같은 딸이었다. 딸이 자라서, 소녀가 되고도 그들은 유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소녀는 아빠를 따라 한 달에 한 번은 배를 타고 런던에 갔다. 역사시간에 가보지 못한 섬나라에 대해 배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자기 몸의 나머지 반을 이루는 그곳이 궁금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일본어 세터에 갔다. 그곳에서 히라가나平假名를 읽었다. 일본어 교본 맨 앞에는 글자를 외우기 쉽도록 글자 하나마다, 그 음으로 시작되는 단어와 사진을 넣어둔 페이지들이 있었다.

 

   유키는 유ゆ로 시작하는 첫 단어였다. 사진은 눈의 고장이라 하는 니가타 현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별 표시를 따라 뒷장을 펼치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쓴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

   백 년 전, 눈의 고장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한 여자가 병든 애인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쓸어 넘겨주었다. 낮고 지극한 시선이 눈과 같았다. 건너편 좌석에 앉아, 차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여행자가 있었다. 남자는 기차에서 내린 뒤에도 눈을 닮은 그 여자를 생각했다. 그는 눈을 닮은 여자를 생각하며 그의 여자를 만났다.

 

   여자의 등은 눈처럼 희었다. 남자는 다다미 바닥에 웅크린 여자의 목덜미를 보았다. 새벽녘에 여자의 붉어진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단단하게 뭉친 눈의 따뜻함에 대해 생각했다. 백지白紙라는 흰 손의 손등을, 뒤집어도 손등뿐인 흰 꽃잎의 배면을 생각했다.

                                                      *

   일본 사람들은 생각하다思う라는 단어로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 양쪽 모두를 표현했다. 그들에게는 이성으로 사물을 탐구하는 일과 가만히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일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불태웠고 가장 좋은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유키의 아빠는 일본 문화의 모순과 미의 개념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을 쓰던 사월에 유키가 죽었다. 슬픔 속에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서문 마지막에 들어갈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꽃잎처럼 져간 사랑하는 딸을 보내며, 라고만 썼다. 그는, 딸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사람의 방식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꿈에서 그는 딸을 보았다. 꿈속의 계절은 겨울이었다. 겨울바람 때문에 딸의 손등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 다른 꿈속에서 그는 꽃잎이라는 글씨가 담긴 술잔을 들고 있었다. 아내도 없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꽃잎’이란 글자를 건져낼 때 몸에서 종소리를 들었다.

                                                        *

   눈의 고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명동으로 가는 4호선 전철 안, 엄마가 무릎을 베고 누운 어린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오래전 그것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잠든 아이의 얼굴 위로 투명한 흰빛이 떠올랐다.

 

 

 

 

 

 

   어젯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시를 읽고 있었는데 그것의 마지막 행에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 적혀 있었다. ‘그대는 발자국 없이 눈길을 가는가, 그대는 지워지기 위해 걸어가는가’ 내 문학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게 시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나무 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새를 불러들이는 사내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가지에서 후드득 눈이 쏟아졌고 새가 날아올랐다. 시의 첫 연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선생은 말이 없었다. 나는 머지않아 나 자신이 두 번째 연의 첫 행임을 알았다.

 

   한 여자의 곁이었다

   여자는 새였다

   나의 왼편에 있었다

 

   여자의 날개를 뜯어

   어린 새들에게 먹였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읽었다. 새의 흰 날개가 하늘을 채웠고 거대한 수정 하나가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소년이었고, 새는 속삭임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위가 항아리 속처럼 어두워져갔다.

 

   낯선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을 발하는 꽃 아래 있었다. 그녀는 겹겹의 문門에 대해, 입구를 열면 다시 새로운 입구가 열리는 꽃의 내부에 대해 말했다. “새의 날개를 닮은, 고요히 물결치는 백白의 입구로 들어가라.”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너의 내부다. 너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희었고 내 앞에서 슬픔처럼 부드럽게 벌어지며 열렸다. 나는 걸었다. 빛의 계조階調를 따라 어두운 흰빛에서 밝은 흰빛으로, 점점 더 밝은 흰빛으로.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문학선생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없이 눈길을 가는가, 지워지기 위해 걸어가는가’ 선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선생은 내리는 눈 속에 서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흰 작약 한 송이가 머리맡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의 말

 

 

 

그것은

물고기의 아가미 또는

지난밤에 깎은 사과 껍질

 

안쪽에서 만져진다

 

두꺼운 외투를 열어 보이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생각했다

겨울에도 철 지난 얇은 옷을 고집하는

가난하고 또 우아한, 어떤 취향에 관해

 

그들이 오래된 만큼

내 생각도 오래도록 이어졌고

 

빌려온 책을 읽을 때마다

 

누군가 몸속에 잠깐 불을 켰다

여긴 누구였을까

 

물결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잠든다

떨어진 모과처럼 여기저기 뒹굴며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겨울, 청어와 모래, 작은 북과 캐스터네츠, 빗방울과 앵두와……

 

길을 잃을 때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것의 목록을 적는다

 

실패가 거듭될 때,

매일 입술에서 닳아 없어지는

이름들처럼

걷잡을 수 없이 얇아질 때

그래서, 살고 있는 그것을 만질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

흔들리는 한

모두 같은 물속일 거야

 

물결의 말이다

 

 

 

폴림니아 성시*

 

 

 

기억합니까

처음 페달을 밟고

혼자 앞으로 나가던 순간을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대답은 없고

룸미러에 매달려 흔들리던

작은 성상聖像

 

어머니에게로

누군가의 팔에 안겨

최초의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

 

그는 달리고 있습니다

열대어의 알처럼

산란하며 어깨에 내려앉던 오후의 빛

아이들의 함성

펄럭이는

 

사이프러스를 닮은

연기 속으로 들어설 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시간은 모든 서명을 지워버렸지요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도처에서 왔습니다 심야버스에서, 매일의 식탁에서

핀으로 나비의 날개를

고정하던, 빈 교실의 작은 책상으로부터

 

옮겨가기 위해

살았습니까

아니요 나는 결코……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어둠 속, 성호를 그으며

무릎을 꿇을 수밖에

손과 발을 묶어달라고 간청하는

꽃다발의

무력한 자세로

제각기 기도할 때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

 

흰 새는

날아오르고 있었지요

거대한 그물에 갇힌 형제들을

끌어가듯

한없이 느린 속도로

 

세계가

조금 전진한 것 같았습니다

 

 

————

* 차학경, 『딕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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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연출 전공)를 졸업했다.

팟캐스트〈네시이십분 라디오〉를 제작해왔다.

〈EBS 지식채널 e〉작가. ‘소셜리스트’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동네》2017년 가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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