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절 하얀 꿈
그 절에서는
도자기 그릇을 팔았다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라고들 했다
비 내리고 천둥 치던 날
절에 갔다
먼 길을 걸어온
손과 발에선
흙냄새가 난다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떠보니 텅 빈 방이었고
죽지 않고 도착해서 기뻤다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곧 내가 찾는 것을
찾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고
밖에서는 여럿의 사람들이
나직이 이야기하는 소리
그들은 즐겁다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언어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구나
겨울이 도착하고 있다
얼었다 녹고
다시 얼어버리는 눈
미끄러지는 사람들
나는 순간 황홀해진다
눈발 속에
홀로 절이 서 있다
하양 문과 검은 지붕
검은 지붕 위 쌓여가는
햐얀 눈
정직한 세상
고요하고 무궁하게
내가 찾는 것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는 그것은 불빛 그것은 굴러가는 토마토 그것은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 그것은 향기 그것은 허기 그것은 치통 그것은 늙은 개의 얼굴 그것은 울리지 않는 전화벨 그것에 손을 가져가면 순간 사정없이 깨어져
무수히 많은 파편들은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빈방에 남겨져 있다
인기척이 들리고
흙냄새가 가득한
순무는 순무로서만
너른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87년식 오토 밴의 갖은 소음과 진동 속에서 우리는 순무에 대해 말했다. 난 순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순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만큼 순무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나는 그에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순무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사랑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는데 나는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순무와 함께 온천을 가거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들으며 우유 거품이 올라간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순무의 적정 입수 온도는 63도이며 그 이상은 질겨진다는 것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고 그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순무라면 뭐든 좋다고 한다. 질기든 맵든 삭아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순무를 찾기 위해 차를 멈추고 순무밭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순무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휩쓸려 우리도 순무의 파란 머리를 쑥쑥 뽀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순무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 순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자네들은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만.
함께 쪼그려 앉은 아주머니들은 모두 혀를 찼다. 하지만 순무들은 우리의 손에 놓인 채 가만히 침묵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이것이 순무들이 기분이 좋다는 신호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순무의 속은 당최 모르는 거라며 침울한 표정으로 깍둑썰기를 하였다. 아주머니들은 작게 조각난 순무에게 고춧가루를 뿌리고 버무리더니 우리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냐고.
우리는 잇따라 입을 벌리며 더 달라 칭얼 댈 뿐이었다.
* 사뮈엘 베케트, <충분히>, <죽은-머리들/소멸자/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자들>
박태기나무아래서 벌어진 일
은영이와 찬영이로
다시는 함께 불리지 않는다
우리는 늘 영이었는데
생각은 서로 무한하다
그래서 무슨 생각 해, 하면
이인삼각으로 달리던 우리의 그림자
꼬여버린 다리 세개와
늘 앞서 있던 너의 어깨를
그리고 청기 백기 내려간
텅 빈 운동장에서 나는
단지 미안하다 했을 뿐인데
파벽돌처럼 딱딱하던 네 얼굴
참 예뻐서 갖고 싶었던 너의 치맛자락
끈 풀린 운동화 너의 지랄맞은 친구들까지
전부 다 폭발하던 그때 그 가을 하늘
나는 바닥에 엎드려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그때 그 달빛 아래
아이들이 떠나도 붉은 멍투성이의 나무 하나
잠시 숨죽이더니 계속 자라는 거 있지
주렁주렁 홍채 같은 열매들이
사방에서 흔들리고
하지만 언제고 영아
네가 말라비틀어진 내 아래를 지나간다면
그땐 겨울 지나 봄일 것만 같고
나도 초록을 피울 수 있을 것만 같고
찬영이와 은영이로
운동장은 가득할 것만 같고
그래도 나는 영이고
영아, 나는 너 다 이해해
그러니 영아, 계속 달려
나 여기서 기다릴께 혼자 꽃피울게
옛날 일은 다 잊었는데
누군가 소원을 물어봐
영아, 기억나지 않는 소원이란
얼마나 오래된 걸까
솥
마당엔 어른들이 모여 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솥을 들여다본다 솥은 우리 가문의 자랑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어머니는 솥에서 태어났다 이 모든 솥뚜껑에 맞아 죽었다 언니는 솥 아래서 불타 연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솥에 누군가를 넣고 누군가를 꺼내며 누군가는 솥을 걱정한다 솥에 들어갈 사람이 점점 부족해 누군가 내게 너는 주워온 게 분명하다고 한다
검은 솥을 들여다보면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는 검은 물이 있다 그 속엔 무엇이 있길래 솥은 한없이 검은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는다 솥이 없는 하루에 대해 쓴다 솥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쓴다 마당을 둘러싼 담장 밖에 대해 쓴다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와 언니가 아닌 것들에 대해 쓴다
계속 쓴다고 되니
죽은 줄 알았던 언니가 늙은 배롱나무를 들여다본다 나무 아래서 고양이가 죽은 제 새끼를 핥고 있다 언니는 죽기 너무 아까운 미소를 짓고 있다 살아 있는 고양이는 이미 죽은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제 그만 솥을 치우자고 한다 그는 이제 곧 붙잡혀 솥에 들어갈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쓰지 못한다 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고 결국 백지에 불을 붙여 솥에 던져 넣게 될 사람이다 연기로 가득해 경보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이 도망가면 그 뒷모습을 지켜보게 될 사람이다 나는 솥의 자랑일 것이다
흰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가장 많은 미움을 쌌던 인물처럼
나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개울에 빠져 죽었다는 그와는 달리;
반대편에 잘 도착했는데
돌아보니 사방이 꽁꽁 얼어 있었고
그애는 죽었겠구나
죽은 이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모여 흐르는 땀을 연신 닦다가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
텅 빈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검고 아득해서
바닥이 보이고
돌맹이를 던져볼가
아서라, 죽은 이는 다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고개를 들면 온통 하연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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