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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다리 / 조경희(광주대 문예창작·4)

 

아주 ‘오래된 다리’*가 일제히 안개에 가린다.

아침이면 안개에 가려 광주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가야할 곳이기에 어지러운 삶 속으로 안개를 헤치며

남평을 나선다.

그러나 광주는 아직 잠들어 있다.

(해가 뜨지 않는 한 광주는 잠에서 깨지 않으리라)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다시 밤이 되어도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남평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와야 할 곳이기에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나를 반기는 건 언제나 똑같은 안개일 뿐이다.

 

광주는 강을 건너와 보지 않았기에 남평을 모른다.

남평도 역시 강을 건너가 보지 않았기에 광주를 모른다.

낮이 되면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서로 바라는 보지만

그저바라보기만 할 뿐. 어느 쪽도 ‘오래된 다리’ 를 먼저 건너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시 안개가 피어오르면 모두 함께 안개 속으로

조용히 잠겨 갈 뿐이다.

 

 

* 오래된 다리: 남평에는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다리의 이름은 둘 다 똑같이 남평교(南平僑)이다. 남평 사람들은 오래된 다리를 헌다리, 몇 해 전 새로 놓인 다리를 새다리 라고 부른다. 다리아래로는 드들강이 흐르고, 남평 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너 광주 도시로 나간다.

 

 

 

 

 

[심사평]

 

예선을 통해 올라온 열 사람의 후보작들을 검토하면서 심사자는 그 작품들이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전반의 문제의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 작품들은 여전히 소외받은 사람들의 삶을 자연에 빗대어 이야기 하거나, 후기산업사회의 공허한 삶을 당돌한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제시하거나, 글쓴이 자신의 내면적 삶을 방백 투로 토로하고 있다. 다만 그 시들의 중심이 명료한 사회의식으로부터 불투명한 미래전망으로 옮겨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심사자의 생각으로는 좋은 글은 언제나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새로운 발견에 동참하게 한다. 그 발견이 새로우면 새로울수록 글의 맛은 깊어진다. 그 새로움은 결코 글쓴이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 문화와 상식과 습관에 의해 은폐된 삶의 본래 면목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글은 제대로 이행된 ‘숨은그림찾기’이며, 글쓰기의 생명은 경직된 관념과의 싸움의 치열성에서 확보된다. 문제는 그 싸움이 매 순간 언어라는 사각의 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작으로 뽑힌 ‘골든 빌리지 스토리’는 나름대로 시를 가꿀 수 있는 탄탄한 텃밭을 마련하고 있다. 쇠퇴해가는 소읍 금촌(金村)에서의 하루를 속도감있게 그리고 있는 이 시는 말을 구부리고 몰아가는 재미를 한껏 보여준다. 이 시에서 ‘폭설을 맞으며 폭주족처럼 자전거를 타고’라는 세대의 경쾌함은 냉혹한 절망과 맞물려 블랙코메디의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그 경쾌한 말장난 때문에 정작 화자의 절망이 가볍게 느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투고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도 불안하였다.

이번 심사에서 큰 즐거움은 역시 당선작 ‘오래된 다리’의 발견에 있다. 같이 투고된 ‘안개주의보’ 또한 당선작에 비겨 손색없는 작품으로 글쓴이의 고르고 안정된 수준을 보여준다. 사실 이 두 작품에서 꼭 같이 출현하고 있는 ‘안개’는 이미 오규원에서 기형도에 이르기까지 애매하고 막막한 현실적 삶의 객관적 상관물로 자리잡아 왔다는 점에서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글쓴이는 기성시인들의 안개와는 다른 안개. 허물 많은 현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안개를 그려보이고 있다.

대체 글쓴이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어쩌면 그리 나직하고 고운 목소리와 조용하고 부드러운 눈길을 길러낼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젊음의 낭비로 여겨질 수 있는 어떤 위선적, 위악적 포즈도 없다. 그에게로 와서 그를 사이에 두고 광주와 함평이 서로 바라보듯이. 그러나 한편. 점점 더 거세지는 속악의 물살 앞에 그의 목소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시에서는 무승부가 없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기 바란다.

 

이성복 (불어불문학ㆍ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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