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봄이 내게로 와서 / 김장근(중앙대 문예창작학․4)
하루는 마루 끝에 팔 괴고 누워
하품 한 자락 길게 뽑으며 먼 산동성이
한켠 그늘과 눈 맞추고 있었더니만,
눈물 납디다 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낡아버린 하루하루가
얼마나 많습디까 그 먼지 쌓인 하루하루가 다 그늘이 되면
어쩌나, 그나마 모조리 한숨으로 훅 끼쳐들면 흩어지면
어쩌나, 아까워서 그랬드랬습니다 겨드랑이나 갈비뼈 틈바구니
내 사타구니에 여태도 고여 있는 나이, 볕 좋은 날 이불
털이 말리듯 훌훌 바람에 함부로 맡겨버리지 못한 나이가
아까워서 아까워서 그랬드랬습니다 세월이 무슨,
인둣빛 앞산에 박힌 한 점 붉은 빛
꽃잎처럼만 그리 귀했으면도 생각했습죠
한데 세월은 참으로 모지락스럽기도 한 것입디다
자울자울 한 나절 흐물거리며 한 나절 눈 흐리며 나이 타령이나 속으로 하고 누웠는 놈 앞으로 허참. 봄네가 옵디다그려 연초록 풀잎들은 다 털어버리고 아지랑이 이런 것 개굴개굴 무논 이런 것 죄다 벗어던지고 새살거리는 바람도 없이 본래 봄만으로 몸으로 만 봄이란 년이, 머리는 쑥대머리 까치집 얹고 때절은 저고리 반이나마 어미 풀어헤치고 어디서 주워다 둘렀는지 누런 무명치마 흔들흔들 거려싸며 와서 내 앞에 술 취한 듯 서서 치마를 확 걷어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제 살을 갖다대는데,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하며 한 이십 년쯤이나 때가 쩔어 허옇게 말라 꼬부라진 거웃 그나마도 듬성듬성 쥐파먹은 제 년의 보지를 내 얼굴에 코에,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펑퍼짐한 엉덩짝 앞으로 뒤로 궁싯거려 싸며 비벼대는데 그것 참, 지린내 같기도 하고 달거리 피냄새 같기도 하고 두엄지리 거름 냄새 같기도 하여 한참을 어질어질 아지랑이 피어나듯 어질어질 이마 한쪽 짚으며 어느새 클클거리는 머리 속이나 가늠하다 잠깐 아뜩하여졌더니 봄이란 년이 글쎄 내 얼굴에 제 보지를 짓뭉개며, 아나 먹어라, 아나 먹어라, 이놈의 새깽이야, 내가 네 에미다, 이놈의 새깽이야, 내가 네 새끼란 말이냐, 그리고는 그 년 거짓말처럼, 모지락스런 그 봄이란 넌 봄꿈처럼 나른하게끔 삐비꽃 퍼날리는 먼지길 따라 가버립디다그려
봄이 그 지랄 염병을 떨고 간 토방에 꽃 하나 졌습디다
새빨간 꽃잎이 다 뭉그러져 떨어진 자리가 빨그스름하니 물들었습디다
신기하게도 그 꽃 꼭 나를 닮아 누어만 있습디다 어매,
꽃 지고 나니 해도 지고 이제는 내 한 나절도 아주 다 기울어집디다그려
[심사평]
‘어느 날 봄이 내게로 와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한 편의 시가 짧든 길든 그만한 필연성이 절절해야 작품성을 획득하는 것이련만 대다수의 투고작들이 까닭없이 길거나 짧았다. 또, 인간의 삶과 정서에는 산문으로 표현하여야 공감되는 것과 운문으로 표현하여야 감응되는 것이 있는데, 분별없이 쓴 작품이 많았다. 이것이 시작(詩作)의 여러 기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응모자들이 간과한 결과인 듯 하다.
당선작을 쓴 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학생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이미지를 빚는 빼어난 솜씨, 그 이미지를 통하여 지적 공간을 확장하면서 의미를 창출해내는 연상 능력, 탁월한 상상력 때문이다. 거기다가 막힘없는 어투와 거침없는 표현력이 더해져서 읽고 난 뒤 일견 대담하다는 소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의 지나친 과잉이 시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치명적 요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해 둔다. 이 시를 쓴 학생은 겸허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어를 남용하지 않으면서 사물을 풍성하게 하고, 사물을 버리지 않으면서 언어를 살려내는 절차탁마의 수련에 전력투구하기를 요구하고 싶다.
본심에 올라온 총 27편을 투고한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절차탁마한다면 당락과는 상관없이 더욱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을 버릴 수는 없다. 나로서는 작품들을 읽고 그 가운데서 한 편을 가려내는 일이 직접 시를 쓰기보다 힘겨웠음을 고백해 둔다. 무릇 좋은 시 쓰기를 원하는 자는 그 원하는 만큼 시에 대한 애정은 가지되 욕망을 스스로 폐기할 줄 아는 마음의 상태일 때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당선자든 낙선자든 모두 시를 써서 무엇을 구하려고는 하되 무엇을 누리려 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당선작을 읽다보면 반면(反面)의 교훈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종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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