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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를 쓰다 / 임정훈(원광대, 국어국문학)

 

아직 봄이 먼

겨울의 가운데를 걷다가

뿌리 근처에 하얀 눈

어린 새끼처럼 품고 있는

물푸레나무 한 그루 보았습니다

 

둥지지어 깃들어 사는

작은 새 한 마리 없는

황홀했던 시절의 식솔들 모두 떠나고

덩그라니 키만 더 커 보이는

물푸레나무의 세월 한 귀퉁이

몰래 슬쩍 엿보았습니다

 

저렇게 드러난 상처 속에서도

건드릴 수 없는 따뜻한 슬픔이

수액으로 흐르고 있었다니!

 

뿌리 근처에서 맑은 물소리 들려오는

그의 몸을 꼭 껴안고 사진 한 장

찰칵, 소리나게 찍었습니다

 

 

 

 

 

 

[심사평]

 

임정훈의 ‘雲興寺’와 ‘물푸레나무를 쓰다’ 중에서 후자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본선에 올라온 여러 투고자들의 작품에서 한 가지 느낀 바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그들의 것은 딤정훈 것과는 구별이 되었다.

잡다함과 뜻없는 반복, 넋두리 때문에 대상을 아파함에도 불구하고 혼란만 더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말이 풍부할 경우에도 시를 읽는 재미를 선하는 사람이나 독자에게 주어야 할 것이다. 어머님이나 봄을 주제로 한 시들에서 보이는 말의 과용을 어머님이나 봄이 좋아할 리가 없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강물에 미역을 감게 하는 말이 아니라면 회초리 같은 언어의 형상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아직 몸이 먼’이라고 했을 때 나는 왠지 이 시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을 받으며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아마도 임정훈 자신이 처음 시상이 떠올라 이 시를 써내려 갔을 때도 감상하며 선하는 나의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사실 2연의 끝행 ‘슬쩍’이라는 부분이 거슬렸지만 나는 그것을 의지나 억지가 아닌 다른 어떤 심리로 읽어버렸다. 임정훈이 그래도 되는 것이며 선자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넘어가기로 하자. 봄은 물푸레나무를 다시 사용하기로 하였으니까. 그리고 물푸레나무는 그 ‘눈’을 쓰기로 하였을까

앞으로 좋은 자질을 스스로 부단하게 찾아가 주기를 바라며 낯선 자리에서 그 이름의 얼굴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고형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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