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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방 외 4편

 

조 삼 현


새 한 마리 휘익 부리로
바람을 가르며 늙은 오동나무 귓속으로 들어간다
동굴처럼 어둡고 게르처럼 아늑한,

오동나무는 겹겹이 여미고 싶은 나이테의 욕망 대신 몸속에
소리의 방 하나 들였던 것이다, 늘 비워 두어 새들과
한데 잠 뒤척이는 풀벌레며 다람쥐
제 상처에 깃든 것들을 비좁고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았다
천둥소리 바람소리 눈보라 드나들며 몸 데워 가게 하였다
어떤 날은 집 단장을 하는지 새가, 그러다 부리 다친 새가
물렁뼈를 쪼아대어 수심이 깊어지기도 하였지만
온갖 소리들이 오래 머물다간 방은 늘 이명처럼 왕왕거려
귀앓이를 하기도 하였지만
귀멀수록 환해지는 것 오감이어서, 오동은
나무의 결속에 더불어 살아 온 이웃들의 소리를 귀담았다

오동나무, 맑고 푸른 경전을 뜯는다
오동나무가 우려낸 거문고, 장구, 가야금 중중모리는
소리의 방에 녹음된 오래된 미래*를 풀어내는 것이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택배 

 간곡한 마음이면 틀린 주소로도 전해지는가 겹겹이 주름진

앙상한 손 떨면서 탁본을 뜨듯 베꼈을 어머님의 기별 확, 코

끝에 와 닿는다 맵다 나는 차마 박스 속 속정 들여다보지 못

하고 남향의 하늘만 우러르고 있네 가을비 한 두름 울컥, 눈

물처럼 지나가고 지난여름 아린 기억 한 점 뭉게구름 피어오

르네 팔월 땡볕에 시들지 않은 것은 전봇대뿐이었지 관절염

두 다리를 질질 끌며 궁둥이에 폐비닐방석 매단 앉은뱅이걸음

밀며 고추를 따시는 어머니! 온몸으로 기어 가는 한 마리 굼

벵이였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한 고추대허리춤 두 손 받혀

쭈우욱 펴 일어서며 "저 염병할 놈의 화상은 왜 지만 폔케 자

빠져서 이 고생을 시킨다냐, 그래도 어짤거시여 내가 이거라

도 한께 우리 자석덜 묵고 맵게 살제" 고추밭 옆 하얀 참깨꽃

밭에 모신 지아비 봉분을 향해 화살 된통 쏴붙이더니 몸빼 속

뇌신* 한 알 꺼내 드시고 이내 회오리바람 몰아친다

 지난여름 고추들은 어머니 욕을 먹고 매운 맛 붉게 차올랐

다. 지금, 고춧가루 알갱이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염병할 놈

염병할 놈 염병할 놈 염병할 놈 너 혼자만 잘 묵고 잘 사냐,

하는 것 같다

* 진통제


동행
- 메인스트림에 대하여


누군지도 모르는 아무나 당신, 우리
연애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수작 한번 부려보는 건 어때?
빛이 그림자를 內外처럼 동행하듯
시가 시인을 한평생 데리고 살듯
늘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그대여
재래시장 허술한 순댓국집에서 만나
시린 소주잔으로 첫인사를 기울인,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 아등바등
지하철을 갈아타는 그대여
검정 비닐봉지에 두부 한모 사들고
해거름녘 골목길로 휘어져 가는 이여
목소리가 작아 어깨를 움츠린,
정이 안양천 물비늘처럼 남실거려
하찮은 것에도 그렁그렁 눈시울이 젖는 이여
오늘도 무사하였구나, 서로 등 다독이는
늘 중심이 아닌 길모퉁이의
누군지도 모르는 아무나 당신, 우리
팔짱을 껴보는 건 어때
스크럼을 짜보는 건 어때?


 


육교 위에서

 

이 비 맞고 나면 병이라도 나래지
나비바람* 때도 옹골차던 이파리 훌치는 가을비
앓은 뒤 아이는 사닥다리 한 칸쯤 하늘로 올라가겠지
늙은이는 땅 밑 전설 속으로 한 뼘쯤 잦아들겠지
우산도 없는 공중에서 땅을 밟지 못하는 중년
사내가 나를 찾아 가고 있는 이 길은
몸보다 먼저 떠난 마지막 열차
마음은 벌써 서해 앞 바다를 품어 안고 있건만
피조개 속살처럼 붉디붉은 석쇠 위에
썰물만 하염없이 굽고 있구나, 가리비가 지글지글
제 몸속에 농축한 바다를 토해내 듯
웃자란 기억 속 해금 안 된 문장들이 들끓고 있구나
네온사인 불빛은 하나 둘 심지가 잦아들고
첫 열차가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데도
밀물은 개찰구에 막힌 듯 돌아오지 않는 아침
나, 그 비 맞고 나서 열꽃이 무성하다.


* 나비바람 : 태풍이름


비밀의 방


아내 몰래 방 하나 감춰 둬야할까 봐요
개심사 목백일홍 끌어안고 사진 한 컷 찍은
연분홍 꽃향기 살짝 풍긴 사연이 불꽃 지폈나
내 카메라폰 열어본 그녀 철썩!
내 뺨을 후려치듯 핸드폰 폴더를 닫는다
그녀는 나에게 改心하라하고
나는 開心했으니 고쳐야할 마음 없다하였으나
물증이 진술보다 명백하다 보여 줄 것 더 없다
철조망을 치고 공포탄을 쏘아대는 그녀, 이렇듯
고치라는 것과 엑스레이필름 훤히 걸어 두어
허파에 바람 든데 덧난데 헤진데
몇 번은 당신이 호호 불며 상처 꿰매준데
보일 것 다 보였다는 기타 줄 팽팽한 긴장이
재즈를 뜯다 급기야, 꽈당 쾅 깨진
결혼사진 액자 속 이십년 동안 웃는 두 사람
저 미소 거둘까 말까 지울까, 순간
안방 문 삐쭉이 열고 쳐다보는
머루알 같은 눈동자가 넷!

핸드폰에 비밀번호를 채워
방 하나 감춰둬야 할까 봐요, 아내 몰래



<당선 소감>

한 벌 옷이 되기 위하여 / 조삼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가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고치모형의 집입니다.

나는 누에처럼 온몸을 뒹굴며 명주실을 뽑아 스스로가 갇힐 감옥을 지었습니다. 물론 내 입에서

뽑아내는 실이 누군가의 옷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명주가 아닌

광목을 짰을 것입니다.

  나의 실수가 마음 갇힌 자들과 마음 닫은 이들의 한 벌 옷이 될 수 있다면, 우화등선 날개옷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하여 한 번쯤은 더 실수를 하고 싶습니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깜깜한

고치 속에서 아직은 서투른 부리로 콕콕 문을 두드렸습니다.

  줄탁동시 문 열어준 심사위원님들과 조수옥 시인, 조기조 시인께 무릎 숙여 감사드립니다.

함께한 시주막 동인들, 그대들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조삼현 시인 약력]


* 전남 영암 출생
* 이메일 : sam32112@naver.com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홍해리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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