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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외 4편

 

방 인 자


첫눈 내리는 날
시간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유행이 한참 지난 낡은 간판을 바라보면
빛바랜 것들이 나를 잡아당긴다
눅눅한 냄새 속에서 불려 나오는 추억
오랫동안 침묵했던 활자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온다
누구의 연으로 잠 못 이루던 밤 읽던
시집들이 아직도 따듯하게 남아 있고
굵게 쓴 이니셜을 문신처럼 안고 있는
사전들의 눈동자가 똘망하다
십대의 푸른 시간을 점거하던 참고서들의
너덜대는 귀퉁이마다 빛났던 야망을
투명 테이프가 붙잡고 있다
새 책인 채로 나이를 먹는 것들이 아우성에 목이 쉬었다
채석강 층암절벽처럼 쌓여서
시간에 깊은 뿌리 내리고 이 순간을 나룻배에 태워
과거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쪽 벽을 밀면 미지로 소통하는 통로의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오고
나는 활자들 속으로 먼 여행을 떠날 것이다






깊은 밤
돈세탁을 했다는 연락이 왔다
깔끔한 그녀가 지갑을, 돈을, 어지러운 시간을
북북 치대고 방망이로 두들겨 빨았을 것이다
맑은 물에 세상의 일부를 헹구고 또 헹궈냈을 것이다
뽀얀 돈들이 일렬횡대로 빨랫줄에 걸려 나풀거리고
카드의 마그네틱이 빛을 잡아당기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밤새 꿈을 꾸었을 것이다
돈을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주인공처럼 헬기에서 뿌렸을 것이다
돈을
히말라야산맥의 눈 위로 소낙눈처럼 뿌렸을 것이다
찬바람에 속이 시원했을 것, 아니면 불안했을 것
그렇게 돌아와 따뜻한 침대에 누워 언 몸을 녹이고
이른 아침 그녀는 돈을 손바닥 다림질 하였을 것이다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지갑에 살피로 꽂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돈세탁하고 당당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고심할 것이다



불을 지피다


빈 깻단을 지펴 물을 끓인다
다 털린 빈 몸을 불이 잡아당긴다
꼿꼿하게 물을 끌어올리던 푸른 몸이 바짝 말라
빨간 불속으로 말린다
타다닥
짧은 비명이
폭죽처럼 터지고
순간,
고소한 몸 냄새

울컥
갑자기 목젖까지 뻐근하게 올라오는 슬픔
어머니의 고소한 냄새가
가슴속 깊이 스며든다
톡톡 다 털려 바싹 마른 몸에
화기가 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깍정이에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게다

물이 끓는다
솥뚜껑 사이로 한 줄금씩 눈물이 흐른다
어머니의 평생이 다 털리고도 뜨겁다



토마토는 뜨거웠다


식전
반으로 가른 토마토
탯줄이 시작된 곳으로부터 실핏줄이
온몸에 퍼져 있다

말캉한 다섯 개의 심장들이 술렁이고
손을 타고 주르륵 쏟아져 내리는 선혈
저 뜨거운 속
벌써 붉은 햇살이 당도해 있었구나

달싹이던 심장이 덜컥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통째로 익은 뜨거운 사랑이 기지개를 켠다

나, 얼마나 뜨겁게 살고 있는가
가슴속을 뒤적여 본다
저 깊은 속 어디쯤에서 불그스레 올라오고 있는
사각거리는 사랑 하나 말캉하게 걸린다


청포도


청포도를 먹다가
덤으로
달콤한 햇살도 먹는다

새콤한 달빛도 먹는다
바람 껍질이 입안에 남아
단물의 끝자락을 혀에 걸어놓는다

토실한 것들 사이에
거뭇한 꽃자락들
한때는 꽃이었다가
쭉정이로 남은 것은
실한 알들에 대한 양보가 아니었을까

자꾸 그것들이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은
쭉정이로 남았어도
한때 실한 알이 되고 싶었던 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한 꿈도
어루만질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 그립다

톡톡
마알간 알갱이들이 터질 때 마다
거뭇한 꽃자락들이 자꾸 나를 잡아당긴다



<당선 소감>

무지개처럼 잡히지 않는 시, 그 아름다움을 찾아서 / 방인자


  언제나 가슴앓이는 봄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에 고뿔이 걸렸지만 설레임으로 쿨

럭이던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무지개처럼 詩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 울컥 솟구

치는 감동이 참 좋았습니다. 나에게만 시치미 뚝 떼는 詩. 그

시를 찾으려 오감을 열어놓습니다. 오늘도 나의 하루를 격려

해주는 시가 있어 마음을 맑게 하고 더듬더듬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부족한 제 시를 당선시켜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시 세상의 문

을 두드릴 수 있게 해 주신 강홍기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언제나 제게 따뜻한 손을 잡아주시고 다독여 주시는 증재록

선생님, 최석희 자문위원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어깨를 감싸주던 문우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야무지지 못한 저를 늘 살뜰하게 챙겨주는 남편

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직도 두렵지만 열심히 시를 향해

정진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방인자 시인 약력]



* 충북 괴산 출생.
* 이메일 : scent3535@hanmail.net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홍해리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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