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 박승류
전생이 소였던, 나란히 선 구두의 발목을 보면
우멍한 소의 눈을 보는 것 같다
눈을 끔뻑거리며 쟁기를 끌고 가던 지난날의 소가
환생을 해서 콧김을 뿜으며 현관에 누워 있다
아침이면 은근히 재촉하는 소를 따라
매일같이 생존이라는 봇짐을 지고 길을 나선다
그때마다 그는 나직나직 소를 달래며 걷는다
급하지 않아 급하지 않아 오늘은 모두 다 잘 될 거야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소, 문득
여물통이 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밭머리에 서서 먼 산을 한참이나 올려다본다
골목골목 긴 밭이랑에 발자국을 찍어가며 다녀야 하는
계단식 논밭을 오르내리며 쟁기질을 해야 하는
새로운 자신의 일이 생소했던 그날, 처음의 밭이랑은
참으로 길었던 것이야, 눈을 감았다가 뜬다
사래 긴 밭으로 가서 오늘은 기어이
성공을 하고만 싶은 외판(外販)을 위해 그는
빼곡히 적힌 방문 예정 고객명부를 또 다시 펼쳐본다
밭을 갈 듯 다시, 소처럼 차곡차곡 걸어가던 그
파종을 하고 거두어들이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다
서걱이는 발걸음으로 밭이랑을 헤쳐 나가듯
그의 일생은 늘 소처럼 걷는 것이다
어두워지면 잠시 쉬었다가 아침에 또 들로 나가는
눈이 더 깊어진 소 한 마리
이어지는 무실적으로 깊게 패인 수심愁心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햇살검객
햇살은 가끔 날이 설 때가 있다
날을 세워 다가올 때가 있다
칼날처럼 날이 선 햇살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쩌다, 깊숙이 베일 때가 있다
칼날은 계절마다 다른 검법으로 다가온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폭염검법에
차갑게 부서지는 혹한검법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춘추검법까지도
모두 경험을 해 봤다
칼날에는 칼잡이의 혼이 들어 있어, 어떨 때는
한번 휘두른 칼날에 가슴을 철렁 베일 때가 있다
또 어떨 때는 마음이 동강날 때도 있다
모르는 사이 눈동자를 쓱싹 베일 때도 있다
우멍한 눈을 파고드는 우수憂愁검법은
춘추검법의 한 지류이지만
오랜 기간 숙련되어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우수검법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으로 가는 길에
아차, 또 만나고 만 햇살검객
피할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오늘도 나는
눈이 베였다
말간 피로 눈동자를 씻었다
배후는 늘 허공이었다
거미의 시학詩學
시를 쓰듯이 정성껏, 거미는 제 집을 만든다
끊임없이 이어져 온 섬세한 사유思惟를 줄줄이 쏟아내듯
그는 영글어가는 생각을 촘촘하게 풀어내고 있다
행과 연을 살펴가며 운율을 조절하려는지
어순語順의 배열을 바꾸고 줄과 마디의 이음새를 고쳐나간다
씨줄과 날줄로 엮은 행과 연이 부드럽지만 팽팽하도록
줄과 마디의 이음새에 탄력을 주고 있는 그
풍향이나 풍속을 담아낸 뒤 다시 한 번 살펴보다가
침침해져 잘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비비며
음, 이게 아니야 무엇인가 부족해 중얼거린다
그의 눈은 지독한 근시가 되어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천직으로 생각하듯 쓰고 또 쓴다
숨을 돌리듯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뇌리에
지난번 발표한 시가 문득 떠오른다
그 한 편의 시, 고뇌를 담으며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시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비평을 하는 참새가 그러했고 독자들 또한 그러했다
다만, 몇몇의 날파리가 걸려들어 앵앵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우울해지는 동안 구름 사이 해가 나타났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투명하게 보이던 그물망이 흔들, 꽃으로 보이다가
다시금 반전을 하는 결구로 마무리되고 있다
한 편의 시가 꿈틀 호흡을 시작한다
숨은 듯 보일 듯 바람이 행간의 은유를 넘나들며
가만가만 읽어 나간다 하늘이
말간 눈물을 흘리며 닦으며 파랗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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