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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 정순 

 

 

다음엔 용서 할 수 없어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가볍고 은밀한 흔적들
생선과 맞바꾼 몇 개의 발자국 속엔
아직도 비린내의 안쪽을 훔쳐봤을 집요한 눈빛이 묻어있고
문 열린 주방 한 켠 함지박에 담가놓았던
저녁의 분량만이 온데간데없이 썰렁하다
도둑맞은 함지박 속의 물들은 꺼른하다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한 듯 우물거리고 있는
갈치의 미세한 비늘만이
느릿한 공복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한때
함지박 속의 사연들은 내 오랜 날들의 청빈을 닮았다
쉽사리 쏟아버리기엔 못내 아쉬운 애증의 볼모같은 것
나는 오랫동안 비린내 어린 시장기를 구해와
어스름의 도둑들을 초대해 왔다
한낮의 환한 부주의를 풀어 놓고서
공복의 저녁들을 키워 왔다
아끼면 아낄수록 말썽을 부리는 무수한 날들의 불청객,
소금 한줌 집어와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스름들에게
희고 짭짜름한 충고를 야광처럼 던져주었다

 

 

[당선소감] 더 많은 언어 찾으라는 채찍


어릴 적 내 꿈은 국어선생님이었다.
산과 들과 꽃들의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그 교실 안에서 올망졸망한 말들의 선생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가을 이었을까? 수업료를 받지 못한 학교는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그 이후의 삶들은 좀처럼 국어선생과 관련이 없었다. 더는 꽃들의 이름과 계절의 행방에 대하여 궁금해 하지 않았으며 내가 성장통을 빠져나와 어떤 세상으로 가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했다.
실어증 같은 날들을 명치께에 묻고서 세월을 보낸다는 것, 그러나 그 잃어버린 말들의 안쪽에 더 많은 내가 더 많은 그리움의 언어들과 더 많은 슬픔의 나라들이 더 오롯이 숨 쉬고 있을 줄이야!
그게 시였다. 무심코 마주친 시는 나를 아니, 나의 문장들을 논두렁 저쪽으로 자화상처럼 떠돌게 했으며 돌아오는 길엔 꽃들의 조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말들 속에서 더 많은 언어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끝으로 이곳까지의 나를 챙겨주신 차령문학 박경원 선생님과 김은실 시인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나의 등불 한 사내와 내 소중한 분신 재옥, 재복, 재승이와 함께 당선을 자축하며 난문을 건져 올려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 자리를 펼쳐주신 동양일보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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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길고양이 통해 인간의 삶 접근...고정관념 벗어나

 

선자에게 넘겨진 응모작품(469편)들을 숙독하고 느낀 점은 모두 일정수준을 갖췄으나 새롭게 내놓을만한 작품으로 가능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찾기는 쉬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엇비슷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 문학강좌의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들이 난무하고 난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는 김현승의 ‘엄마의 완경기’와 김지숙의 ‘주막’ 그리고 권인희의 ‘고등어 굽는 여자’ 와 정 순의 ‘길고양이’란 작품이다. 
김현승의 ‘엄마의 완경기는 꽃피는 봄철이 오면 고향집 앞뜰에 채색된 봄이 피는 엄마의 우주를 그려내고 있다. 완경기란 폐경기를 말하는데 이는 여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착상이 돋보였다. 
김지숙의 ‘주막’이란 작품은 장삿길 떠난 아들을 위해 사거리 큰 도로 옆에 작은 주막을 차리고 기다리는 모정을 그리고 있다. 강나루가 사라지고 버스정류장이 생기고 아들이름을 내건 주막에서 인생의 석양을 맞는다. 세상을 뜨고 빈 집만 남아 노모의 가슴처럼 기다림의 애틋한 정감을 더하고 있다.
권인희의 ‘고등어 굽는 여자’에서 달빛에 고등어를 굽는 여자의 삶 속에서 여자의 삶이 고등어를 닮아가는 팽팽한 삶 그물자락을 바다 한가운데서 펼쳐 보이며 여자가 그물 옷에 묻은 저녁을 털어내고 있다는 등 바람의 흔적이 끊이질 않는 작품이다.
정 순의 ‘길고양이’란 작품은 삶이란 명제에서 길고양이와 인간의 삶이 하나로 오버랩되고 있다.  콜렛은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다’라고 했고 웨슬리 베이츠는 ‘고양이가 있는 집에는 특별한 장식물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집고양이가 아닌  길고양이와의 관계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다각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동시다발적인 것들이 삶의 실체 속에서 적절한 관계 접근을 통해 내포한 고정관념을 벗어나고 있다. 
정 순의 길고양이를 당선작으로 밀며 앞으로 튼실하고 절제된 탈관념의 사물시 쓰기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정연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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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훔쳐보기 / 양성숙

 

 

달아나려는 바쁜 오후가 아기의 손에 잡혔다
오가는 발소리 배달하는 오토바이도 옴짝달싹못한다 
허공을 말아 쥔 채 공기까지 부여잡고,
요람 속에 깊숙이 빠져든 아기가
놔줄 기미 보이지 않자 풀 죽은 오후가 잠잠하다
찬찬히 탐색하는 눈길을 아는지
아기입술에 꼬리가 생겼다 사라진다
살짝 벌어진 살구꽃잎에 나른한 웃음이 고여있다
 
이백팔십일간의 비밀을 가득 담고 깊게 잠든 손
내막이 궁금한 커다란 손이 얇고 투명한 손가락을 열면
움츠러들며 더 힘껏 말아 쥐는 아기의 손
나팔꽃처럼 오무라든 주먹이 숨겨 논
아기의 비밀을 가만가만 펴보니
저항 없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는 아기의 손
돌돌말린 하얗고 긴 먼지가 살포시 누워있다
하얀 손수건이 조심조심 아기의 비밀을 캐내자
고스란히 따라 나오는
아기의 내력이 기록된 솜털뭉치들
천천히 한 올 한 올 닦아내면 
다시 순서대로 접히는 미모사 같은 아기 손가락
작정하고 한 번 으깨보고 싶은 큼지막한 손이 꼬옥 감싸자
깨끗하고 까만 눈이 활짝열린다 
그제야 정보가 누출된 것을 알았는지 맑게 웃는다
 
악착같이 감추지 못한 아기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공범을 밝히려 손을 뻗자
아기에게 잡혀 들통 날까 안달 난 오후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낮잠 속에서 깨어난 아기, 몸을 늘린다

 

 

[당선소감] “내게 시는 풀고 싶은 실타래”

 

무척이나 시끄러운 거리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선홍보차량, 서울시교육감재선거 홍보차량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소리들이 짜증날 때 즈음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제 이름을 확인하고 시가 당선되었다는 선명한 목소리에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해졌습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졌습니다. 웃음이 입을 넘쳐흘렀습니다.

제게 있어 시는 안 풀리는 실타래였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실타래였기 때문에 항상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실타래를 풀기 위해 오늘밤도 자판위에 공손히 두 손을 올려놓을 것 같습니다.

 

이 기쁨을 알리기 위해 당선 소식 듣고 제일 먼저 전화 드렸더니 젊잖게 큰소리로 축하해주신 김기택 선생님과 항상 얄미운 자극을 주신 이명우님, 그리고 시마패 문우님들, 마경덕 선생님, 숲동인님들과 옆에서 열심히 응원해준 제가 사랑하고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들과 이 즐겁고 행복한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더 열심히 실타래를 풀어보라고 등을 토닥거려주시고, 맘껏 제 실력을 펼쳐보라고 넓고 푸른 초원을 제게 주신 동양일보와 정연덕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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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따뜻한 숨결로 생명을 노래

 

심사위원에게 넘겨준 작품은 75명의 작품 403편이었다. 예년에 비하여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 많았다. 산문적 기법을 도입하여 시의 진술방법을 확장하려는 산문시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고등학생들의 응모작품도 늘어나고 그 수준도 많이 향상되고 있음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응모작 중에는 깔끔한 소품 같은 작품도 눈에 띄었지만 하이퍼 시(?)를 빙자한 난잡한 시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아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을 보면 이명선의 ‘정류장을 떠나오다’와 양성숙의 ‘낮잠 훔쳐보기’ 그리고 이현정의 ‘손바닥 유전’이란 작품이었다.

 

이명선의 ‘정류장을 떠나오다’는 발랄한 감수성이 돋보이고 있으나 표피적인 일상을 뛰어넘지 못한 작품이었고, 이현정의 ‘손바닥 유전’과 ‘뉴킨’ 그리고 ‘자국의 내력’의 작품들 모두가 발상이 디지털시대의 시로 하이퍼성 작품으로 분류되지만 낯설게 하기와 건너뛰기가 아닌 해석에 치우치고 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양성숙의 ‘낮잠 훔쳐보기’란 작품은 정감과 생기가 있는 시어를 찾아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모성과 아기의 호흡이 하나로 활기를 찾고 있는데 침착한 관찰과 욕심 없는 묘사가 읽는 사람에게 큰 부담을 주기 않고 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을 느끼게 한다. 기교 없이 긴장을 끌고 나가는 솜씨가 돋보이고 있다. 또한 표피적인 상황 전개, 과대한 묘사나 상투적인 어휘에 매달리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앞으로 절제된 자기 목소리 내기, 관념의 탈출을 통한 사물시 쓰기에 더욱 정진해 주기를 바란다. 응모자 여러분들에게 격려를,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린다.

 

- 심사위원 : 정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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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 / 오기석

 

 

히말라야는 죽은 자의 무덤이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그 무덤이 우뚝우뚝 선다

나는 오직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한다

치켜뜨고 고원을 배회하는 그 눈과 내 눈이 부딪칠 때

히말라야는 죽은 자가 산자를 배웅하는

묵직한 항구다

길은 벌써 하늘로 뚫어져 덩그렇게 허공에 매달렸는데

지금 막 망자의 검은 눈을 독수리가 정 조준한다

이곳의 주인은

고원을 만들었다 무너뜨리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타고 독수리는 날아들고 또 그렇게 떠난다

남은 것은 바람의 길을 따라 나는 망자의 영혼 뿐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발톱 따윈 쓸모없다

그저 살점을 움켜쥐고 뜯을 수 있는 부리만 튼튼하면 된다

상주도 조문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목숨은 이미 독수리가 움켜쥐고 있다

그 다음 순서는

모두 바람의 지시에 따라 시간이 알아 할 몫이다

장례의식이 끝나고 죽어서 다시 돌아 올 그 산을 내려간다

이제 남은 것은 망자의 시신과 천장사* 뿐이다

천장사가 도끼로 시신을 난도질한다

그러곤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에게 살점을 던진다

덥숙덥숙 받아먹는 독수리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

 

 

* 히말라야 고원지대 장례에서 시체의 사지를 분해하여 새에게 던져주는 사람.

 

 

 

 

 

 

[당선소감] 세상을 향해 외칠 시가 있어 행복

 

나의 그리움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회초리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회초리로 나의 종아리에 아픔을 남기겠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내 사랑의 시를 외치고 싶다.

 

하늘에 초롱초롱 박힌 별처럼 속삭이고 싶다. 그 속삭임 같은 시를 밤이 새도록 쓰고 싶다.

 

형광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웃거리는 나의 고즈넉한 서재, 그 곳에는 내 얼이 비단결 같은 시어로 촘촘히 짜여 있다. 늑골을 박차고 쏟아지는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하여 씨줄과 날줄이 베틀 위에서 찰칵 거린다. 이것이 바로 내 열정이다.

 

아직 첫눈의 추억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쉬지 않고 썼다가 찢어버린 원고지의 구겨진 조각처럼 창밖엔 하얀 눈발이 띄엄띄엄 내린다.

 

시간이 저만치서 엉거주춤 거릴 때, 나의 기쁨은 어느새 눈물의 진주가 되어 벌써 내 시를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하고 외투의 깃을 세우고 포도를 총총히 걸으며 출렁대는 사람과 사람의 뜨거운 입김을 사랑 한다.

 

사랑이 거기 있기에 오늘의 영광이 더 보람 있고 행복하다.

 

그동안 부족한 나를 지도하고 격려해 주신 청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임승빈 교수님과 문우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덜 익은 글을 덥석 끌어 안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허공을 헤집고 내 이름을 찾아 불러주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정말 감사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싶다.

 

끝으로 충청지역을 뛰어넘어 우리 한반도 한 복판에서 지역사회 문화 발전에 선구자로 앞서가는 동양일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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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언어감각 돋보여

 

응모작(356편)들이 예년(421편)보다 적지만 작품 수준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들이 난무하고 난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고뇌)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품으로는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 김소현의 ‘칼’,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와,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이다.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란 작품에서 아무르강의 겨울은 바람이 누워있던 자리에 서서히 결빙이 시작되고 굶주린 야성의 울음소리 속으로 늑대사냥의 시작은 생사를 가르는 고단한 생의 애환 속에서 벌이는 생존의 속성을 확인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김소현의 ‘칼’이란 작품은 칼을 갈아 냉동고기를 썰 때마다 아들(작자)은 먼 잠 속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네 아버지는 개다’란 어머니의 버릇처럼 외치던 말을 상기한다. 썰리는 고기 속에 손을 넣어 어머니를 만져보고 싶은 충동, 도축장의 소의 혀를 씹으며 짐승의 울음흉내와 겨냥할 수 없는 거리(칼)을 겨냥하는 산자의 일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에선 오랫동안 묵혀둔 아버지의 문서를 정리하다 생존 시 외면했던 아버지의 삶을 아무 가책 없이 허물다 그리움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읽어내고 있다.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은 네팔의 중턱 히말라야에서 성행되고 있는 조장(鳥葬)이란 전래적 장례를 통하여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하며 시신을 주거지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해체하여 독수리에게 먹이는 장례이다.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는 이미지 포착이 돋보인다.

 

앞으로 시작활동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탈관념의 사물시 쓰기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 시단에 큰 재목으로 대성하기를 바라며 오기석의 ‘조장’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 심사위원 : 정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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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섯에 절손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당선소감] 시가 건네 준 가슴 벅찬 선물 

 

언제부턴가 제 안에는 근원적인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질문들이 오랫동안 저를 떠돌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혼자서 묻고 또 물으면서 걸었습니다.

때로는 넘어져 피를 흘리고

때로는 가던 길을 되짚어 걷기도 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제 안에 고스란히 있었던 것입니다.

시가 그 먼 곳까지 절룩거리는 저를 이끌었습니다.

비로소 저는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존재였고 모든 존재는 또한 저였던 것입니다.

시가 저에게 건내 준 가슴 벅찬 선물이었습니다.

그러기까지 제 옆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저 옆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그 사람이 지금 투병 중입니다.

받기만 했던 그 사람에게 지금 쯤 저도 선물 하나 건내고 싶었습니다.

기운 내라고…!

선뜻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신 동양일보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자란 시를 끝까지 읽어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기뻐해 주실 이경림 선생님과 시를 사랑하는 세상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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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기 성찰에 충실한 일깨움 돋보여

 

올해의 응모작품(426편) 대부분이 그 어느 해보다 현란하고 무분별한 어휘들이 난무하는 작품들이 많고 자기 목소리를 가진 작품이 적었다. 공허와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으로는 정영희의 ‘끈’,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 등의 작품이었다.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은 나방과 조각상이 대화를 통해 발가벗겨진 부동의 몸인 조각상과 나비 아닌 존재로써의 날 수 있는 생명체로의 회복을 꾀하고 있는 발상이 흥미롭다.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란 작품에서 ‘세상사가 그대가 피고 지는 사이에 먹어치운 빵과 우유 같다’는 표현 등이 이채롭다. 그리고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란 작품은 있는 힘 다해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젊음을 불사르고 태연히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의연함에서 한 생명의 존엄함을 읽을 수 있었다.

 

정영희의 시 ‘끈’에서는 이 시대 삶은 얻는 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잃거나 잊혀가는 것들이 많다. 뿌리근원에 대한 의식을 통해 자아의 성찰과 인식을 찾아가고 있는 작품이다. 그대로 풀어 놓으면 한편의 동화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정통적 서정의 힘, 자아발견의 성찰이란 일깨움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밀었다.

 

앞으로 역동적이고 절제된 시어 찾기와, 더욱더 관념을 탈피하고 사물시를 쓰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정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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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끈/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섯에 절손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출처 : 시와 비평
글쓴이 : 심은섭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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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달리기 / 김봉래


신체의 일부가 되기 전에는 단지 고철에 불과 했지만
운명처럼 필요와 용도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 쇠붙이,

어쩌면 저 두 개의 바퀴는 생전에 불도저였었는지도 몰라
그저 보행 보조기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기에는
넘쳐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어
저렇게 속도를 즐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강력하게 추진하는 좌우의 은빛 휠 위로
터질듯 솟아오른 이두박근이 태양을 향해 꿈틀 거리고
질주하는 전차의 엔진은 무리한 펌프질에 목이 타지만
이 정도의 트랙은 사막도 아니지

치기어린 한 때, 경계 지은 하얀 선을 무심히 넘나들다
과속트럭에게 두 다리를 모두 주고난 후에도
규칙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을 허비 해야만 했어.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져 코너를 돌다
다시 힘차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바퀴들에게
생의 고비가 직선의 레인 일 수는 없는 거라고 위로해 봤자
그것은 아주 궁색하고 초라한 구호품 정도인 게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력을 다하는 나머지 생 앞에
순위는 그저 순위일 뿐 각 주자의 결승점은 각자에게 있는 것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록과의 경쟁이지

신체의 일부가 되어 필요와 용도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운명 같은 저 쇠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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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의자 / 양호진

 


짙 푸른 산 속, 푸서릿길을 지나는 꿈을 꾸었네
생각의 칼날은 예리하여 방심하는 찰나 마음을 베이고 말았다
검붉은 선혈이 하루의 테두리 속 지런지런 넘칠듯
온종일 에움길을 걸어온 심신이 지쳐버렸다
심호흡 한껏 낡은 의자 깊숙하게 몸을 기댄다
오래되고 낡은 의자에서 고고한 향기가 그윽하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느 산맥의 실오라기 보다 좁은 물줄기 협곡을 지나
산을 몇 굽이 넘고 나뭇가지를 휘돌아
계곡의 바위틈으로 흐르고 또 흘렀네
시나브로 강에 도달하고 바다로 흘러간다
늘 바다에는 산맥의 초록 이끼 냄새가 난다


내가 기댄 저 낡은 의자 어디에서 왔을까
파리한 무늿결 깊숙한 산 속 우뚝 서 있었을까
산사의 눈 내리는 날,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곤줄박이 새소리에 흥겨워하지 않았을까
굴참나무에 떨어지는 이슬 방울의 청아한 공명 느꼈을까
하! 궁금도 하다 저 낡은 의자의 영혼이 궁금도 하다


이제 지나온 질곡의 세월 낡은 의자의 魂(혼)으로 남아
처연하게 숲 속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 당선소감 “당선 소식에 순간적으로 전율”

 
  가끔씩 시구에 `간극’이라는 말을 써 왔다. 
그 만큼 내게는 상(賞)이란 글자와는 간극이 있었다. 암울한 그림자와 맞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수없이 걸었다.
  비사칠 것 없이 태양의 저켠에 서 있는 굴참나무의 삶이었다. 표변할 것 같은 시간의 알갱이들을 촘촘한 그물망에 증류를 시켰다. 아울러 가을의 색감을 눈과 귀와 코에 집중시켰다.
서늘하면서 쏴 한 느낌의 추상(秋霜)을 꾀꾀로 즐기곤 했다.
오래간만에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여명(黎明)의 시간이 여울처럼 흐를 것이다. 이따금 좋아하는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생에 있어 축복이리라.
  시(詩)를 쓴다는 것은 여싯여싯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침묵이리라.
오늘은 감청 빛 밤하늘을 보며 늑골(肋骨)을 켜켜이 치유하던 감성의 자락을 흔들고 싶다. 자연의 소담스러운 느낌을 바람에 흩날리며 다가설 것이다.
  오전에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전화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내 몸에서 전율 같은 것들이 흐르며, 귓속을 스치는 찰나에 나의 평형감각을 지배하던 달팽이관이 팽이처럼 돌며 어지럼증을 선사했다.
  천공해활의 풍광이 절취선을 넘어 내게로 왔다. 기쁨이 배가되어 누구에게 서분서분하는 마음, 이제 겨울의 초입이다. 최근에는 거의 여행을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 겨울 춘천의 소양호를 휘감던 물안개가 무척이나 그립다.
  아울러 당선의 영예를 준 심사위원에게 감사를 드리며 마지막으로 틀수한 심성의 아내와 내년 고3, 고1이 될 창수와 수영이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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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의자와 나를 동일시 ‘풍부한 상상력’

 
  예년에 비하여 많은 응모작(453편)이 쇄도하여 시문학의 열기가 뜨거움을 느꼈다. 시대가 어렵고 힘들수록 치열한 시문학으로 극복해 내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아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은 김봉래의 ‘빨래가 있는 풍경’과 문지수의 ‘영흥도’, 그리고 박종인의 ‘장롱을 열어 놓고’와 양호진의 ‘낡은 의자’란 작품이다.
김봉래의 ‘빨래가 있는 풍경’이란 작품은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생명의 가치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시의 종결어미가 단조로웠다. 문지수의 ‘영흥도’란 작품은 일관성 있게 끌어내고 있으나 의지력이 선명하고 밀도 있게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박종인의 ‘장롱을 열어 놓고’는 한편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를 읽는 것처럼 느꼈다. 역동적인 기운이 엿보여야 할 신인들에게 또한 흠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양호진의 ‘낡은 의자’란 작품은 왼 종일 걸어온 심신이 지쳐버렸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다. 오래되고 낡은 의자에서 또 하나의 자기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낡은 의자처럼 다 늙고 퇴색될지도 모른다. ‘내가 기댄 저 낡은 의자 어디서 왔을까/ 파리한 무늬결 어느 깊숙한 산 속 우뚝 서 있었을까 / 산사의 눈 내리는 날,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 곤줄박이 새소리에 흥겨워하지 않았을까 / 굴참나무 떨어지는 이슬방울의 청아한 공명 느꼈을까.’ 질곡의 세월 속에서 낡은 의자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동일시하고 사물의 매개를 통해 삶을 재음미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등 상상력이 돋보였다. 이제부터 절제된 자신의 목소리 찾기에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드리고, 낙선자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문학이란 어쩌면 좌절이란 거친 토양에서 탄탄히 뿌리내려야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정연덕<시인>

출처 : 월간 한비문학
글쓴이 : 안은주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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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_daum->2007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시

 

 

오 월

김 영 식


아이가
굴렁쇠를 굴린다
빈 골목이 출렁거린다
투명한 바퀴가 오후의 적막을 감는다
파닥거리며 햇살과 바람이
허공이 한 아름씩 감겨든다
감긴 것들이 말려들어가
둥근 시간이 된다 제 몸 속
길을 떠밀며 달려가는 아이

플라타너스 강둑 위
굴렁쇠가 아이를 굴린다
나무그늘 아래서 아이는
새소리처럼 지저귄다
자궁처럼 환한,
굴렁쇠 안 깊숙이 둥근 산이 눕는다
둥근 물소리도 따라 눕는다

들녘 끝
은빛실타래가 천천히
감긴 길을 풀어낸다
고요하던 풍경이 수런거린다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길섶
햇살과 바람이 풀린다
노을 몇 점 걸어 나와
강가에 걸터앉는다

텅 빈,
허공을 밀고 가는 아이
우주 한켠, 챠르르
지구가 굴러간다 오월이
푸르게 자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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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문사로부터 내게 넘어온 원고분량은 266편이었다. 많은 분량이다. 이상한 일은 시가 사회의 반향이나 눈에 띄지 않는 수요에도 이렇게 많은 시의 지망생이 있다는 일이다. 그 이유야 어디에 있든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든 아니든 시인의 위의(威儀)와 자존심과 겸손함을 견지해야 되리라고 생각된다. 각설하고 본심에 올라온 266편의 시편 가운데 내 손에 최종으로 남은 시편은 김영식의 ‘오월’외 4편과 김민영의 ‘내 오두막의 낡은 문’외 8편, 김은실의 ‘입동’외 5편이다.


김영식의 시편들은 밝고 경쾌하며 속도감과 감각적인 언어교직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에서도 ‘오월’은 작품의 소도구들인 소년, 굴렁쇠, 5월의 하늘과 푸르름, 강둑과 플라타너스들이 모두 ‘오월’이란 시를 위해 동질적으로 기여하고 헌신하고 있는 점이 그의 다른 작품 ‘단단한 틈’처럼 서로 견고하게 엉켜 있다.


김민영의 ‘내 오두막의 낡은 문’외 8편은 전 편이 모두 산문성 시의 특장들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행의 길이가 길고 유연함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하고 있는 점이다. 행과 행간이 서로 주어와 서술 형식으로 이뤄진 점도 그렇다. ‘문을 열면 온전한 것은 오직 문뿐이고/ 그냥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오두막,/ 아주 낡은 문과 같은 내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오두막처럼 금세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 시중에 일부 인용한 것임. 그는 장시를 쓰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김은실의 ‘입동’외 5편은 입동 무렵의 스산한 농촌풍경을 아주 리얼하게 승화시켜준 작품이다.


‘메주를 쑤는 일은 마실길을 끓이는 일이다/ 이곳저곳 쥐구멍 숭숭난 마을안 소문을 메우는 일이며/ 겨우내 헐거운 낮잠에 빠져 있을 농기구들의 텅빈 시장기를 달래어주는 일이다’에 이르러서는 절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성 시인의 입동시편들에서도 이렇게 가슴에 닿는 표현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앞뒤의 표현이 이 중심표현을 떠 받치지 못한 듯한 점이 아쉽다. 위 세편 모두 훌륭한 특장들을 지니고 있으나 현대적 감각에 좀더 어필한다고 생각되는 김영식의 ‘오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다른 두 사람에게도 분발할 것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양채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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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박순서

언 강을 떠나는 새는
내 눈 속으로 들어와 집을 짓는다
나는 차마 관 뚜껑을 닫지 못한다
하루살이처럼 세상 휘저으며 여태껏 살아
나는 누구의 보금자리가 되었는가

언 강에도 새들의 집이 있고
꽃이 진 마른 대궁에도
봄볕의 집은 남아있다
내 눈 속의 새들아
이제 돌아갈 길일랑 잊어버려,
마지막 웅덩이에 고인 빗물처럼
흐르다 흐르다 내 몸에 칭칭 감기어
안온한 보금자리에 머무름 같이
너 이제 날개를 묻으라

능선을 넘으면 내 무덤이 있다
낯선 바라마에 끌려가다
부리로도 울지 못한 네 눈물이 있다
저기, 보아라
저승 가는 길목에 굶주린 까마귀가
까르륵 까르륵
빈 솥에 밥을 푸고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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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 하봉채


하룻밤이면 달이 차겠다
비우는 일만 남겠다
곁눈질 모르고 달렸어도
여전히 의문투성인 불혹의 세월
강가를 서성이다 구두를 벗는다
조심스럽게, 강물도 호흡을 멈춘다
온쉼표 하나 없던 일상으로
굽이 낮아지고 한쪽으로 기우는 구두
가죽이 닳고 헐거워져 모양 잃은 구두를
시멘트 둑에 가지런히 놓는다
풍덩, 몸을 던지면 꺾이던 순간마다
마디마디 스며든 악취를 씻어 낼 수 있을까
저리 잔잔하게 살아낸 날은 얼마였던가
양말을 벗으니 울퉁불퉁한 굳은 살
군데군데 각질이 일어나는 발이
놀란 듯 움츠린다. 양말은 구두에게
한 짝씩 나눠주고, 일상을 통째로 감아 쥔
넥타이와 채찍질만 일삼아 온
시계를 푼다, 디지털 포위망을 좁혀 오는
핸드폰도 내려놓는다
한여름인데 시멘트 강둑은 차갑다
한 쪽 발을 내 딛는다, 남은 발을
마저 들여 놓는다, 강물은 더 차갑다
한 걸음 두 걸음 흔들리는 횡보에 달빛이
흔들린다, 줄 선 빛고드름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풍덩!
강 가운데 떠 있던 바지선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먼저 뛰어든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
발목을 간질이는 파문은
짧다
이내 고요하다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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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병 / 박영석

누군가 어둠 속에서
‘어둠’이라고 중얼거린다
어둠은 숨죽인 철조망 아래에서
성큼 더 깊어지고
철망에 찢긴 바람소리만 귓전에 맹렬히 펄럭인다
‘매복은 전술이야’
누군가 어둠 속에서
또 한번 ‘어둠’이라고 신음한다.

완고한 어둠의 절벽 앞에서
우리의 의식은 시력을 잃고 절망한다
결박 당한 시야에는 불안한 빔들이 술렁이고
돌아오지 않는 자의 기다림에 귀 기울인다
군데군데 사람 키만큼 자란 선인장들의
맹열한 가시에 달빛을 잘라 내린다.
‘방심은 죽음이야’

눈을 치켜 뜨고 어둠 속을 노린다
박제 당한 짐승의 분노처럼 이글거리는
어둠의 큰 눈을 겨냥한다
어디쯤 일까 화약 냄새 저 편
혼미한 의식의 저 내면을 가르며
헬기가 날아오른다
죽음과 긴장한 기침소리
가득 싣고 떠오르던 ‘시누크’의 엔진소리
프로펠러에 감겨 하늘 가득 날아오르던 모래바람
몽롱한 의식은 바람 속에 잠이 들고
고향을 꿈꾼다.

깨여라! 파수병이여
헛된 골고다의 빈 무덤 지키는 파수병처럼
정글도에 목 꺾인 열대우림의 나무들
가시를 세운다 

 

 

 

#풀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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