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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 / 서상규

 

 

손때에 절은 박달나무 윷처럼

뻑뻑한 눈살로 초점을 모으고

전철노선도의 윷판을 올려다본다

 

미아 삼거리에서

말몰이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하는지,

이미 패를 정하고 말을 옮기는

윷놀이의 틈바구니에서

윷가락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풀린다

 

역삼역 사거리로

말판에 부적의 길을 그려놓고

말의 근육을 부풀리는 환상

푸른 예감으로 이마에 정맥을 돋우며

고삐를 힘차게 다잡는다

 

철로의 침목이 발 밑에서 풀잎처럼 쓸리며

말갈기가 나부낀다

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말판에서 윷쪽을 띄우는 힘찬 질주

 

지난밤 길몽을 이야기하는 아내 말과

두 딸아이의 말, 재롱에 취한다

한가족이 소풍 길처럼 단란한

방목의 꿈결에 사로잡힌 행상

도에서 모로 말발굽이 가르는

바람결에 곧은 길이 열린다

 

야성의 윷판에서 방심한 사이,

단속원의 올무에 걸려든다

그래도 생을 긍정하듯

붉은 낯빛에 구겨지는 웃음발을 끌며

고개를 끄덕끄덕 고삐 잡힌 걸음을 뗀다

 

 

 

#풀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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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지 / 유현숙


내 몸은 저장물을 다 비워낸 고수부지이다
큰 물이 날 때에나 강은 내 어깨를 잠시 빌리며
저 혼자 하루도 도도히 흘러간다
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엔 밀려 온 세월 하나가
상흔처럼 뒹굴고 있다
급하게 달려 온 저 물길은 이제
강의 하류 어디쯤에서 노곤한 몸 풀고 싶은 것일까
제 몸에서 흘려 놓은 것들 미처 쓸어담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다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간 물길은 저기 어디
산하를 지나가다 그리운 안부 하나쯤 부쳐 줄런지
때로 급류에 떠밀린 적이 있었다해도
한때 신세졌던 내 어깨 한 켠능 잊지 말기를
욕심내 보는이 청맹과니 같은
그대가 빌려 쓴건 어깨 뿐이라는데
나는 왜 가뭄에 배 터진 논배미처럼
쩍쩍 갈라진 전신을 앓고 있는가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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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 조원진

 

 

그해 겨울은 참 춥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골목의 낡은 간판들이 유난히 덜컹거리고

무거운 흙먼지는 떼로 몰려와

종일 팔리지 않는 노점상 과일들을 한바탕

물어뜯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오후에는 읍내 신용조합 앞에서

초라한 차림의 청년 하나가

파랗게 언 손목에 수갑을 차고

경찰관이 지시하는 대로 묵묵히

현장검증에 임하고 있었다

몇 달쨰 밀린 가게 세를 걱정하던 주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밖을 내다보고

어깨를 움 추린 사람들도 잠시 멈추어

수군거리다 지나갔다

눈이라도 한바탕 퍼부었으면 좋으련만

공원 벤치에서 잠자던 어느 노숙자의 찌그러진

운동화 짝 위에 쌓이던 눈을 생각하면 그것도

부질없는 생각이라 싶었다

바람은 또 한바탕 경기를 일으키며 지나가는데

동백꽃잎 입술연지를 곱게 칠한 아가씨가

허연 종아리를 내놓은 채 찻 쟁반을 들고 지나갔다

그 해 겨울은 참 춥고 어두웠는데

부도를 낸 친구는 밤새 야반도주를 했다하고,

신장 이식수술이 평생 꿈이던 친구도 그예

저 하늘 별 밭에 고이 묻혀서

우리는 또, 술병 꽤나 쓰러뜨려야 했다

외등이 하나 둘 켜지는 어스름 녘

지치고 찌든 군상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불빛 흐릿한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술국처럼 열이 오르며, 찬 소주잔이 오가고

부자 집 여자들의 수 천만 원짜리 옷 이야기가

서럽고 시장한 젓가락 끝에 자꾸만 걸려 와서

그래,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씹다가 얼큰해지면

예사로 지껄인 몇 십억의 화폐 단위가

우리 허전한 가계부의 회계처럼 착각되기도 하는

그 해 참 춥고도 쓸쓸했던 겨울

우리를 얼어붙게 한 건 꼭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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