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섯에 절손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당선소감] 시가 건네 준 가슴 벅찬 선물
언제부턴가 제 안에는 근원적인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질문들이 오랫동안 저를 떠돌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혼자서 묻고 또 물으면서 걸었습니다.
때로는 넘어져 피를 흘리고
때로는 가던 길을 되짚어 걷기도 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제 안에 고스란히 있었던 것입니다.
시가 그 먼 곳까지 절룩거리는 저를 이끌었습니다.
비로소 저는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존재였고 모든 존재는 또한 저였던 것입니다.
시가 저에게 건내 준 가슴 벅찬 선물이었습니다.
그러기까지 제 옆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저 옆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그 사람이 지금 투병 중입니다.
받기만 했던 그 사람에게 지금 쯤 저도 선물 하나 건내고 싶었습니다.
기운 내라고…!
선뜻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신 동양일보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자란 시를 끝까지 읽어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기뻐해 주실 이경림 선생님과 시를 사랑하는 세상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자기 성찰에 충실한 일깨움 돋보여
올해의 응모작품(426편) 대부분이 그 어느 해보다 현란하고 무분별한 어휘들이 난무하는 작품들이 많고 자기 목소리를 가진 작품이 적었다. 공허와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으로는 정영희의 ‘끈’,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 등의 작품이었다.
황명희의 ‘나방과 조각상’은 나방과 조각상이 대화를 통해 발가벗겨진 부동의 몸인 조각상과 나비 아닌 존재로써의 날 수 있는 생명체로의 회복을 꾀하고 있는 발상이 흥미롭다. 김은실의 ‘겨울 오동나무에게 민원을 냈다’란 작품에서 ‘세상사가 그대가 피고 지는 사이에 먹어치운 빵과 우유 같다’는 표현 등이 이채롭다. 그리고 김상경의 ‘트럭위의 소 한 마리’란 작품은 있는 힘 다해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젊음을 불사르고 태연히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의연함에서 한 생명의 존엄함을 읽을 수 있었다.
정영희의 시 ‘끈’에서는 이 시대 삶은 얻는 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잃거나 잊혀가는 것들이 많다. 뿌리근원에 대한 의식을 통해 자아의 성찰과 인식을 찾아가고 있는 작품이다. 그대로 풀어 놓으면 한편의 동화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정통적 서정의 힘, 자아발견의 성찰이란 일깨움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밀었다.
앞으로 역동적이고 절제된 시어 찾기와, 더욱더 관념을 탈피하고 사물시를 쓰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정연덕 시인
<!-by_daum->
[2011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끈/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섯에 절손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by_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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