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經)’에 이어서 ‘서경(書經)’의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은 이제(二帝. 堯,舜) 삼왕(三王. 禹왕,湯왕,文왕 또는 武왕)의 주고 받은 말을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유가의 경전이 되기 전에는 그냥 서(書)라고 하거나 상서(尙書)라고 했습니다. 상(尙)은 상(上)의 의미로 읽어서 상고(上古)의 서(書)라는 뜻으로 읽기도 하고 또는 천자(天子) 즉 상(上)의 말씀을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左右) 이사(二史)가 있었는데 좌사(左史)는 왕의 언(言)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왕의 행(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尙書)와 춘추(春秋)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동양의 이러한 전통은 매우 특징적인 것입니다. 사후(死後)의 지옥(地獄)을 설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장치로 평가됩니다.
‘죽백(竹帛)에 드리우다‘는 말은 청사에 길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자손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지만 반대로 그 악명과 죄업을 기록하여 남긴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요 수치가 아닐 수 없지요.
임금의 언행을 남기는 것은 물론 후왕이 그것을 거울로 삼아 바른 정치를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서(書)는 정(政)에 장(長)하다고 하였지요.
서(書)에는 수많은 정치적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정통하게 되면 정치적 판단력과 역량이 뛰어나게 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경,춘추와 같은 기록문화는 후대의 임금들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집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록문화는 그 자체로서 어떠한 제도보다도 강력한 규제장치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공간(有限空間)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가는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의 변화를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이제 삼왕의 주고 받은 어록으로서의 서경이 탄생되는 까닭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들이 붉은 표지의 모택동 어록을 흔들며 행진하는 광경을 보고 매우 의아해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연히 마오 어록(毛澤東 語錄)으로부터 공산주의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유일지배체제나 독재체제의 상징처럼 부정적 인상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오 어록은 중국의 전통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중국의 전통에 이러한 기록의 문화가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있고 특징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기록이 보전되고 읽혀진다는 사실이 실은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에 서적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매장하는 문화적 탄압, 소위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게 되지만 그는 무엇보다 천하통일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자를 통일합니다.
이 문자의 통일은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고대문자와 고대기록의 해독을 가능하게 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위치우위(余秋雨)는 그의 ‘세계문명기행’에서 시이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과 ‘이집트사’를 포함한 장서 70만 권을 소각한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4백여년 후 로마 황제가 이교(異敎)를 금지하면서 유일하게 고대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이집트 제사장들을 추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에서 고대문자를 해독할 능력을 인멸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에 있어서 기록의 의미는 훨씬 더 커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하는 서경은 공자의 찬(撰)으로 58편인데 25편은 고문(古文) 33편은 금문(今文)입니다.
금문상서(今文尙書)는 진(秦)의 분서(焚書) 이후 한(漢)의 복생(伏生)이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 노공왕(魯共王)의 궁실을 넓히다가 공자의 구택(舊宅) 벽에서 얻었다고 전해지는 벽경(壁經)으로서 올챙이 모양의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고문은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하여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판명되었으며 금문상서 역시 주공(周公) 전후의 여러 편(篇)이 먼저 성립되어 가장 오랜 부분이고 그 다음에 은(殷)부분이 추가되고 그리고 하(夏), 다시 요(堯), 순(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가상학설(加上學說)’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최초에는 주(周)왕조의 창건자인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으나 유학자들이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전설적인 제왕들에 관한 단편적 기록들까지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경에서는 단 한 편만 읽기로 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가장 신뢰성이 있는 주공 편에서 골랐습니다.
無逸
周公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
相小人 厥父母 勤勞稼穡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 乃逸 乃諺 旣誕
否則 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
(周書 無逸.10)
稼穡(가색)-농삿 일. 依(의)-의지하다, 기대다.
諺(언)-함부로 지껄이다. 誕(탄)-방탕 무례함
侮(모)-업신여김. 厥(궐)-그. 其와 같음.
이 글은 주공(周公)이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한 말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형인 무왕(武王)이 죽고 어린 조카인 성왕을 도와 주나라 창건 초기의 어려움을 도맡아 다스리던 주공의 이야기입니다. 군주의 도리로서 무일(無逸)하라는 것이지요.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하여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의 고통(小人之依)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이 무일 편에서 개진되고 있는 ‘무일사상(無逸思想)’은 주(周)나라 역사경험의 총괄이라고 평가됩니다. 생산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무일사상은 주나라 시대의 고대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문화와 중국사상의 저변에 두터운 지층(地層)으로 자리잡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1957년과 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하방운동(下方運動)의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무일사상이라고 평가되었지요. 하방운동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당 간부, 정부 관료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 간부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운동이었지요.
간부들의 주관주의(主觀主義)와 관료주의(官僚主義)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운동이었지요.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지요.
무일 편은 주공의 사상이나 주나라 역사경험을 읽는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편을 통하여 가색의 어려움 즉 농사일이라는 노동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산노동과 유리된 젊은 층의 안일한 사고와 소모적 행태를 재조명하는 예제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나한테 건설회사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해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는 후배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무일‘이란 이름을 소개하였지요. 건설현장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싶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싫다고 하더군요. 건설회사가 ‘일이 없으면’(무일)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무일(無逸)‘이 물론 그런 뜻은 아니지만 어감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무일(無逸)이란 의미에 대하여 아무런 공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고 생각하지요.
특히 여러분과 같은 젊은 세대의 정서로서는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불편은 불행일 뿐이지요. 불편의 의미에 대하여 참으로 삭막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죄짓는 일이라는 달관과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공에 대하여 좀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공은 공자(孔子)가 며칠 간 꿈에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
상(商)을 멸망시킨 무왕(武王)의 동생이 바로 주공(周公)인 희단(姬旦)이지요. 주공(周公)은 주은래(周恩來)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왕조이건 창건의 역사는 파란 만장한 혁명사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주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주나라는 이를테면 신하의 나라가 쿠데타(逆取)에 의하여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세운 국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백이 숙제(伯夷 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의 부당함을 간(諫)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고사가 바로 이 때의 일입니다.
초기의 권력관계가 매우 복잡하였어요. 무왕이 동생 주공을 노(魯)나라에 봉하였지만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을 때여서 주공은 아들인 백금(伯禽)을 대신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남아서 계속 무왕을 보좌해야 하였습니다.
당시 72제후국 중 희(姬)씨가 55국으로 압도적으로 장악하였지만 여(呂)씨가 17국으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어요.
원래 주(周)나라는 서쪽에 있던 산간(山間)의 제후국(諸侯國)이었는데 남하(南下)하여 위수(渭水)평야로 이동하고 문왕(文王) 때에 태공망 여상(呂尙)을 얻어 강대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강족(姜族)과 주족(周族)의 연합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어요.
17개 제후국을 장악한 여(呂)씨가 바로 여상(呂尙)의 강족(姜族)이지요. 여상은 문왕과 연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여 결국 무왕 때에 이르러 상(商)을 무너트린 것이지요.
이 여상이 곧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문왕을 만나기까지 곧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두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이지요.
병법과 지략에 뛰어난 전략가로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저자이며 무왕(武王)의 장인이기도 하지요.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을 변방인 산동성으로 거세시킨 것도 모두 주공의 정치적 수완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왕이 상(商)을 정벌한 후 상(商)의 마지막 임금 주(紂)의 아들 무경녹부(武庚祿父)를 후(候)에 책봉하여 상(商)나라 유민(遺民)을 그에게 복속시켰어요. 상(商)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왕(武王)은 그의 두 동생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무경(武庚)에게 사부(師父)로 붙였는데 무왕(武王)이 죽자 무경(武庚)과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의 명을 받들어 동생인 관숙선을 죽이고 채숙도를 추방합니다. 그리고 상(商)나라 유민을 모아 주(紂)의 형인 미자(微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부근인 송(宋)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자(微子)는 송(宋)의 시조(始祖)가 됩니다. 송(宋)은 상(商)나라를 계승한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지요. 이 송(宋)나라와 인접한 나라가 공자(孔子)의 나라인 노(魯)나라이며 이 노(魯)가 바로 주공(周公)이 봉해진 제후국입니다.
주공은 조선시대의 세조와 같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군권(君權)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끝까지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았습니다.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현인을 정성을 다하여 공손하게 모신 예화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나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잠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 두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중국고대의 제왕계보는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우(禹, 夏)-탕(湯,殷, 商)-문(文)-무(武)-주공(周公)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듣던 말이 바로 이 ‘요순우탕문무주공’이었거든요. 그러나 황제 이하 요(堯), 순(舜)까지는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반면에 하우(夏禹)는 실제 인물이라고 주장됩니다. 서경 우공(禹貢)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하(夏)의 건설지로 알려진 하남성 옌스시엔(偃師縣) 얼리터우(二里頭)와 그 주변지역에 있는 궁궐터, 분묘 등의 유물과 유적은 당시에 이미 권력과 계급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염지(鹽地)유적은 그 곳이 경제적 중심지였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리고 갑골문자(甲骨文字.가장 오래된 것 19대 盤庚 이후) 또는 복사(卜辭. 龜甲,獸骨에 새겨진 문자)의 존재라든가 우(禹)의 아들 계(啓)가 왕위를 세습함으로써 비로소 세습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일반적으로는 은대(殷(商)代)부터 실재한 왕조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통설입니다.
BC. 1760년 경에 이 하(夏)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나라가 은(殷)입니다. 원래는 상(商)이었는데 주(周)가 상(商)을 정벌한 후에 수도의 이름을 따서 은(殷)나라로 낮추어 불렀지요
이 상(商)의 마지막 왕인 28대 주(紂)왕(帝辛)을 무(武)왕이 멸하고 주(周)를 세웠습니다. 이 때가 BC. 1100년 경이었습니다.
사마천(司馬天)은 사기(史記)에서 서(書)는 선왕(先王)의 사(事)를 기록한 것으로 정(政)에 장(長)하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춘추(春秋)에 대해서는 시비(是非)를 변(辨)한 것이므로 치인(治人)에 장(長)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였지요.
나는 이 무일(無逸)편을 여러분과 함께 읽으면서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어떠한 반성적 시각인가를 묻게 됩니다.
첫째 나는 이 무일 편이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메시지로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서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 저장탱크 속에 반드시 정어리의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정어리의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 편을 통하여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둘째 무일 편은 생산하는 사람은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은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思考)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가 소비행위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는지? 적어도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그 사람의 고뇌와 삶의 지속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셋째로 노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노인들을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IMF 이후 구조조정과정에서 퇴직연령이 낮아지면서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되고 당연히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자체의 조로화(早老化)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거대한 낭비이면서 역사의 폐기입니다. 소위 ‘도시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전망이 전제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유목문화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는 문화가 아니지요. 부단히 새로운 들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경험적인 노인문화보다는 청년문화(靑年文化)가 그야말로 전위문화(前衛文化)로 자리잡습니다.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과거의 압축과 재조명에 의하여 그 진로를 모색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마을에 나이 많은 노인이 한 사람 살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속도와 변화가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는 물론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사활적 자본축적논리의 비정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적 논리, 인간적 가치와는 한 점의 상관도 없는 것이지요. 인간적 가치와 인간적 논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경험의 폐기이며 역사 그 자체의 폐기이며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폐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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