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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의 중국고전강독은 성공회대학교에서 10여년째 계속되고 있는 명강의 중의 하나다. 프레시안이 오늘부터 연재하는 ‘신영복 고전강독’은 이 강의를 녹취하여 풀어쓴 것이다. 이 원고는 신교수의 감수를 거쳐서 게재된다.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복역했고 그 기간동안 쓴 서간문을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깊고도 아름다운 산문으로 우리 사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편집자


1. 나와 중국고전의 인연


  오늘은 나와 중국고전과의 관계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고전강독의 기본적인 방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여러분들 중에 의아해 하는 학생이 있을 것 같아서죠.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저는 현재 우리대학에서 사회과학개론, 정치경제학, 교육사회학을 강의하고 있지요. 그리고 제 전공이 경제학이구요. 그런데 왜 중국고전강독 강의를 하고 있는가가 궁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실제로 나한테 그걸 물어본 학생도 있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여러분이 이 강의를 수강한 이유가 도리어 궁금하지요. 컴퓨터정보학과 영어학과 일어학과 신문방송학과 등등 여기 출석부에 적힌 수강신청자 학과가 다양합니다. 다양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예 중국고전과 인연이 없습니다. 중어중국학과 학생들만 제외하구요. 중국고전 나아가서 동양학에 대한 여러분과 나의 관심을 이 시간에 조율해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중국고전에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려서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 사랑채에 불려간 것이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였어요. 그러나 그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였다고 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었지요.
  
  감옥에서 눈뜬 관심
  
  제가 그래도 본격적으로 동양학과 중국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런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제가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세대가 지향했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교육제도와 커리큘럼뿐만 아니라 교육적 정서 일반이 서구적 가치일변도였다는 반성이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었다고 기억합니다.
  
  우리의 대학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극도의 패배감과 좌절감속에서 그 유일한 탈출구를 소위 근대기획에서 찾고 있었다는 반성이었어요. 일제식민지 잔재에서부터 해방후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한국전쟁의 처참한 파괴와 상처 속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지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대안을 성급하게 찾고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소위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시간대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나로서는 어떤 바닥에서부터 생각하게 되었어요. 근본적 반성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은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지금은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나요. 소위 근본적 담론 자체가 봉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도 그러한 반성적 정서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지나고 보면 지금보다 도리어 덜 절망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촌 선생을 만나다
  
  감옥의 옥방 속에 앉아서 무기징역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앞에 놓고 먼저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통하여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다소 역설적인 것이긴 하지만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3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책에 비하여 중국고전은 1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주역(周易)’은 물론이고 ‘노자 도덕경’도 한 권이면 몇 달씩 읽을 수 있지요. 3권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교도소 규정이 별로 문제가 안될 수 있었어요. 나중에는 동양 고전 몇 권을 1권으로 제본해서 보내주도록 아버님께 부탁하여 받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중국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의 성향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중국고전 공부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옥방에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老村) 이구영( 李九榮) 선생님이십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작고하신 연민(淵民) 이가원( 李家源) 박사와 동학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시는 실로 한학의 대가입니다.
  
  노촌 선생님과 내가 감옥에서 한 방에서 무려 4년 이상을 지내게 됩니다. 같은 방에서 하루 24시간을 4년 이상 지냈다는 것은 내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노촌 선생님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가르지 않는다’는 일대기를 출간하시기도 하였지만 노촌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중국고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삶의 정직성 여부를 판별하는 것이라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봉건 사회, 일제하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290쪽의 사연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의 한가지를 예로 들자면, 해방 후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선생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키는 등 해방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그 번역을 옆에서 도우며 공부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번역한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중국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과 같이 강독하자는 교재의 대부분이 그때 표시해두었던 부분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여러분이 함께 공부하게 될 중국고전강독은 사실 감옥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노촌 선생님의 생각이 간접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인 아까 이야기한 ‘역사는 남북을 가르지 않는다’에 제가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발문을 썼지요. 그런데 그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무척 재미있다고 하는 부분을 소개하지요. 발문의 끝부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 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 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 뵙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2. 교재 문안의 선택에 관하여


  여러분과 한 학기동안 같이 읽을 교재가 학교 문구점에 있는 복사점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구입해야 됩니다. 교재가 없으면 강독할 수가 없습니다. 복사하여 제본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교 바깥의 복사점에서 주문제작했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요. 학생들이 복사점으로 원본 원고를 가지고 가서 맡겼는데 가격 흥정을 썩 잘해왔었어요. 그 까닭을 물었더니 가관이었지요. 그 복사점 이름이 ‘신영복’사점이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우기고 주인도 값을 깎아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가격이 지금도 학교 문구점의 제작가격에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교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중국고전의 극히 일부분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매우 기초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고전 문헌을 섭렵한다는 것은 평생을 걸려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5천년 동안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문자해독이 불가능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피라밋이 파라오의 무덤인가 아닌가를 판별할 수 있는 확실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중국문헌만이 고대로부터 해독이 가능한 유일한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특히 우리의 강의는 전공과정이 아니고 교양과정에서 비전공자들이 대상입니다. 강사인 나도 비전공자이구요. 그런 점에서 중국의 기본적인 고전을 대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등을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대의 신유학(新儒學)과 심론(心論), 선종불교(禪宗佛敎)의 개요를 읽을 수 있는 정도가 추가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 이후 시기는 그 당대의 시와 산문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공자가 아니고 나 역시 전공자가 아니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전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고전뿐만이 아니라 역사학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고전과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현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과제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재문안을 선택하는 기준을 나름대로 설정하였습니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감옥에서 표시해두었던 것을 기초로 만든 것입니다만 크게 2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변혁기 읽기
  
  첫째는 BC 7세기- BC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 즉 한 마디로 사회변혁기를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입니다. 주(周)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의 종법(宗法)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일대 변혁기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 시기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무한경쟁시대입니다.
  
  주(周)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覇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던 그리스시대와 같은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축의 시대(axial era)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초의 사회조직, 즉 국가를 건설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최대한의 담론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현대적 상황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변혁기와 거대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대적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본적 담론을 재조명하는 일은 후기 자본주의에 대하여, 특히 그것이 요구하는 세계체제와 일방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투기성과 비생산성에 대하여 비판적 전망을 체계적으로 조명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21세기라는 새로운 시점에서 새로운 문명의 문제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최대한의 사회건설담론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고전강독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기본적 주제로 할 것입니다.
  
  새 패러다임 모색
  
  둘째는 고전강독의 전 과정에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모색을 화두처럼 걸어 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이 화두는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서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그 모델을 현재와 현실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소위 건축적 의지가 바야흐로 해제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상황입니다. 관념적인 모델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교조적이거나 관념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주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발표한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From Substance-centered Paradigm to Relation-centered One)’에서 문제제기를 해두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서론 부분에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서구 특히 서구 근대사가 그 패러다임에 있어서 ‘존재론적‘임에 비하여 동양적 패러다임은 그 기본에 있어서 ‘관계론적‘입니다.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개별적 실체를 기본단위로 인식하고 개별적 실체들이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 가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회든 국가든 개별적 실체들은 각각 독립적 의미와 행동원리를 가집니다. 다만 그것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구조와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회론(社會論)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패러다임은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앞으로 여러 주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 학기 동안에 여러분과 강독하게 될 고전구절들은 대체로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재조명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강독의 참뜻
  
  고전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한 과제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학에 관한 최근의 저서에서 읽은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1차대전 때였다고 기억됩니다만 알프스산맥에 주둔한 일개 소대가 있었습니다. 젊은 소대장이 일개분대를 정찰임무를 주어 내보냈어요. 그런데 정찰분대가 떠나자 이내 폭설이 쏟아졌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연일 계속해서 내리 퍼부었다고 합니다.
  
  제가 읽은 책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젊은 소대장은 그 일개분대가 틀림없이 폭설과 폭풍에 전원 조난당했다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주일인가 지난 후에 당당하게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정찰분대가 무사 귀대하였습니다. 반가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그 험한 풍설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어요.
  
  대답은 산맥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어느 계곡으로 행군할 것인지 어느 지점에서 설동(雪洞)을 파고 피신할 것인지 등을 모두 지도를 보고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그 풍설을 극복하고 행군할 수 있었고 무사히 귀대할 수 있었다는 의기양양한 답변이었어요, 그래서 소대장이 그 지도를 받아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도는 알프스산맥의 지도가 아니라 피레네산맥 지도였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펼쳐들고 있는 고전강독 교재가 이를테면 알프스산맥 지도가 아니라 피레네산맥 지도인 셈이지요. 그러나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알프스산맥과 피레네산맥은 그 구조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학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과학과 이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 중국고전과 한문공부


  앞으로 고전 원문을 함께 읽고 해석하는 일에서부터 강의가 시작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대체로 한자공부나 한문공부가 없는 세대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나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나 역시 한문은 전공과도 멀고 소양도 부족합니다.
  
  고전강독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전으로부터 사회와 인간에 관한 담론을 재조명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조명을 통하여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하여 다시 한번 근본적 사고를 간추려보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모색하는 일입니다.
  
  한자나 한문공부는 부차적입니다. 물론 욕심입니다만 교재에 있는 고전문장을 여러분들이 다 암기하면 좋지요. 암기는 못하더라도 혼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강의시간으로는 그것을 확인하거나 습득하게 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문공부에 왕도는 없습니다. 다른 어학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름길이나 편법은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의 서당에서 수학하던 방법은 참으로 우직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무조건 암기하는 것이지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무조건 암기하는 그런 우직한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서당 방식 놀랍다
  
  서당에서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록자대야(麋鹿者大也)라는 이야기입니다. 미록자대야란 ‘미(麋)는 사슴중의(鹿者) 큰놈이다(大也)’라는 뜻이지요. ‘麋’은 ‘큰사슴 미‘자거든요. 당연히 麋, 鹿者, 大也라 띄어 읽어야 맞지요.
  
  그런데 아침에 책방도령의 글 읽는 소리를 듣자니 麋鹿, 者大也로 읽더라는 것이지요.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책방도령의 읽는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麋, 鹿者, 大也로 바르게 끊어서 읽더라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직한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매우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영어공부를 대체로 10년정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논문을 쓰거나 영시를 짓고 감상할 정도가 되기는 어렵지 않나요?
  
  그러나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4, 5년이면 뛰어난 문장력과 작시(作詩)수준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과학적 방식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원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왕 내친 김에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학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의 탄식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교과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거나 심지어는 I am a dog. I bark.로 시작되는 교과서도 있었지요.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누님들의 영어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의 차이는 큽니다. 아무리 언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 교과서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한자나 한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학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담론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그 담론을 열심히 천착하는 동안에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항간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는지 아세요. 소머리를 삶으면 귀는 절로 익는다고 하지요.
  
  물론 한문공부를 열심히 해서 스스로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그러나 일단은 고전에 담겨 있는 사상을 중심으로 그 뜻을 이해하고 구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암기하는 식으로 순서를 잡는 것이 좋습니다.
  
4. 서구근대문명과 동양학


  이번 시간에는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에 대하여 몇 가지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명사적 비교에 관한 저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논하는 방식의 접근방법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밝히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가 지적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소위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우는 그것이 갖고 있는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표면에 국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존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것끼리 더 쉽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差異)보다는 관계(關係)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바로 그러한 관계망(關係網)을 주목하는 것이 바로 관계론적 패러다임입니다. 우리가 고전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서양문명은 동양문명에 대한 비교개념으로 만들어진 조어(造語)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류문명입니다. 현대세계를 주도하는 문화는 서양문화입니다.
  
  서양문화는 그 자체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문화적 준거(準據)입니다. 따라서 동양문화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변적 위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서양적 시각에서 동양문화가 조명되는 구도이지요.
  
  종교와 과학의 모순
  
  근대사는 서구문명이 전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양문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세계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문제점은 곧바로 현대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된다고 믿습니다. 현대자본주의 나아가서는 현대의 세계질서를 서양문명의 근본적 구조 즉 문명적 패러다임의 문제로 이해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還元主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전을 읽는 동기가 바로 현대적 과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혁시기의 근본담론이 이 강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양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명제(合)라는 것입니다. 흅(D. Hume)과 칸트(I. Kant)의 견해입니다. 서양근대문명은 유럽고대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2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과학은 진리(眞理)를 추구하고 기독교신앙은 선(善)을 추구한다. 과학정신은 외부세계를 탐구하고 사회발전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과 관계를 조정함으로써 그 기능이 잘 조화된 선진적 문화이었으며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이 서양문명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서양문명을 이루고 있는 이 2개의 축(軸)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 결정적 문제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반종교적이며 기독교신앙은 반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모순에 관한 역사적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 기독교 교리를 벗어난 과학자들이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지요. 여러분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천문학을 뒤엎으려하는 바보라고 비난하고 성경에 여호와가 태양을 멈추라고 명령했지 지구를 멈추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어 지동설을 비판하였지요. 칼빈도 마찬기지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난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을 위협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기의 이론을 감히 발표하지 못했으며 사후에 출판되었을 뿐입니다. 브루노는 지동설을 선전하다 불타죽었고 갈릴레이는 2차례 종교재판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말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 외에도 과학과 종교의 모순과 박해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종교의 과학에 대한 억압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문명 구도의 와해
  
  거듭되는 과학의 경이적 발전의 결과 오늘날에는 종교에 대한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眞理)와 선(善)이라는 2개의 축이 무너지고 그 조화와 균형의 구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서양문명의 기본적 구도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이 도덕과 인생가치의 기초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면서 사회의 모든 질서를 획일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점을 일찍이 지적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황혼,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였지요.
  
  오늘날에는 더욱 현실적인 문제들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하지요. 현대서양사회의 범죄율, 생명경시는 종교와 신앙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對立面)을 상실하고 무한질주를 거듭하였다는 주장입니다.
  
  핵, 세균, 화학무기, 기타 고분자화합물질의 대량생산과 배출로 인하여 생태계는 파괴되고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존조건마저 파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를 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기되는 성찰이 바로 서양문명의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문명의 구조 자체의 불완전성 즉 과학과 종교의 이원적 구성과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처방으로 제기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여 과학이성에 대한 종교의 지도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종교의 지도성 회복은 불가능하며 현대서양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는 예언까지 등장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패권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경영은 또 다른 형태의 몰락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지요.
  
  인문주의로 바라보자
  
  이러한 반성과 성찰의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동양학적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서양근대문명의 모순이 바로 과학과 용납될 수 없는 종교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성과 함께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이러한 모순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은 없으며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현실론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 살펴 보겠지만 자연과 인간과 나아가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문명론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양학의 기본구도가 인문주의인 것은 사실이며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는 구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동양학에 대한 관심은 종래의 운동관성이 그대로 연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대륙에 이어서 다시 떠오르는 광범한 중국시장과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일본자본에 대한 국제금융자본의 관심이 오히려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자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어쨌든 구미 중심의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의 실체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계화라는 형식을 띤 패권주의적 팽창정책 역시 바로 근대 서양문명의 기본적 모순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자본주의 역시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 군사과학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동구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소연방의 해체와 러시아의 몰락 그리고 중국의 자본주의화 과정 등 이를테면 대립면을 상실한 과학의 질주에 다름 아니지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논리는 한마디로 자본축적운동의 파상적 확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 왔고 또 당분간 주도해 갈 세계질서 역시 서구 근대문명이 당면한 문제와 동일한 모순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학에 대한 관심의 출발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심 역시 이러한 과제와 관련되는 범위에 국한하여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5. 동양사상의 특징

       (1)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자본축적운동의 파상적 확장이 마치 대립면을 상실한 근대 서양문명과 그 구조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자본축적은 이제 실물생산으로부터 유리되고 실물생산은 수요로부터 유리되고 있습니다. 자본은 생산과 무관하고 생산은 소비와 무관한 운동을 합니다.
  
  자본운동의 원리는 가치증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그 가치증식이 반드시 실물생산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증권시장이라는 투기장에서 그것이 실현되더라도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실물생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리지 않더라고 팔린 것으로 간주하고 다음 생산과정에 들어갑니다. 팔리지 않았더라도 팔린 것으로 간주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신용입니다. 어음을 할인해주기도 하고 대출해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축적운동이 대립면을 상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립면을 상실한 근대 서양문명의 모순구조와 같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모순구조를 조명해주는 것이 동양사상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동양사상의 현대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서구인들의 동양관을 원천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대하여 이야기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즉 청교도윤리로서의 금욕주의가 자본축적을 이루었으며 그것이 근대사회를 만들어낸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프로테스탄티즘이 곧 자본주의정신이라는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베버에게 있어서는 자본주의는 최고 최선의 사회제도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입니다. 막스 베버에게 있어서의 동양적 윤리란 이 프로테스탄티즘 즉 청교도윤리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도구이며 장치적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원형이지요.
  
  여러 가지 이론적 분식을 하고 있습니다만 프로테스탄티즘을 요약하면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재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욕주의가 자본축적을 가져왔고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서양문명의 모순구조와 관련하려 베버를 이해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근검 절약 그리고 자본축적이라는 이러한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며, 초월적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본축적은 그것 자체로서 절대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근검 절약의 정신이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합리적 제어장치로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며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매우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버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의 개념은 지극히 순결한 것이며 이에 반하여 동양사상에 대하여는 바로 이 초월적 순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욕망에 대한 합리적 제어장치가 없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이지요. 유교적 윤리는 이러한 초월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내면적으로 초극의 독백이 없고 현세성 또는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현세적 향유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와 도덕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인 체면(face)의 문화라는 것이 베버의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결론적으로 동양사상은 비종교적 현실주의이기 때문에 역사적 지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성립과 프로테스탄티즘간에 정신사적 필연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또 자본주의를 기준으로 기독교와 유교사상을 비교하는 방식 자체가 갖는 비대칭적 구조를 논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더구나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와 절약 저축 재투자 그리고 거대한 자본축적이 신의 소명이며 신의 영광을 구현시키는 것이라는 베버의 체계가 현대자본주의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관하여 논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베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 논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자본논리를 합리화하는 작업에 충실하였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 즉 자본이 사회로부터 독립하고 신의 소명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아가 인간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키는 거대한 모순구조에 대하여 베버는 최소한의 전망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면죄부를 주기 위한 논리에 충실하였을 뿐이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와 동양사상에 대하여 저급한 이해의 층위를 드러내었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현실성으로부터 현세적 향락과 체면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것이 하나의 종교적 지배력(The Religion of China)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2)道는 가까이 있다


  동양사상은 그 기본적 체계에 있어서 사후(死後)의 시공(時空)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입니다.
  
  베버가 동양적 형식주의와 체면에 대하여 지적한 것은 물론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에 담겨있는, 즉 그것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동양사상의 관계론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하였음이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양적 사고는 현세를 하나의 초월적 신의 소명(Beruf, Calling, Vocation)과 개인의 직업과 직선적으로 관계 맺는 형식의 단선적 기계적 사유체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과 삶은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자연과의 관계성 그리고 인간관계라는 연기(緣起)의 장(場)에서 순간(瞬間)과 점(點)과 가능성(可能性)과 확률(確率)로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베버의 비판은 동양사상이 비종교적 인문주의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적 지(智)와 동양의 도(道)가 보여주는 차이에서 그것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philosophy)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과 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道)란 실천하며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이와는 판이한 것입니다.
  
  로댕의 조각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서 터득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의 문제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종교적 존재임에 반하여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에 있습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이고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 현실주의적이며 당연히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1601년 마테오리치가 가져온 과학이 중국 사대부 계층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을 적대시하던 서양의 기독교 사회와는 판이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적 패러다임은 종교라는 대립면을 따로 상정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조화와 균형의 체계를 스스로 완성하고 있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3)자연은 生氣의 場


  그러나 동양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을 ‘생기(生氣)의 장(場)‘으로 인식하는 통체적 사상 특히 자연과의 조화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생기(生氣)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농본적(農本的) 성격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동양사상의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양사상의 바로 이러한 특징이 후기산업사회의 모순구조를 드러내는 것과 아울러 대립면을 상실한 현대자본주의의 패권적 속성을 명쾌하게 조명해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사상에 있어서 자연은 하나의 장(場)입니다.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란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력장(磁力場), 중력장(重力場), 전자장(電磁場)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힘의 질서입니다. 그것을 ‘생기(生氣)의 장(場)‘이라 합니다.
  
  그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조화되고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 인하여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the complex of partial totalities)’이며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입니다.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 다시 말하자면 관계망(關係網)과 연기(緣起)의 장(場)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것 중의 최고(最高), 최량(最良)의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은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우주(宇宙)의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우(宇)는 상하사방 즉 공간의 개념으로서 유한공간(有限空間)--->체(體)--->지(知)--->상도(常道)의 체계를 구성하고, 주(宙)는 고금왕래(古今往來) 즉 시간의 개념으로서 무궁시간(無窮時間)--->용(用)--->도(道)--->무상(無常)의 체계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유한과 무한의 통일 즉 공간과 시간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체를 이루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이 통일되는 태극(太極)의 상태 태극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설명이 다소 추상적입니다만 예를 들어 진흙(空)은 그릇(色)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主我)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흙-그릇-진흙의 과정 즉 생성이 계속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질서는 변화하는 것입니다. 생주이멸(生住移滅),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한 것으로 됩니다.
  
  이러한 통체적(holistic) 체계와 질서에 있어서 어떤 한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한다거나 확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주의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자연주의 속에 해소됩니다.
  
  인간주의에 대하여도 특별한 지위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어느 특정분야의 불균형적 자기확대는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화와 절제가 당연한 가치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가치는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나고 절용휼물(節用恤物), 수분지족(守分知足), 나아가서 안빈(安貧)함으로써 낙도(樂道)하는 삶의 철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항상 천(天), 지(地), 인(人) 즉 삼재지도(三才之道)의 관점에서 규정됩니다.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다.’ (맹자) 자연과 우주의 생성체계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지요.
  
  동양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규정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초월적 가치로부터 인간을 상대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을 처음부터 부분이면서 전체인 생기의 장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사상의 인간주의는 서구적 휴머니즘과 다른 차원의 의미내용을 갖는 것입니다.


       (4)동양적 인간주의


  흔히 인간주의를 동양사상의 특징으로 거론하는 경우 우리는 자칫 인정주의 수준의 내용으로 파악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서양의 고대노예제에 비하여 동양적 노예제가 훨씬 인간적이라는 평가가 그렇습니다.
  
  인정주의도 인간주의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양사상의 인간주의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입니다.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인간의 외부에 어떤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것의 종속적 개념으로서 선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善)한 인간, 어진(仁) 인간처럼 그 자체로서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인성은 그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로서 파악된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이 개인적으로 이룩하고 있는 품성의 의미를 넘어선 관계론적 관점에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동양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仁)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인이 무엇인가는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논어에서 그것을 묻는 제자에 따라서 공자는 각각 다른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만 인은 기본적으로 人 + 人 즉 二人의 의미입니다.
  
  즉 관계론의 관점에서 본 인간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人間) 즉 인(人)의 사이(間)로 이해하는 다석 유영모의 ‘사이의 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여하튼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 가는 어떤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과 장의 개념으로 그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관계론적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동양적 사상에서 인간주의는 이처럼 철저하게 이러한 관계론적 개념입니다.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은 곧바로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성의 고양이며 관계론의 사회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사상은 초월적 가치를 바깥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종교적이며 인간주의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의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적 의미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그것의 내용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개인주의적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조화와 중용


  서양문명이 과학과 종교를 2개의 축으로 하는 구조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서양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대립모순의 구조를 내장(內藏)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가 내재되어 있음으로서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모든 사상과 문명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적 패러다임이 인문주의적이고 따라서 과학과 종교간의 모순이 없다고 했지만 이것은 그 자체를 실체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내부의 대립모순구조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동양적 패러다임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적대적이지 않은 형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중용사상(中庸思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의 2개의 축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의 인간이며 문화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소위 감천역물(勘天役物)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에 견제하고 사후에 위로하는 체계가 동양적 패러다임 내에 존재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라 할 수 있습니다.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의 질서, 최선의 질서로 상정한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하였습니다. 자연이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이 생명과 지구의 역사가 임상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가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을 선언합니다. 사람은 땅을 배우고 땅은 하늘을 배우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는 것이지요.(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慾)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완전지향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위선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로서의 반대측면에 서로를 견제하면서 전체적으로 중용의 조화와 균형으로 이끌도록 하는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 다른 사상을 대립면으로 삼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사상으로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의 관계론적 구조입니다.

 

6. 동양철학의 현대적 의미

  중국 고전강독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학기의 짧은 시간으로는 가늠도 못하고 끝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처음처럼 각오가 지나쳐서 우리는 지금 너무 엄청난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친 김에 하나만 더 합의하고 시작하지요.
  
  21세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래담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20세기의 연장을 바라는 이데올로기적 내용입니다.
  
  미래에 대한 객관적 전망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망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각각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소망이 전망의 형식을 띠고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를 그 기본적 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어내는 담론이 아닌 한 그것은 새로운 담론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먼저 21세기의 과제를 가장 앞서 도전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중국적 모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Aufheben)이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통일과정을 새로운 패러다임과의 관련 속에서 인식하고 관리해나가는 문제에 대하여도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민족문제를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와 함께 사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남과 북이라는 냉전질서의 청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문제이기도 하면서 나아가 그것은 동(同)과 화(和)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동과 화의 논리는 앞으로 고전강독에서 지속적으로 그 의미를 심화시켜가도록 하겠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동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돌이켜보면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며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의 논리를 화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패러다임 쉬프트의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통일과정을 어떠한 논리로 관리하고 이끌어 가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화동논의는 과거와 미래로 열려 있는 귀중한 키워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성격규정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통일과정이라는 민족문제를 세계사적 문제와 연결시키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고전강독을 진행하면서 적절한 곳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으며 대개는 길을 틀린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도 합니다.
  
  근본적 논의가 갖는 의미가 오늘의 상황에서 더욱 더 결정적 의미를 가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 hgmja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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