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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미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지나가던 개가 아무렇게나 싸놓은 똥처럼

거기엔 무단 투기 금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당당했지

버려진 적 없으니까

어느 날 거기 옆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누가 널 낳았니

이름이 없어 좋겠다

털이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정체가 발각되는 것이니까

집을 나오는 길

두 발이 섞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얼굴과

머리카락이 엉키고

몸의 구분이 모호해질수록

흩어져 있던 영혼의 조각들이 뭉쳐질수록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로 완성되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내 정체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분류하지 않는 곳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간다

, 이제 신앙에 대해 말할 수 있지

바깥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

반쯤 잠기는 몸

최초의 기분은 여기에 있지

출렁인다

다리 하나가 기어나간다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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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손에 쥔 알깨지든 태어나든 마주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시간들을 놓칩니다. 어쩌면, 놓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던 순간에도 주저앉아 울거나 소리라도 시원하게 질러 볼 타이밍을 보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꼭 남아 있습니다. 금방 터질 것 같은데, 아직 터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끌어안은 채 나는 시를 만납니다.

 

그녀들의 언어와 인격은 겹쳐지며 반짝입니다. 너무나 눈부신 나의 김행숙 선생님과 이원 선생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문드러진 나의 스무 살, 뼈를 심어 주셨던 우성환 목사님. 늘 그립다는 말을 이제 전합니다. 나의 가족. 박종주, 홍미숙, 박대인. 가장 뜨거운 세 개의 이름. 그리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발음해 주는 사람들. 나는 당신들이라는 숲에서 크게 숨을 쉽니다.

 

시나락 아이들. 우리 오랫동안 함께 걷자.

 

미숙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신 황현산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조심스럽게 알 하나를 손에 쥡니다. 깨지든, 태어나든. 어떤 것이라도 마주하겠습니다.

 

 

 

 

내가 나일 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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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세계를 향한 끝없는 질문과 대화의 자세 돋보여

 

본심에 올라온 10명의 작품은 예심위원들의 젊은 안목 덕분에 정형화된 신춘문예 스타일과는 다른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의 심사는 한 편의 잘 빚어진 항아리를 선택하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개성적 독법과 화법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수사적인 표현에만 의존한 시, 지나치게 관념적인 시, 낯익은 발상에 머물러 있는 시 등이 우선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은 박세미, 김잔디, 이현우의 작품이었다.

 

김잔디의 시는 이미지를 조형해 내는 솜씨가 섬세하고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호감이 갔다. “풍경을 의심하는 초식동물의 눈은 까맣다라든가 우유곽 바닥을 훑는 빨대 소리에 놀라 수목은 뿌리를 내리고등 매력적인 구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과 이미지들이 파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뚜렷한 구심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현우의 시는 상상력이 활달하고 다양한 소재를 유니크하게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은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실러캔스, 달의 착란, 손금의 태계, 프로토아비스. 그는 무엇이든 시로 만들 수 있지만 어떤 시에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걸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소재주의적 경향이 그의 유창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망설이게 했다.

 

박세미의 시는 간결한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증폭시켜 내는 특유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비극적 인식을 경쾌한 어조로 노래하는 그는 시적 대상의 슬픔과 고통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끌어안는다. 당선작인 에서도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상투적 연민이 아니라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새로운 난생설화를 탄생시킨다. 화자의 교체나 장면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행과 연을 조율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세계를 향해, 바깥을 향해, 끝없이 질문하고 대화한다. 그 질문과 대화의 자세로 오랫동안 좋은 시를 쓸 것이라 믿고, 또한 지켜볼 것이다.

 

심사위원 나희덕 시인, 황현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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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의 시간 / 김준현

 

 

우물 위로 귀 몇 개가 떠다닌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느린 허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빈 얼굴을 바라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닫아놓은 창이다

녹슨 현악기의 뼈를 꺾어 왔다 우물이 입을 벌리고

벽에는 수염이 거뭇하다 사춘기라면

젖은 눈으로

기타의 냄새 나는 구멍을 더듬는, 장마철이다

손가락 몇 개로 높아지는 빗소리를 누른다 저 먼 곳에서

핏줄이 서는 그의 목젖, 거친

수염을 민다

드러나는 싹이여, 자라지 마라

벌레들이 털 많은 다리로 밤에서

새벽까지 더듬어 오른다

나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

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

귀들이 다 가라앉은 물에도

소름이 돋는 중이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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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더 정갈한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어릴 때, 저녁이면 부모님은 저와 동생에게 과일을 깎아 주셨습니다. 지켜보며, 사과껍질을 끊기지 않게 깎는 법을 배우고 싶었죠. 그러나 손놀림이 서툴렀던 저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하면, 한 번도 긴 곡선의 껍질을 남긴 적이 없었던, 제 사과.

서툴렀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병아리를 길렀던 적이 있었죠. 어쩌다 다리를 다친, 이름도 잊어버린 그 병아리 역시 제 서투른 사육의 증거였습니다. 베란다의 사과박스 속 홀로, 한 쪽 다리로 서 있던 병아리를 보며 저는 ‘쓸쓸’이라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의무처럼, 저는 병아리의 배설물이 묻은 신문지를 갈아주었습니다. 오래된 신문지와 새 신문지의 날짜 사이 점점 간격이 벌어지던 어느 날, 병아리는 눈을 감고 있더군요.

방에서 홀로 쓰다가 그렇게 지칠 때면 저는 밝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갑니다. 늘 믿고 기다려주신 아버지, 어머니, 동생에게- 늘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문학을,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몸소 보여주시고, 늘 제 서투른 감각들을 짚어주시는 김문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 이상의 인사는 좋은 작품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영남대 국문과의 교수님들, 제가 지나온 모든 선생님들과 친구들, 특히 승협, 명재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정끝별, 손택수 두 심사위원께는 더 정갈한 소리로 보답을 드리겠습니다. 오래 가라앉고자 합니다.

 

 

 

흰 글씨로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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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따로 없는 詩 쓰는 법’ 모험에 박수를

 

추사에 따르면, 묵죽을 그리는 데는 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법이 따로 없는 것도 아니다. ‘따로 있는 법’을 성실히 참조하면서도 과감히 떨쳐버리고 어떻게 ‘따로 없는 법’을 찾아나설 것인가.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는 모험을 향해 떠난 외롭고 고단한 열정들과의 뜨거운 만남의 자리였다.

꼼꼼하고 균형 잡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20여명의 작품 중 최종심에 오른 것은 ‘새라는 가능성’, ‘고동의 길’, ‘만찬’, ‘이끼의 시간’ 등 모두 네 편이었다. 예리하게 벼린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새라는 가능성’은 높은 시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기시감이 있었다. 새, 새장, 온도, 울음, 바람 등 선택된 오브제들과 그 엮음의 방식이 표절 시비로 이미 당선 취소된 바 있는 작품들과 유사해 또 다른 표절 시비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하에 가장 먼저 제외되었다. ‘만찬’은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 칼이 허공의 날개처럼 살 사이를 휘젓는다”와 같은 감각적인 언술에 호소력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과잉된 수사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고동의 길’과 ‘이끼의 시간’이었다. ‘고동의 길’은 수많은 시 창작론의 정석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균형 잡힌 구조와 투박한 시어들을 장악해 들어가는 사유의 힘이 돌올했다.

반면에 미성년의 실존적 내면을 다룬 ‘이끼의 시간’은 우물, 검은 비밀봉지, 현악기(기타) 등으로 변주를 거듭하는 은유와 신경증적인 감각들로 이미지와 이미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연결고리가 불안으로 술렁였다. 동봉한 작품들 또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불안은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는 혼돈 속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가능성의 감각과 열기로 꽉 차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완숙한 포도주의 맛과 아직 미숙하긴 하되 미래를 잠재한 떫은 포도주의 맛 사이에서 장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따로 없는 법’을 찾아나선 자의 모험에 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에 매운 채찍과 응원을 함께 보낸다.

 

심사위원 정끝별,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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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 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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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난 詩 소비자, 더 읽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는 걷습니다. 산호 미용실을 지나 파리바게뜨를 지나 물왕리 저수지를 지나 아스널 FC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지나 메텔의 슬픈 눈이 떠도는 은하철도999를 지나플라이 투 더 문을 지나…. 저무는 것들이 저무는 사이로 걷습니다.

 

저무는 것들 사이에서 여러 번 저물며 걷습니다. 어느 저물녘엔 전화를 받습니다. 그 밤에 첫눈이 푹푹 내립니다. 조금씩 눈 속에 묻혀 가는 집과 산과 논과 창문을 봅니다. 집이, 산이, 논이, 창문이 하나씩 저물고 있다는 느낌. 어머니의 둥근 무릎처럼 그 속에서 불빛들이 견디고 있다는 느낌. 그 밤에 그는 저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짓던 시를 마저 짓습니다…. 견딥니다….

 

배고플 때 밥 사주던 금호초등학교 동창들이 생각납니다. 부족한 글 뽑아 주신 서울신문과 심사위원님들을 생각합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페이지처럼 많은 밤들이 지나갑니다. 시를 읽으며 흐려지던 밤, 은혁이와 민혁이를 낳던 밤, 첫사랑이 있는 골목을 지나며 버스 안에서 아프던 밤, 창조주의 밤이 스르르 지나갑니다. 모든, 혼자였던 밤들. 그리고 나. 나는 아직도 소비하는 사람. 더 많이 소비하고 싶은 사람. 시를, 더 많이 읽겠습니다.

 

 

 

 

부드러움과 해변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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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뤄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사건이 있고,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사건이 있고, 시에서는 말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말의 풍경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대로 지평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서 받은 스물세 분의 시는 오랜만에 우리 시의 지형 깊은 계곡으로 우리를 놀게 하고,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며 드넓은 바다에서 서 있게도 하는 행복한 경험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타고 세 분의 시를 골랐다. 일일이 짧은 감상을 달고 토론을 거쳐 힘들게 또는 아쉽게 손에서 터는 작업을 거쳐 남은 세 편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시 부러 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딴 얘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토론에 들어가 최호빈의 ‘고민의 탄생’, 김미영의 ‘상자’, 여성민의 ‘저무는 집’을 골랐다.

 

최호빈의 시는 시상을 치밀히 전개해 나가며 이미지를 구상화시키는 솜씨가 일단 돋보였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서 다년간 습작을 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미영의 시는 우리 삶의 비루한 것들을 보듬어 소중한 꽃을 피워 내는, 애정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따뜻함이 편편에서 맡아졌다.

 

아무리 시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시라 할지라도 자기의 바깥을 보는 이런 시선은 이 즈음에는 꽤나 귀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향기는 더 짙었다.

 

그러나 최호빈의 시는 숲이 울창한 만큼 베어 낼 나무들이 꽤 있었다는 점에서, 김미영의 시는 아직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여성민의 시는 반복되는 말과 말로 공간을 이루고거기에 막연과 아연의 풍경들을 자리하게 해, 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었다. 좋았다. 축하한다.

 

- 심사위원 함성호(시인), 송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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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취소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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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은 2011 신춘문예 시 부문 강정애(59)씨의 ‘새장’ 당선을 취소합니다. 2009년 제8회 지용백일장 고등학생 부문 차상(次上) 수상작인 이슬(19)씨의 ‘우산’과 상당 부분 흡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강씨는 “2008년 가을쯤 ‘새장’을 썼으며 당시 함께 시 수업을 받던 이씨에게 이 습작시를 보여주고 합평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씨는 “강씨와 함께 시 수업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사람에게 시를 가르쳤던 박해람 시인은 “강씨와 이씨가 여러 차례 함께 시 공부를 했으며 강씨가 ‘새장’을 먼저 쓴 것이 맞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이씨는 “내가 쓴 ‘우산’ 초고를 박 시인이 손질해 줬고, 이 중 일부 표현을 박 시인이 강씨에게 줬다.”고 재반박했고, 박 시인은 이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서울신문과 시 부문 심사를 맡은 4명의 위원들은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상 강씨가 표절했다는 혐의는 없는 것으로 자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주장이 엇갈리는 데다 비슷한 작품이 이미 이씨의 이름으로 발표된 만큼 미발표작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신문 신춘문예 규정에 어긋난다는 판단 아래 당선 취소를 결정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 드리며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춘문예 응모작을 더욱 면밀히 검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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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 외 5편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 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봄날은 간다

 

 

마당 시멘트 바닥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

한 잎 한 잎 떨어진 꽃잎 같다

지난 봄 떨어진 꽃잎인데,

올해까지 시들지도 않았다

 

문을 열면 황급히 돌아 나가는

허공 발걸음 소리가 있고

세로로 세운 눈빛

발자국 속에 어둠으로 말라 있던 한파도 다 지나갔다

나뭇가지만 서성거렸던 보폭들이 화르르 뛰어내린다.

지나가는 꽃송이들,

잘못 들어선 듯 머뭇거린 흔적이

군데군데 헌 신발처럼 남아 있다

 

시멘트 바닥에 또각또각 꽃피워 놓고

그 가벼운 꽃송이마다 햇살을 발라내는 적요의 나절

 

담을 넘는 초록들과 훌쩍 단숨에 돋음한 고양이의 척추와 털 고르기를 하고 있는 햇볕

하루에도 몇 명의 아이들이 다녀가는

치매가 지키는 집

물기가 가득 차 빈 방이 없는 꽃나무들마다

몸을 헐어 음각이 되는 발자국들.

 

낭떠러지 위 벗어놓았던 신발은 아이가 다시 신고 내려오고

구겨지던 울음이 낮잠에 들어 있다

구름이 박힌 하늘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오후가 되면 저 구름도

막대사탕처럼 다 녹을 것 같다.

 

 

 

 

 

 

불안한 걸음은 끝내 불안한 걸음으로 눕는다.

 

방에 불을 빼는 예의로 시작된 아침

수체垂體가 멈춘 방에 몇몇이 둘러앉았다

누구도 살아서는 등을 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울 곳, 마지막 걸음이 닿은 부위에서 한 생애의 길이가 줄자 안으로 드르륵 말려 들어간다.

생전의 의복을 벗겨낸 몸에는

창문으로 들어온 얇은 햇볕 한 벌이 먼저 입혀져 있다.

 

풀리지 않은 문고리, 한 입구가 열려 있는 문 밖으로

나뭇가지들의 눈금이 다 떨어져 있고

새가 날아간 어느 낭창거리는 지점의 꽃송이들마다

검은 씨앗들이 비좁다

 

몇몇의 울음 배웅을 받고 있는 저이

골목이 어지러웠던 몸 속엔 막다른 길 끝이

어느 곳의 초봄, 허공의 길이를 재며 눈금이 생겨나고 있겠다.

달이 달을 품은 윤달에 수의壽衣를 맞추자 하신 저이

눈금의 수치를 기록하던 달의 목젖

차곡차곡 개어져 있던 자杍가 입혀진 몸

굽었던 길이를 펴자 몇 개의 눈금들이

우두둑, 떨어져 나온다.

 

창밖 빈 가지들마다 잘 여문 바람의 코끝이 매달려 있다

호상好喪이다.

 

 

 

 

바람의 계단

 

 

타래난초꽃이 타래 줄기를 따라 피어 있습니다.

비상계단을 오르는 모습입니다

바람에 자신의 몸을 묶고

흔들리는 꽃들이

허공을 움켜잡고 있습니다.

식물의 저녁에 촘촘히 지층을 만들고 있는 바람

붉은 등에 기대어

비틀어짐의 묘술을 연출하며 아슬아슬합니다

 

실타래처럼 꼬인 여름 두 줄기가

공중의 고요를 비틀고 있습니다.

 

스스로 몸을 헐어

족적足跡을 신고 가는 축의 바깥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핏대를 올린 목이 붉습니다.

 

벌어진 작은 입술에 고인 진득진득한 음역陰易

곡선과 곡선이 맞닿아 서로 엉킨 그늘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어지러움이 현기증을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꽃송이가 나선형 계단에 쉬고 있습니다.

어쩌면 삐둟어진 바람 두 줄기가

풀어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햇볕을 달구던 긴 여름, 색소 빠진 매듭이 풀리고

바람의 계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후루티 세탁소

 

 

숲의 경사면에서 바람이 팽팽해진다.

붉은색 단추 같은 꽃들이 떨어지면 숲엔,

안감의 흰꽃들이 핀다.

먼 곳의 주름이 몰려오는 한낮

흑백의 천조각이 펄럭거린다.

안팎이 다른 구름을 펼쳐놓고 본을 뜨는 가위질 소리

덜 마른 구름의 조도가 낮아질 때

몇 방울 물소리가 떨어진다.

맑은 날엔 산의 꼭대기에 붉은 천이 펼쳐지기도 한다.

 

 

후투티새의 울음소리가

세— 탁탁 목청을 높이며 골목을 도는 목소리 같다.

후두두 후두두 숲을 밟고 달려오는 소나기

바람이 빠른 풍속으로 숲을 돌리면

원통 속 빨랫감처럼 숲은 물길이다.

 

일제히 날개를 펴는 나무들, 연초록 깃털에 매달린 수만 개의 鍾을 치고 숲을 빠져나가는 바람

잎사귀들은 무거운 시간을 견딘다.

 

상한 숲의 한 귀퉁이가 수선대 위에 올려진다.

붉거나 흰 단추들이 떨어진 자리마다

오려내고 봉합하는 메마른 바느질 소리.

녹색 겉감을 뒤집어 안과 밖을 바꿔 꿰맨

어둠의 거푸집을 뒤집어쓰고 나온 붉은 물결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깔깔한 조각천 몇 장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후투티 소리가 멀어지고 있다.

 

 

—『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2011)

 

 

 

 

 

* 강정애1959년 전북 장수 출생. 부산여대 수료. 2011년〈서울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출처 : 박정원의 `그날 이후`
글쓴이 : 고드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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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 속의 카잔차키스 / 이길상

 

 

잘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 속옷을 갤 때마다

개어지지 않는 내가 보인다

불운 견디게 하는 사막 풍경은 상향등처럼 켜지고

내 안의 나를 알고 있는 생이 뭔가 흘리면서도 아파할 것이다

서른 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감히 물을 수 없을 때 부르튼 입술은 길을 알고 있었다

 

맹인 바구니의 노래가 퇴근하지 못한 마음에 파고들수록

노래 속 세상을 그쯤으로 짚으며 난 힘겹다

감이 잡힐 나이, 노래의 무거움은 몸 밖에서 온다

우산 안에서도 젖는 내일의 삶, 울음 삼킨 시늉할까

그래 달콤한 사막 밤의 모래 폭풍은 고독으로 피어난다

몸 밖의 사하라, 헛것 두르며 새벽 추위마저 껴입는다

내 속 깊은 모퉁이는 안전하게 돌아나간다

 

안경은 양심의 속때, 나를 잘 아는 신발은 닳은 굽 한 장 더 깐다

사는 일로 얼어붙은 옥탑방, 열쇠 구멍 나를 열지 못했으므로

계단 낮아도 허공의 높이 착실히 밟아갔을 거다

응시할수록 더 귀 먹은 삶의 발목

흩어질 가시나무 속에 내 얼굴 보인다

 

발목 깊이 쌓이는 생

추운 종아리의 살빛, 많이 본 듯할 때

책과 길마다 죽은 하늘이 펄럭인다

속옷을 갤 때 후회의 올마다 낙타, 낙타들 쉽게 빠져나간다

거죽만 진지한 나의 사막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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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 말하지 않을 때 시가 왔다

 

야구 시즌이 끝나고서야 잠자리가 사라진 걸 알았다.

 

인적 없는 공원. 불빛만이 맑게 새어나왔다.

 

내가 나를 피해 다녔으므로 바람 한 장도 햇살처럼 빛났다. 시를 쓰고 있었지만 시는 좀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언제나 나였고 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가 쓸 시간이다.

 

볼륨을 줄인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내 숨결에 따라 소리가 변하는 변주곡.

 

대문에서 쉰다.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아닌, 그 때 골드베르크가 흘러나온다. 여기 대문 앞에서 모든 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미 문이 닫히고 길은 사라지고 없다. 저기 까맣게 타는 불빛이 길이 되는 건 아닐까.

 

커피를 붓는다. 밤에 쓰는 편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될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어둠이 커피향처럼 퍼져나간다. 덜컹거리는 창문에 마음을 놓는다. 당선 소식을 받고 산책을 나간다. 눈발이 반갑다. 밀감장수가 파는 귤이 보인다. 귤보다 귤빛이 만져지는 시를 쓰고 싶다. 먹지 않아도 따스한 그 귤빛을 맛보고 싶다.

 

우선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정배, 윤미, 의주, 재호, 석진, 많은 힘이 되어준 성우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채규판 교수님과 정영길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강연호 교수님, 열심히 쓰겠습니다. 지켜봐주실 거죠?

 

 

 

 

 

 

[심사평] 거친 행간 오늘보다 내일에 더 기대

 

시를 읽고 쓰지 않아도 시간은 잘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경제는 미세하게나마 성장한다. 시하고 상관없이 삶은 잘도 돌아간다. 그리 시적인 나라는 아닌 것 같은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놀라운 일이다. 이 땅을 마지막 시의 나라라고 불러도 지구인 중에 시비를 걸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시의 풍요와 다양성을 이번 심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에 열여섯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이 중에서 류성훈, 강윤미, 김희정, 최설, 손현승, 이길상씨의 작품을 1차로 골랐다. 모두들 중요한 패를 하나씩은 움켜쥐고 있었다. 심사를 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당선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논의했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갱신할 뒷심이 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손현승씨의 시들은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으나 어떤 규격화된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시에 가한 바느질 솜씨를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선배 시인의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점도 지적되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 최설씨의 시는 시적 대상을 해석하려는 끈질긴 탐구심이 볼만했다.

 

그러나 사유를 서술하는 방식이 일방적이어서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길상씨의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는 때때로 거친 어휘와 난해한 이미지가 날것으로 드러나 있으나 속에서 올라온 어떤 찐한 것이 스며 있는 시이다. 자아가 세계를 통과할 때의 단절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일상 속에서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밀어붙인 점을 좋게 읽었다. 안전하고 매끄러운 것보다는 불안하고 거친 것을, 오늘의 시보다는 내일의 시를 택한 결과다. 축하한다. 이제 좋은 시인으로서 그가 응답할 차례다.

 

심사위원 황지우(왼쪽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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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황사 / 정영효

 

 

이 모래 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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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라는 아포리아에서 계속 길을 잃고 싶어

 

언젠가라는 말을 믿으며 지냈다. 언젠가가 일찍 온 것인지 늦게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부유하던 밤들은 행복했다. 비록, 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자괴감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일지라도 그 속에 희망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출발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확신한다. 시라는 아포리아에서 계속 길을 잃고 싶다.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을 호명하는 것으로 들뜬 소감을 채운다. 존경하는 어머니 서 여사, 사랑하는 누나들과 매형들. 시를 쓰는 걸 모르고 지내줘서 오히려 감사하다. 귀여운 조카들. 유성, 정우, 수인, 재욱에게도 지금만은 부끄럽지 않은 삼촌이 된 것 같다. 빈자리를 채워주신 삼촌들과 숙모들, 고모와 고모부께도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문학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겨준 동국대 국문과와 문창과 선생님들, 선후배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특히 홍신선 선생님과 김춘식 선생님, 허혜정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가장 엄한 독자였던 용목 형, 상우 형, 판식 형. 결핍과 오기를 키워준 덕희와 수호. 폭탄주 같은 시분과원들. 경성대 민족 국문과 사람들과 감전동 식구들,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부족한데도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치열하게 살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계속 열리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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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의 체험을 유려한 시적 언어로

 

특별한 작품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은 높았다.현실투쟁적인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도 금년도 응모작들의 한 경향이었으며 추상적 의식을 실험하는 작품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편을 읽은 뒤 최종심의 대상을 네 편으로 압축하였다. 류성훈의 월면 채굴기’, 최호빈의 얼음묘지’, 정영효의 저녁의 황사’,정재영의 윤회등이 그것이다. ‘월면 채굴기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도 독특하고 언어 구사도 유려했다. ‘얼음묘지는 이미지의 전개가 참신했으며 저녁의 황사는 상상력의 전개가 돋보였다. ‘윤회또한 나무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유추하는 통찰력이 자연스러웠다. 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각각 가지고 있었는데 심사과정에서 우리들이 주목한 것은 체험의 구체성이었다. 언어의 유려함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응모작을 검토하였다.

 

최종적으로 월면 채굴기저녁의 황사가 검토의 대상이 되었는데 두 편의 시가 만만치 않은 수준을 지니고 있어 상당한 시간 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 ‘월면 채굴기병들도 힘 빠질 무렵과 같은 뛰어난 구절을 구사하는 시적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후반부 처리가 조금 약해 보였다. 같은 응모자의 하늘은 연직선 쪽으로도 함께 논의했으나 체험의 구체성이 조금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 ‘저녁의 황사는 사막으로부터 발 딛고 있는 현실로 상상력을 끌어오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웠으며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자신의 표현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른 응모작 마방이나 바람과의 여행이 영상물을 통한 간접 체험을 다룬 것이라면 저녁의 황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 우리들은 주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월면 채굴기저녁의 황사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두 분 다 충분히 당선권에 드는 작품이라고 판단하였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한 편의 작품을 정해야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심사위원 황동규·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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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산 / 이선애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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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라는 느낌 들어

 

매년 이맘때면 문학을 좋아하는 엄마들끼리 모여서 자그마한 여성문학지를 만든다.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있는 엄마들의 곱고 섬세한 손길로 엮은 이 책은 지역사회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책 읽는 습관, 문학의 저변확대를 꾀하고자 함이다. 어언 여섯 번째 세상에 나올 우리들의 아기를 기대하면서 출판사 편집실에서 최종교정을 마치고 OK 사인을 내던 찰나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선소식이다. 떨리는 손끝과 가슴에 또 하나의 산통이 스친다. 몸속 아기가 앉았던 자리에 시를 앉히고 자신을 낳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수많은 언어들이 시간의 벽을 허물며 웅웅 메아리친다. 이제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란 느낌이 든다. 세상에 갓 던져진 갓난아기인 나를 위하여 막중한 책임이 주어진 엄마가 된 것이다.

 

당장 배고픈 나를 위하여 옥타비오파스의 말을 빌린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자기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시각각 파고드는 죽음 앞에서도 아르테미르 여신처럼 즐겁게 시를 낳는 풍요와 다산의 힘을 기르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하여 늦은 나이에 진학한 광주대학교 문창과 대학원이 고맙다. 열심히 지도해주신 이은봉, 신덕룡 교수님, 외에도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모두에게 깊은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내이기보다는 공주이기를 소망한 나를 탓하지 않고 묵묵한 눈길로 지켜봐 주신 남편과 함께 공부한 지선, 성희, 인드라망 문학모임 식구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다. 예기치 않은 기쁜 소식 주신 서울신문사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고려대 최동호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심사위원님들께도 큰 절을 올린다. 좋은 시로 갚아야 할 너무 큰 빚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치열하게 시를 낳는 엄마가 되기를 자청해본다.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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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돋보여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 온 시편들을 정밀하게 읽고 이에 대해 논의한 다음 다시 최종심의 대상을 다섯 편으로 압축하였다. ‘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송인덕)는 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가, ‘난초와 칼´(이연후)은 이미지의 선명성이, ‘양치하는 노파´(한세정)는 시적 함축성이, ‘바닷가 떡집´(김영진)은 진득한 삶의 감각이, ‘가벼운 산´(이선애)은 시적 발상 전환이 돋보였으나 각각 그 나름의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시편을 놓고 좀 더 범위를 좁힌 결과 세 편의 시가 남게 되었다. ‘난초와 칼´은 이미지의 선명성은 두드러지지만 대립 구도가 너무 단순하고, ‘가벼운 산´은 시적 발상 전환이 참신했으나 설명적인 부분이 시적 밀도를 약화시켰으며, ‘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는 자연스러운 시적 전개가 강점이지만 상식의 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엇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놓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가벼운 산´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참신성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노파의 손등에서 고통의 향기를 관찰한 시인의 시선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솜씨와 더불어 눈여겨볼 만한 점이라고 하겠다. 삶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선이 시적 구도 속에서 빛날 때 남다른 작품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다시금 되새겨 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최동호, 오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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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수업시대 / 이강산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온 이제는 쓸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나씩 읽어본다. 어딘가 엔 이것이 책을 녹여 한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쓰여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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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쓰자마자 휘발하는 시는 매 순간 절망하는 것

 

프랑스 해변의 민박집에서 나는 TV가 있는 독방을 요구했다. 이제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TV소리를 크게 해놓고 바지를 벗었다. 벗어놓은 바지에서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이국의 언어들이 차츰 공간을 메우면서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이 불쾌한 소문처럼 커튼을 한껏 부풀렸다. 커튼이 한 덩이의 절정을 토해놓았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쓰자마자 백지에서 휘발되는 언어를 가지고 싶었다. 나는 언어의 물질성과 의미의 비정형성 사이가 아찔하다는 것을 안다.

 

허천난 사람처럼 껴안고 핥아도 시의 육체는 매순간 절망할 것이지만 심장을 꺼내들고 생을 고민하는 일과 같이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증명의 방식이 될 것이다.

부족한 작품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뵐 때마다 내 1인칭의 권위가 욕심을 부리는 김명인 선생님과 이창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목요팀 형들과 종원, 소현, 철규 그리고 내가 기쁜 마음으로 부르는 많은 이름의 주인들이 함께 있어 좋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부모님께 좋은 소식이 먼저 찾아가 조금은 죄송하고 많이 기쁘다.

 

생각해보면 혼자 찾아간 이국의 해변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처음 육지로 나와 폐를 느끼는 양서류처럼 아득하고 막막한 한 호흡이었다. 그것이 내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심사평] 유연한 언어구사 돋보여

 

예선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우선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 김강산의 엉덩이’, 이산(본명 이강산)연금술사의 수업시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등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대상자를 좁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이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은 잘 다듬어져 시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은 현실적인 체험의 추상적 표현이 그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김강산의 엉덩이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지만 외설적인 부분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두 편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형적인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는 그 유연한 언어 구사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명품 백과 가짜 백을 대비, 여성들의 내면적 심리를 실감나게 살려냈다. 그러나 기성시인의 작품을 모방한 흔적이 엿보였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결국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 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심사위원 신경림,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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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취소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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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시 당선작 취소합니다

서울신문은 2006년 신춘문예 시 부문인 최호일씨의 ‘아쿠아리우스’의 당선을 취소합니다. 이 작품이 한국수자원공사가 2004년 실시한 제15회 물사랑글짓기 공모 입상작인 이모씨의 ‘물병자리별’과 동일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최씨는 “지역 시동인 후배인 이씨가 2년 전 품평회에서 돌렸던 내 작품을 몰래 가져다 응모한 것이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이씨도 “그렇다.”고 시인했으나 같은 작품이 이미 이씨의 이름으로 발표된 만큼 미발표작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를 드리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울신문은 신춘문예 응모작을 더욱 철저히 검증할 것을 다짐합니다.

 

 

 

 

 

 

 







아쿠아리우스 / 최호일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 당선 소감 “옆집 아줌마에게 말걸듯…그렇게 詩 써내려 갈 것”



십년 전쯤, 생업을 등지고 시에 빠져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무성 영화처럼 돌아간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나는 살짝 맛이 가 있었다. 과도한 의욕이, 편견과 오만이, 그리고 화려한 궁핍이 내 유일한 의상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보이거나 천재였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지쳐있었다.

어림도 없을 줄 알았던 당선소식을 듣고는, 아이들은 상금의 용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아내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방에 가서 운다. 나는 실없는 장난 전화를 받은 것처럼 담담했다. 가소롭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누군가 말했다. 시인은 돈을 멀리해야 하고, 살이 쪄서도 안 되며, 오로지 고독과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심한(?)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의 양식은 과연 고독과 이슬일까? 하지만 나는 어느덧 돈의 단맛을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영악해져 있다. 그러나 등이 따뜻해져 갈수록 마음은 여전히 춥거나 허기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여!시인이여!절벽까지 나를 안내해 다오. 출구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작심을 하고 쓴 시는 모조리 밀려나고, 옆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쓴 시가 당선이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 힘을 뺐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앞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시를 써 봐야겠다. 아무튼, 내가 어쩌자고 이곳으로 다시 기어들어 왔는지 통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약주나 한잔 부어 드리러 산에 가야겠다. 격려해 준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홍일표 시인, 날시 동인,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 지금은 눈에 덮여 있을 추동공원의 벤치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 최호일 약력 ▲1958년 충남 한산 출생 ▲잡지 프리랜서 ▲날시 동인


■ 심사평 “우물처럼 웅숭깊은 신화적 시선”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선자(選者)들은 안타까웠다. 말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으면서도 사로잡힌 시가 안 보이니!


▲ 시 본심을 맡은 김명인(왼쪽) 시인과 정현종 시인이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시답지 않은 시시덕거림의 중언부언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산문의 줄글체 등이 어지럽게 부조되어 왔다.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는 시상(詩想)을 펼쳐 독자에게 다가선들 그 반응은 불문가지이리라. 마치 알맹이가 빠져나가버린 말의 빈 포대자루를 한참이나 들고 서있었다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서도 임수련씨와 최호일씨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할까.

임수련씨의 작품에서 오래 묵힌 신뢰 같은 것을 맛본다.‘악어왕국’에서 보여주듯이 진술과 묘사를 교직시키는 적확한 비유가 삶에 스며드는 풍자와 제대로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동력을 내쳐 지탱해내는 인내를 잃었을 때,‘달리는 자전거의 실루엣’처럼 처음의 긴장이 어느새 허물어져버리는 시편으로 나타난다.

최호일씨의 경우, 응모 작품 전체에서 균질감이 살펴진다. 그만큼 습작의 강도가 굳셌음을 읽어내게 한다. 상상에 젖어든 시어의 활달한 운용도 그의 시편들을 오롯이 한 편씩의 완결된 서정으로 구축하는데 일조했으리라.

그 중에서도 ‘아쿠아리우스’는 태생의 별자리를 짚어 삶의 근원적인 갈증을 풀어내는 신화적 시선이 우물처럼 웅숭깊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것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시의 얼개를 어느 정도 아우를 줄 아는 솜씨가 평가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정현종 김명인

 

 

=============================== 당선작 취소기사 =====================================

 

 

 

출처 : 예쁜자기,멋진자기(설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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