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흔한 풍경 / 김미령

 

 

시청 앞 작은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잉어가 산다

몰락한 귀족처럼 느릿느릿 헤엄치면

양귀비꽃 수면에 비쳐온다

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빛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 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여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

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

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 것은 아무 것도

 

들킨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동안에도

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

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

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

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서는 동안

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

제 몸에 딱 맞는 표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모두 서로에게 그림 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막 외출하려던 참에 옷장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깜빡 잊고 나가려던 참인데 간신히 받은 전화 속 상대방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였다! 나는 실감을 도둑맞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무슨 일의 기미는 그렇게 희미하게 온다. 시가 내게 오는 방식도 그러하다. 시의 기미를 다행히 감지했을 때 나는 납작하게 엎드려 코를 벌름거리며 그 냄새의 방향과 거리와 크기를 탐색한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확실히 기억해둔 뒤에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유유히 사라진다. 며칠동안은 부단히 그 실체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내림굿을 받듯 어느 날 정신없이 받아 적곤 한다.

 

그러나 날것의 실체를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해 좌절을 맛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보편성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감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감정들을 아름다운 충격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부터 내 시 쓰기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 같던 내 말들과 행동이 조금씩 보편성을 찾아가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나를 세상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시가 내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확실히 믿고 있다.

 

오래된 일기장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보며 시 비슷한 것을 끄적거리기 시작한 10년 전 일이 생각난다. 그때 내 시를 처음 읽어봐 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신 남송우 교수님, 한동안 외면했던 시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시기에 훌륭한 스승이셨던 손진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과 철의 여인 엄마, 가족들, 또 함께 기뻐해 준 선화, 희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nefing.com

 

 

[심사평]

 

예심을 거쳐 두 선자에게 전해진 작품들은 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응모작들에 결정적인 그 무엇이 모자란다는 인상을 주었다. 발상의 참신성이 돋보이는 작품은 흔히 언어의 밀도가 따라주지 않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은 호흡이 짧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패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치열함이나 당돌함이 제거된 시적 수련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념에 젖게 했다.

 

결국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당선권에 근접했다고 여겨지는 네 명의 응모자의 작품을 추려내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김미령의 흔한 풍경이 마지막으로 낙점을 받게 되었다. 얼핏 보아서 무더운 날의 나른한 도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별 무리없이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현실의 단면에 대한 담담한 소묘가 돌연 삶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절실성을 획득하고 다가온다.“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 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같은 표현도 대범하게 씌어진 듯하지만 응모자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다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믿음이 갔다.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적인 시세계의 구축에 보다 신경을 쓴다면 한 뛰어난 신인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최종심에서 논의된 작품 가운데 김영수의 들키지 않은 걸음걸이어두운 독서는 선자들을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다. 시에 담긴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이 시를 너무 건조하게 만든 감이 있고 불필요한 추상어의 남발도 거슬렸다. 이밖에 오징어 등불을 투고한 이병일과 사나운 연어떼가 밀려갔다의 박성현도 숙련된 솜씨를 선보이고 있지만 충분한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분발과 정진을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김명인·남진우

 

728x90

 

 

토우 / 권혁재

 

 

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 푼 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汽笛소리

누이의 嬌聲이 흘러 다니는 三 里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밤마다 사랑 없는 사랑이

하늘로 가는 문턱을 움켜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축축한 신음소리만 되돌아 오는

갈 길 먼 꿈들은,驛廣場에 쏟아져 나와

가슴 뚫린 퍼런 그림자로 떠돌아 다녔다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무뚝뚝한 하행선 열차가 떠나가고

반 시간쯤 후에 비가 내렸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三 里에 내리는 비릿한 土雨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서해대교에 걸린 노을을 따라 서해로 잠입해 가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을빛이 흔들리면서 트로이의 목마처럼 버티고 서 있는 교각에 부딪쳐 갈기갈기 찢기어 나갔다.

 

한순간 열기가 오른 얼굴에 숱한 詩語들이 뒤섞여 피어났다. 내가 진실로 수용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아직도 끝이 없는 터널 속에 갇혀 있는 심정이다. 빛에 적응이 되는 거리에 다다르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동안 통과제의 때문에 가졌던 중압감을 서해로 떨어지는 노을과 바꾸고 싶다.

 

어려운 시기에 답답한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본모습을 쉽게 열어 볼 수 있도록 열쇠 하나를 쥐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온화한 미소로 이끌어 주신 김수복 선생님, 시창작 실기와 이론을 지도해주신 박이도 선생님, 이남호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글 쓰는 것에서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이제는 정말 글 쓰는 것에서 다시 굴레를 뒤집어 쓰는 진짜 시인이 되고 싶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에도 한 번 더 귀 기울여 들으면서.

 

 

 

 

그대의 어깨에 기대어

 

nefing.com

 

 

 

[심사평]

 

본심으로 넘겨진 20여 분의 응모작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우리가 공통으로 느낀 것은 개성이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다는 거였다.(하긴 그런 작품을 선자로서 만나는 것도 복이다.)대신 오랜 연마기가 느껴지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은 꽤 있었다.

 

우리는 다섯 분의 작품들을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박성희의 유년의 계단은 얼핏 담박하면서도 어릴 적 기억과 어른의 일상의 어울림이 만만찮게 복잡하지만 후속작은 추억과 일상으로의 2분법이다. 김경진의 달팽이가 무섭다는 자연과 자아의 관계가 절묘하지만 후속작에서는 무너진다. ‘전남성로원을 쓴 김창헌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으나 아직은 그 가능성들의 온전하고 총체적인 주인이 아니다.

 

천서봉의 나무에게 묻다는 자연과 일상과 종교적 신비의 구경이 산 속의 고요 속에 절묘하게 녹아 들어 있으나 심상 사이 모호한 주름이 장식적이며 화려한 수사의 찌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끝내 지울 수 없다. 선자들로서 매우 안타까운 대목이었음을 굳이 적어둔다.

 

토우3편을 투고한 권혁제는 토우2행의, 버려진 도시의 향토적이기까지 한 정서(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누이의 嬌聲을 통해 한반도 전체의 아픔으로 끌어올리는 광경이 흥건하고 또 흥건하다.그리고, ‘토우=웃음=비명의 등식이 만만찮은 복잡성을 시의 육체에 부여한다. ‘밀물우기에서도 흥건=복잡은 적당하다. 우리는 이 광경을 뽑아 선에 들지 못한 사람을 적셔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심사위원 김명인 김정환

 

728x90

 

 

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 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유령처럼.

그대를 비 내리는 창 밖에서 처음 보던 순간이 생각나는군요 나는 은유로 출렁이던 그대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던가요 알 수 없는 세상의 거친 은유에 대해 나는 자주 연민합니다 어머니,아버지,고향,그리고 그대…,그래요 그대라는 계절을 타는 동안 나는 시를 썼던가요 한량없는 마음으로 나는 틈만 나면 노트에 나의 계절들을 옮기기 위해 애썼지요 오늘 첫눈 같은 당선 소식을 받고 무작정 수화기를 들었다가 마음에 주소하나 없이 떠다니던 그 손끝의 떨림에 대해선,맥없이 내려놓는 나의 어정쩡한 자세에 대해선 침묵하겠습니다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詩 이전에 이미 詩이셨던,생각하면 눈물로이루어지는 어머니,너무 야위어져버린 종아리로 오늘도 새벽에야 겨우 주무시고 계실 아버지,그리고 두분 당신이 지상에 내리신 희끗희끗한 눈발들 희경+현수,나경… 이승에 없는 누님,아직도 눈빛만 보고 나의 뒤통수를 아무런 이유없이 툭 때려줄 수 있는 고향들 희상 경석 봉섭 성환 진영 승필 계택,나의 파란 피 필용형,힘들게 공부하시는 진이형 등등, 끝으로 부족한 작품에 죽비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까지 살아 있어 주어 감사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nefing.com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편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높낮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 중에서 당선시 한 편을 고른다는 것은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번갈아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고,선자들은 한여진의 ‘나의 서가’외 5편,권오영의 ‘투입구’외 4편,김경주의 ‘꽃 피는 공중전화’외 4편 등을 최종 후보작으로 정하였다.

이 세 편의 시들은 저마다 장단점이 있었다.‘나의 서가’외 5편의 시들은 평이한 서술로 진솔한 감정을 유연하게 드러냈지만,시적 수사에서 약세를 보여주었고,‘투입구’외 4편의 시들은 유전자 조작 실험쥐나 공룡알 화석 등을 통해 과학적 상상력을 독특하게 포착하고 있지만 이를 시적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었다.

김경주의 ‘꽃 피는 공중전화’외 4편의 시들은 이런 약점들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관심을 끌었다.삶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는 시선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동시에 사물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시적 역량이 신선하게 다가왔다.예를 들어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수화기를 타고 전해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가슴 속에 고스란히 박혀온다”와 같이 사물의 속살을 파고드는 그의 ‘꽃 피는 공중전화’는 당선시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었다.다른 투고작의 고른 수준 또한 참고가 되었다.

최종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그리고 아깝게 탈락한 응모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드린다.또한 신춘문예가 일회성 연례 행사가 아니라 모든 시인 지망생들에게 지속적인 분발과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황동규·최동호

 

728x90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장석원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고,바람은 그때 태어났다.

 

나의 이름은 피곤한 바람이다. 나는 백 송이 수련이 내뱉은 한숨이다.

 

햇빛이 몸을 데워 비상했고, 몸 속에는 한 방울 물이 갈증을 태우고 있다. 내 몸은 지금 구름빛이다.

 

나는 가볍다. 후두둑 떨어지는 적색 열매처럼 가까운 미래에 나는 돌아갈 것이다. 이마에 떨어지는 것, 얼굴에 번지는 것내게 쇄도하는 현기증. 그대 몸에 얼룩지는 오래된 바람,흰 손길에 갇혀 나는 물 밑에 있고 나는 오므라들어 졸고,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고, 물 위를 지나던 나는 바람이요 장막이요, 그때 저기 부유하는 꽃잎.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개념으로 쪼갤 수 없는 시간인 사랑의 순간.그런 순간이 있는 오후의 풍경 속에서 나와 나의 시는 동시에 경계 너머의햇빛을 보았다.사랑하는 두 존재는 ‘동시’라는 명사에 갇힌다.어느 한 쪽의 사랑으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나 혼자의 사랑이 날 지치게 했다.사랑의 동시성은 시간의 그물에 포박되지 않는다.사랑하는 존재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같이 존재하면서 같은 곳을 쳐다본다.사랑에 빠진 사람에게‘그’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이제 나와 시 너머에있는 ‘그들’을 향해 나아간다.시는 감옥이었다.‘나’와‘너’가 이루는 세계에서 ‘나’와 ‘너’와 ‘그들’이 이루는 세계로 떠나고,다시 다른 ‘그들’이 존재하는 다른 곳으로 유목하는 내 언어의 출발이 기쁘다.출옥하지만 나와 시는 ‘동시에’ 존재한다.나는 다시 그 감옥을 선택하고,시는 나를 선택했다,동시에.

나의 출발을 있게 해 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과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내 시에 살고 있는 ‘그들’이 떠오릅니다.내 시가 탄생했던 ‘poetika’의 벗들과 혁웅 형,찬기형,순원 형,행숙 그리고 장욱.내게 처음으로 시를 쓰게 했던 국문과 문창반의 선후배님들,가족들….

 

 

 

역진화의 시작

 

nefing.com

 

 

[심사평]

끝까지 검토의 대상이 된 것은 4명.이영옥의 ‘주먹 만한 구멍 한 개’ 외 4편,천서봉의 ‘뿌리 내리는 아버지’ 외 3편,김정문의 ‘賊反荷杖’ 외 2편,그리고 장석원의 ‘낙하하는 것의…’외 6편이었다.

이영옥의 ‘주먹만한…’은 “겨울바람은/아버지 자전거의녹슨 귀를 때렸다”의 첫 2행에서 보이는 일상-추억 풍경화(化=畵)의 고전적 품격을 장장 26행씩이나 무리 없이 유지-발전시키고 있는 솜씨가 놀랍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순서대로풍경의 긴장이 처지고 감상적이며 심지어 감상주의적이다.천서봉의 작품은 수준이 고르지만 ‘뿌리내리는…’의 “절망에 대한 썩지않는 공식”과 “소풍 같은 봄날”의 모순이 끝내 미학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김정문의 ‘賊反荷杖’은 표면적인 산문-이야기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소설과 시의 차이를 예각의 미학으로 형상화한,도시변방(불광동)의 대표적인 풍경화(化=畵)라고 하겠다.하지만,제목의 서투름이 좀 불길했는데,과연 ‘웃음’을 아직 길들이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낙하하는…’은,물,문,바람,피곤,갈증,태움,구름,현기증 등 온갖 인간형상과 자연현상이 시 전체를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요가 단아하다.제목의 질문혹은 자문과 마지막 행 “~이요”의 음풍농월투까지 포함해서 그렇다.이 절묘한 세파 속 ‘단아한 고요’는,“찍 침을뱉으며 햇빛 속으로 귀향하”는 ‘건달’(‘물결 그리고 물결’),‘게르니카’와 ‘김추자의 꽃잎’과 ‘5공화국 대통령 취임 연설문’(‘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군화’와“사타구니보다 따뜻한 곳”(‘파로호’)까지 거느리면서도단아한 고요며,급기야 거느리므로 단아한 고요다.우리는 이분을 뽑기로 합의했다.

 

심사위원 김명인 김정환

728x90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 신혜정

 

 

분홍빛 말이 나를 유혹했어요.

말을 타려고 하는데 해진 바지 사이로 무릎이 보이네요

말장사 아저씨가 입은 회색 점퍼 소매에도 누런 솜털이 삐죽거려요

아까부터 아저씨는 저기 공장굴뚝처럼 기침을 토하고 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말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위로 솟으면 초록과 빨강 줄무늬 천막이 보이고

내려오면 내 바지처럼 군데군데 구멍난,

쓰레기더미 같은 판자집이 보였어요

연탄재들은 오늘 아침 차에 실려 떠났어요

말장사 아저씨는 네발 달린 의자에 안장처럼 앉아 있네요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발굽 소리 대신 녹슨 스프링만 자꾸 삐그덕거렸어요

창호지 바른 우리집 창문에 불이 켜지네요

이제 말들이 리어커 바퀴에 실려 떠날 거예요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다리가 없는 분홍빛 말 위에서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 연탄재는 왜 또 내놓으세요?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심사평]

 

마지막까지 당선을 다투었던 작품은 신혜정씨의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과 조동범씨의 ‘심야 배스킨 라빈스 살인사건’ 이었다.이들의 시적 재능은 응모 시의 전편에 걸쳐서 고루 확인되었다.

신혜정씨의 시편에는 어떤 가능성 앞에 열려 있는 발랄한 시적 감수성이 있다.이 응모자가 선택하는 시어는 그 정밀성에 값하는 당돌함과 당당함이 느껴졌다.그럼에도 말의 운용에 다소의 무리가 끼어 들고 그것을 쇄신할 역량이 일천하다는 약점도 함께 읽혀진다.어쩔 수없는 선택의 결과라 하더라도 결점이 있는 시를 당선작이라고 밀어올리는 선자들의 심사가 마냥 편편한 것만은 아니다.선자들은 이 응모자의 잠재적 기대치를 평가한 것이다.더욱 정진하여 거기에 부응하길 바란다.

조동범씨의 시편에도 그 착상의 무거움에 비교적 선명하게 반응하는시어의 운용이 돋보인다.표제 시는 심야의 적요가 삶의 무심한 표징과 어울리면서 섬뜩한 풍경을 빚어낸다.그리하여 문명한 세계의 이면에 감추어진 그로테스크한 삶의 편린들이 시의 전면에도 부상된다.그럼에도 선뜻 당선작으로 밀지 못한 것은 그 풍광이 만들고 있는 지극히 어두운 시선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증권사 법당에서의 한나절’을 응모한 전인식씨, ‘겨울강’ 등을 응모하여 견고한 시풍을 선보인 문신씨, ‘다슬기를 잡는밤’ 외를 응모한 안명희씨등 아쉽게 당선의 자리를 내어준 낙선자들에게도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송수권 김명인

 

 

 

여전히 음악처럼 흐르는

 

nefing.com

 
728x90

 

 

건봉사 불이문 / 이덕완

 

 

두 개인 듯 하나로 보이는 구름 한 조각 금강산과 향로봉에 걸쳐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건봉사 불이문에 들어선다

 

부처님 치아사리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에는 불상이 없고 계곡 건너 금강산 대웅전엔 부처가 환하다 만해(卍海)의 뜨거운 발자국이 보일 듯 돌다리를 경계로 금강산과 향로봉이 포개진다

 

같고 다름이 하나인데 이 곳에는 모두가 둘이라니 민통선 철조망이 반세기동안 녹슨 풀섶에서 가람을 두르고 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독경 소리가 풀향기에 섞인다 깨진 기왓장에 뒹구는 낡은 이념들 초병들의 군홧발 자국 절마당에 가득한데 목백일홍나무에서 떨어지는 자미꽃의 핏빛 절규는 나무아미타불탑 위의 돌봉황에 실려 북으로 가는가,갔는가

 

적멸보궁 터진 벽 뒤로 날아가는 하얀 미소를 보며,아내와 난 보살님이 준 콩인절미를 반으로 나누어 먹는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풀무질을 했다.담금질과 망치질도 했다.푸르게 벼려진 도끼를 들고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갔다.들판에서 신작로에서 모두 써버린 낮 시간들,저녁 어스름에야 도착한 숲에는 너무나 많은 나무들로 가득하다.좋은 나무 한 짐만 하고 싶다.아궁이에 지펴진 윤기 흐르는 쌀밥 한 그릇 짓고 싶다.아랫목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다.노을 속에서 울리는 도끼질 소리가 맑게맑게 숲 속에서 메아리치고 달빛 아래에서는 파란 영혼이 자작나무 밑둥을 넘기리라.

빈 지게의 멜빵을 내 어깨에 걸려주시고 손에 도끼자루를 쥐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지게 가득 나무 한 짐하는 것으로 보답하겠다.신춘문예가 뭔지는 모르시지만 기뻐하시는 노모와 IMF한파에 농촌까지 밀려와 마른 풀잎처럼 사는 아내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시쓰기 보다는 시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이영진선생님을 비롯하여 김진경,김사인,김형수,임영조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함께 공부한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문우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특히 나를 위해 뒤에서 격려해준 분들께고마움을 전한다.

새로운 천년도에는 저 사람들의 숲으로 들어가 사랑과 희망을 벼리고 싶다.

기쁘다.

 

 

 

[심사평]

 

작품 수준으로 보면 대여섯 명이 비슷하다.그런데 ‘건봉사 불이문(乾鳳寺不二門)’이 취해진 것은 현실적으로 그나마 진취적이라는 인상 때문이다.이 시는 기술면에서 보면 그렇게 새로운 점이나 무슨 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그런데 노래가 듣기에 개운하고 또 한편 침통한 맛을 전해주니 이것은 이작자가 구사하는 작품의 비결이 아닐까한다.

결국 하고자하는 말은 인간무상이나 그렇더라도 이 시가 풍기는 멋은 매우세련되어 있다.좀 더 적극적인 현실참여,혹은 역사적 실천의 사상적 배경이뒤에 묻어나왔더라면 아마 이덕완은 큰 시인 소리를 장차 듣지 않을까.

삶의 진실과 체험!그것을 더욱 돈독히 할 것을 당부드린다.

문신의 ‘다도해’는 카메라 기술이 비범하다.이 경우 떠들썩하게 쓰지 않고 내면 리듬을 지속하여 잘 나타낸 것,꼭 필요한 대상이나 물체를 서두르지않고 형상화한 점, ‘건봉사 불이문’ 작자가 못가진 장점을 지녔다.참신한언어선택,이것은 문신의 커다란 힘이요 힘이다.

한편 김경진의 ‘어디서 시작할까’는 고심한 자취가 드러나는 단시로서 이작품 역시 마지막까지 주목되는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시인은 생명력이 길다.서둘지 말고 큰 시인 되는 초연한 길을 가도록 하면 되는 거다.소재가 항상 새롭다는 데 비해 말의 경제가 약간 수월해진다는 것은 경계할 일이 아닐까.

최기순의 ‘가을산’이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수긍이 가나 시작과 맺음의 감동이나 감정이 조금 느슨한 것 같다.이 작품 역시 이번 기회에는 아깝게 놓치고 만다.

 

심사위원 김규동·문정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