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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 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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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난 詩 소비자, 더 읽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는 걷습니다. 산호 미용실을 지나 파리바게뜨를 지나 물왕리 저수지를 지나 아스널 FC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지나 메텔의 슬픈 눈이 떠도는 은하철도999를 지나플라이 투 더 문을 지나…. 저무는 것들이 저무는 사이로 걷습니다.

 

저무는 것들 사이에서 여러 번 저물며 걷습니다. 어느 저물녘엔 전화를 받습니다. 그 밤에 첫눈이 푹푹 내립니다. 조금씩 눈 속에 묻혀 가는 집과 산과 논과 창문을 봅니다. 집이, 산이, 논이, 창문이 하나씩 저물고 있다는 느낌. 어머니의 둥근 무릎처럼 그 속에서 불빛들이 견디고 있다는 느낌. 그 밤에 그는 저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짓던 시를 마저 짓습니다…. 견딥니다….

 

배고플 때 밥 사주던 금호초등학교 동창들이 생각납니다. 부족한 글 뽑아 주신 서울신문과 심사위원님들을 생각합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페이지처럼 많은 밤들이 지나갑니다. 시를 읽으며 흐려지던 밤, 은혁이와 민혁이를 낳던 밤, 첫사랑이 있는 골목을 지나며 버스 안에서 아프던 밤, 창조주의 밤이 스르르 지나갑니다. 모든, 혼자였던 밤들. 그리고 나. 나는 아직도 소비하는 사람. 더 많이 소비하고 싶은 사람. 시를, 더 많이 읽겠습니다.

 

 

 

 

부드러움과 해변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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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뤄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사건이 있고,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사건이 있고, 시에서는 말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말의 풍경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대로 지평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서 받은 스물세 분의 시는 오랜만에 우리 시의 지형 깊은 계곡으로 우리를 놀게 하고,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며 드넓은 바다에서 서 있게도 하는 행복한 경험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타고 세 분의 시를 골랐다. 일일이 짧은 감상을 달고 토론을 거쳐 힘들게 또는 아쉽게 손에서 터는 작업을 거쳐 남은 세 편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시 부러 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딴 얘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토론에 들어가 최호빈의 ‘고민의 탄생’, 김미영의 ‘상자’, 여성민의 ‘저무는 집’을 골랐다.

 

최호빈의 시는 시상을 치밀히 전개해 나가며 이미지를 구상화시키는 솜씨가 일단 돋보였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서 다년간 습작을 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미영의 시는 우리 삶의 비루한 것들을 보듬어 소중한 꽃을 피워 내는, 애정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따뜻함이 편편에서 맡아졌다.

 

아무리 시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시라 할지라도 자기의 바깥을 보는 이런 시선은 이 즈음에는 꽤나 귀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향기는 더 짙었다.

 

그러나 최호빈의 시는 숲이 울창한 만큼 베어 낼 나무들이 꽤 있었다는 점에서, 김미영의 시는 아직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여성민의 시는 반복되는 말과 말로 공간을 이루고거기에 막연과 아연의 풍경들을 자리하게 해, 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었다. 좋았다. 축하한다.

 

- 심사위원 함성호(시인), 송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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