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맨드라미의 열전 / 서김상규
족보 없는 혈통이 대물림되었다
붉은 수은주 눈금이 체온으로 치솟은
적도의 온도로 한여름이 닥쳤다
가문 뿌리에 외줄기 수맥이 끊겼다
갑골문을 새긴 지표 위에서
초록 수액이 마르는 줄기, 타는 녹색 잎
태양의 노략질이 한층 잔인해졌다
지열이 물관을 달구는 피돌기로
심장이 비등점 상승으로 끓어오르고
뼈가 삭정이로 잉걸불에 휩싸이듯
초본식물로 목숨을 붙이고 사는 게
임진왜란 아닌 때가 있었는가
장례 치르며 대를 이은 호적초본에서
이름을 꽃대로 일으켜 세웠다
은빛 별이 빛나는 사막을 걸었다
물병자리에서 물집 잡히며 길어 내린
첫새벽 이슬로 잎줄기를 적셨다
탯자리에서 혈족을 지키는 결기로
생명의 제사를 극진히 올리는 꽃자리
중심에 세상 빛이 몰려 꽃을 피웠다
족보 없는 의병들이 쓴 열전으로
맨드라미에 높고 낮은 신분이 없다
조헌 선생이 지부상소*를 올릴 때
머리맡에 놓은 붉게 날선 도끼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
<수상소감>
봄이 지나는 길목에 수국과 함박꽃이 활짝 피었다. 부처 머리 같은 수국이 화두의 깨우침으로, 함박꽃이 지혜의 웃음으로 난세인 작금을 살아가는 가르침을 준다.
이제 곧 임란 같은 여름이 닥칠 것이다. 태양이 노략질할 때 식물은 광합성 하는 의지로 초록을 녹음으로 물들일 것이다.
이런 때 맨드라미는 피를 달궈 붉은 꽃을 피운다. 땡볕 속에 절정으로 치닫는 붉음은 조헌 선생의 충절을 닮아있다. 그리고 맨몸으로 왜적과 맞선 의병들이 선혈을 흘린 빛깔이다.
맨드라미를 보라. 조헌 선생이 상소를 올릴 때 머리맡에 놓은 도끼이며, 의병들이 굳은살 박인 손아귀에 움켜쥔 도끼 형상이다.
아름다움만이 꽃이 아니다. 감히 목숨을 내놓는 기개로 조헌 선생과 의병들의 강건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품는다.
이번 수상은 나약한 시적 정신에 가하는 채찍질이다. 백척간두에 선 듯 더욱더 치열하게 창작할 것을 명하는 조헌 선생의 준엄한 호령이 아닌가,
부족한 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귀한 상을 제정하여 어지러운 세상에 고귀한 정신을 전파하는 관계자 분들께 진심 어린 머리를 조아린다.
[우수상] 불망기不忘記 / 이미영
얼어붙은 바람에 물보라가 튀는
모슬포 나루에 배가 옆구리를 댄다
마중 나온 포교가 내민 거친 손이
대정현 검은 하늘같다
탱자가시에 둘러싸였어도
봄에 피는 꽃향기가 그만이라며
그가 웃는다
온몸으로 앓았던 곤장 서른여섯 대가 여전히 푸른데
냉골인 그의 방이
저고리만 입은 그의 얼골을 닮았다
찢어진 문창지 새로 허옇게 갯바람이 몰려들고
한양에 남은 가족얘기는 그저 시루에 얹어두었다
문구멍을 메울 창호지를 당부했는데도
차를 마시러 들른 방은 찢어진 창호문이 그대로
해가 고개를 틀고 시들 때까지 쪽마루에 앉아있던
그의 그림자가 객창에 돌아와서도 떠오른다
구멍은 문창지에만 난 게 아닌 모양이다
한양으로 떠나는 내 앞에 그림 한 점이 펼쳐진다
초옥 한 채와 두 그루 소나무,
눈 내린 화폭 안으로
휘어진 백송이 나를 끌어당긴다
창호문 구멍 너머로
그의 손이 내 등허리를 덮는다
그림을 앉힌 창호지가 바람에 펄럭인다
<당선소감>
그건 아마도 인문학 수업을 듣던 작년 이맘때였을 겁니다. 그 때 들었던 그의 삶이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제 가슴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시의 단상은 그 때 저에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후로 그가 유배를 갔던 제주도 대정현 검은 대지와 검은 하늘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고 묶인 그의 외로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살 수도 있었던 수백 권의 귀한 책을 유배 간 스승에게 보내던 한 제자의 마음속을 여러 날 거닐었습니다. 시는 그런 마음들을 그려냈습니다. 시 속에서 그가 그린 세한도를 건네받은 건, 그건 아마도 저인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초라한 종이에 그려진 앙상한 그림일 뿐이었던 백 년의 진실이 그렇게 저에게 다가오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삼 년 동안 소설을 쓰다 다시 시를 잡았습니다. 연민에 사로잡힌 시쓰기가 싫어 시를 떠났는데, 본령이었던 시로 다시 돌아오자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겠지요. 지나간 날들을 기꺼이 사랑하겠습니다.
남편은 제가 글을 쓸 때 늘 옆에서 음식을 해주었습니다. 따뜻한 사람, 감사합니다. 시의 치열함을 깨닫게 해주신 권영옥 선생님, 허형만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 시를 뽑아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못난 저를 사랑해준 사람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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