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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 정선희

 

 

눈동자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있지

눈동자는 또 다른 눈동자를 부추기지 검은 눈동자 흰 눈동자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면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지

구름이 풀린 사람을 본 적 있니? 흰구름이

검은 구름을 침범한 걸 본 적 있니?

그는 눈동자에 발목을 잡힌 사람,

그의 눈동자는 지금 여기를 보지 않고

언제나 저 멀리 허공을 보고 있지

오래 전 김시습이 그랬고 임제와 김삿갓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에 없는 길을 찾고 있지

구름처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고 있지

만약 저들 중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벌써 구름이 선택한 사람,

만약 스튜어디어스나 등반가를 꿈꾼다면

당신은 벌써 구름에 중독된 사람

사람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도

구름 때문이야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눈동자를 매달아 두는 게 좋을 거야

! 저기 저 구름

조심해!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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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젠 마음껏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을 것

 

시는 내게 순간의 진실을 포착한 스냅사진 같은 것. 나는 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시는 내 삶을 맑히는 거름망이고 어지러운 내 삶의 발자국이다.

 

그동안 참 바보같이 살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두고 혼자서 멀리 돌아서 가곤 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고 더러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시인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좀 이해해 줄까? 당선 소식을 듣고 무슨 면책특권을 얻은 것 같다.

 

이제 좀 엉뚱한 행동을 해도 시인이니까 능히 그럴 수도 있겠지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안도감. 제일 먼저 남편에게 당선 소식을 전한다.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은 나를 가장 많이 참고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다음에는 시 때려치우라고 구박한 시인 유홍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자존심 상해서라도 좋은 시 써서 복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로모 친구들한테도 참 고맙다. 끝으로 이렇게 당선소감을 쓸 기회를 주신 강원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세상에 자꾸 두들겨 맞다 보니 눈은 가자미눈이 되고 목은 자라목이 되는 중이었는데 옴매, 기 살아!” 이젠 짧은 목 길게 뽑아 하늘도 맘껏 쳐다볼 수 있을 것 같다.

 

 

 

푸른 빛이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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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 언어감각 놀라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20100여편이었다. 그중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이주상의 `풍금소리'와 박명삼의 `두타연', 정선희의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이었다.

 

`풍금소리'는 전통적인 삶을 소재로 묘사는 뛰어났으나 신선한 현대적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두타연'은 주제가 선명하고 묘사는 뛰어났으나 참신함과 현대성이 약했고, 추상적 어휘들이 장애 요소가 됐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은 흔한 소재인 `구름'을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인 언어 감각으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 돋보였다. 시의 생명인 리듬감도 잘 살려낸 것은 물론 개성적 발상이 놀랍고, 아이러니와 위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다만 시의 마무리가 다소 가벼운 느낌을 준다.

 

- 심사위원 :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이영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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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동네 / 박광희

 

 

뿌리 같은, 오래된 골목이 줄에 걸려 바동거린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이마를 맞댄 좁다른 풍경

TV 안테나선, 전깃줄, 빨랫줄들이 하늘을 묶은

제각각의 각도를 가진 도형들로 골목은 늘 무겁다

낡은 시간을 매단 전봇대, 습한 담벼락에 숨어있던

표적들이 나타날 때마다 한 뼘씩 몸집이 커지는

외등들, 거미는 가만히 자신의 넓적다리를 숨긴 채

낮고 좁은 골목길을 얼기설기 엮어 낚아챈다

돌돌 말아 고치로 엮어내는 솜씨는 놀랍다

어쩌면, 이 골목 사람들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줄의 포박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그깟 몸부림 쯤

진작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 그만인 것을

바람의 입질에 걸려든 젖은 골목들의 눈 속

허공이 공허할 수 없는 건 저 줄들이 만드는 유혹 탓

코르셋처럼 집들이 꽉 끼인 것은 줄의 팽팽한 긴장 탓

낡은 모서리처럼 표지가 뜯겨져 나가

내력조차 희미해진 이곳 사람들, 뻐꾸기시계처럼

때가 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가 울음 울면 그뿐

참붕어 같은 골목은 언제 줄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나지막한 허공을 저인망 줄들이 집들을 묶고 있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젖은 도형들이

허우적거린다, 골목이 환하게 열린다

일제히 미끼를 무는 붕어들의 입질

흰 와이셔츠 폐타이어, 화분, 방수천막지를 물어뜯는다

장마전선의 북상에 바삐 방적돌기를 부풀리는 거미

걸려든 집집의 내력들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동맥경화증에 걸린 골목, 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내게 주어진 소중한 길 이제 놓지 않을 것

 

 

 

 

[당선소감]

 

일상은 내게 호흡이었다. 시 또한 그랬다. 오래 덮고 살다가 언젠가부터 덮개를 열고 나온 그것은 차츰 내 일상을 점령해버렸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제자리를 만들고 있었던가 보다.

 

아직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보면서 어서 크기를 소망했다. 내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시에게 길을 활짝 열어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조금씩 성장 중이지만 이제 내게로 와 덥석 안긴 시를 끌어안아야겠다.

 

뒤늦은 출발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길, 이제 놓지 않을 셈이다. 절대 급할 일 없으나 결코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 본다. 늘 그래왔듯 새로 난 이 길을 오래 꼼꼼히 새기며 걸을 것이므로 스스로에게 그 책무를 지워본다. 아침부터 눈이 부슬부슬 내리더니… 이렇듯 좋은 소식을 안겨주려고 그랬나보다.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인내하며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 기쁨을 전하며, 주변 친지들과도 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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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 가운데 5편을 선정했다. 정정례의 `내력' 박명삼의 `빈센트 반 고흐의 귀' 강기순의 `미용실' 오영애의 `춘신 春信' 박광희의 `거미줄 동네'였다.

 

이 중 최종 세 편을 압축해 논의했다. `미용실에서'는 감각이 뛰어났고 일상적 삶을 노래한 것은 좋았으나 사유의 깊이가 미흡했다.

 

`춘신 春信'은 발상은 좋으나 주제의식이 명징하지 않았고 시적인 역동성이 약하여 평면성에 그치고 말았다. 박광희가 응모한 여섯편 모두의 수준이 고르고 특히 그중 단연 돋보인 작품은 `거미줄 동네'였다.

 

이 작품은 현실인식이 뛰어나고 상상력과 시를 구성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이 시의 후반에서 보여준 “소나기가 쏟아진 다음 골목이 환하게 열리는”이라는 이미지 묘사는 시의 전반을 지배하는 삶의 고달픔과 어두움과 공허를 반전시킨 점이 이 시를 더욱 빛냈다. 매우 우수한 작품이었다.

 

- 심사위원 : 이승훈 한양대 명예교수, 이영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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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굴장미 / 김영삼

 

 

저 불은 끌 수 없다

차가운 불

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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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의 詩는 제로… 100을 향해 달려간다
 
퇴근 준비를 하다가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내가 쓰던 작은 방을 망연히 걸레로 닦고 또 닦았다. 그러면서 대책도 없이 큰 일 저지르고 말았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詩 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농사법이 서툰데다 게으름까지 겸비하고 있어 나의 수확은 늘 초라하여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시 농사를 다시 지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터다.  시는 제로(0)와 백(100)의 싸움이라고 한다. 백이 아니면 나머지는 다 제로여서 중간이 없는 장르가 시라고 나의 스승은 항상 말한다. 나는 백을 향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늘 2%가 부족하다. 하여, 아직은 나의 시는 제로다. 당선 소식이 백의 목표까지 꼭 달려가서 소음이 아닌 귀에 즐거운 경적을 울려보라고 교부해준 임시면허증을 받은 느낌이다. 한적한 곳에서 부단히 주행연습을 하여 당당하게 대로에 나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임을 안다.  많이 부족한 글을 뽑아준 심사위원들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詩作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아내와 어머니, 착한 아들 다빈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강릉원주대학교 시창작반 문우들, 악당들, 냉정한 평가를 아끼지 않던 무명 비평가, 큰 힘이 되어주었던 홍종화 시인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참신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아

 

금년도 응모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작품 수는 많았으나 특출한 작품이 없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언어의 시들과 신춘문예라는 옷을 입고 등장한 작품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은 자칫 진실성이 결여되어 가식적이고 허영적인 글이 되기 쉽다.

이번 심사에서는 오늘 이 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시, 새로운 언어감각의 시, 그리고 신인다운 특성과 참신성을 높이 평가했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작품 중 오영애씨의 `흰 꽃이 지다'는 언어감각은 뛰어났지만 주제의식의 깊이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정솔씨의 `공룡능선'은 비유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당선작인 김영삼씨의 `덩굴장미' 외 `初冬'은 뛰어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았다. 

예를 들면 `덩굴장미'를 `차가운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또한 “자신이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라는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이었다. 주제의식 역시 보편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특히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상징성을 아이러니한 표현 기법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승훈·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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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41병동에서 / 김현숙

 

목숨 걸고 터를 사수하려는 사람들과 강제 철거로 문책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불길이 솟았다 강대병원 41병동 입원실에 누운 그녀의 마음도 이미 화염에 휩싸였다 산부인과 의사가 가랑이 사이 좁고 음습하게 숨어있는 그를 찾아내 명명한 것은 D25, 20년 동안 빈방을 먹고 몸집을 키워 집채로 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병실은 침묵의 선, 형광수족관 유리벽에 갇힌 여자는 영락없이 부레를 잃고 바닥까지 가라앉은 넙치가 되었다 TV는 밤낮없이 용산 강제철거 참사를 알리고 별보다 많은 눈물과 촛불을 쏟아내고 있었다 강제철거는 내 깊은 동굴 속에서도 일어났다 마취 4시간 만에 피주머니에 고인 D25는 몇 날 며칠 창자를 지나 억울하다고 빈터에서 울었다 화염에 휩싸여 죽은 용산참사 가족들이 TV화면 속에서 실신했다 불을 낸 책임이 넙치라고 했다가 꽁치라고 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그녀의 몸이 점차 수족관이 되었다 밤마다 몸을 떠난 부레가 허공을 날고 납작하게 엎딘 시간들을 물고 사라지는 갈치 떼가 보였다 스산한 야광을 구경하는 관객은 네모난 아파트와 깜박이지 않는 붉은 십자가들뿐, 그런데 왜 십자가는 약자들의 빛이 되지 못할까 크레졸 안개가 어지러웠다 가끔 배를 쥐고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은 투명한 해파리촉수에 찔린 손을 높이 쳐들었다 의사는 여성을 잃은 대신 생명을 얻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D25를 죽이고 그녀가 산 수족관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가장더 잃고 터도 뺏긴 그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신문이 말했다 그들에겐 죽을지언정 터를 지켜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별보다 많은 눈물과 촛불은 물대포로도 꺼지지 않는다 허공을 얻은 몸은 이미 바다가 되었을 테니.

※ D25: 여성의 자궁 속에서 자라는 근종의 종류


 

[당선소감] 詩 안에서 살고 詩 안에서 죽어야

등단이란 관문은 시인다운 시인을 가려 시의 고삐를 채워주는 의식이다. 시 안에서 살고 시 안에서 죽어야 그 고삐가 풀릴 것을 알기에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살면서 고통당한다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나쁜 것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무의식이지만 고통은 의식의 연속, 인간의 내면을 죽음보다 더 두렵고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절박한 고통의 순간이 내게도 찾아왔고 감내하는 마음으로 내면의 눈을 떠 세상을 보니 비로소 타인에 대한 고통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산부인과에서 여성성을 잃는 수술로 내 몸에 있던 생명의 요람이 철거되는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TV에선 용산참사 현장 화염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몸의 작은 기관 하나가 철거되는 순간에도 내 의지의 불꽃이 실존한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며 맹렬히 싸워야 할 실존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 시를 통해서 가진 자들이 만든 법이나 질서에 우선하는 생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미흡한 시를 뽑아 준 고명한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그분들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할 생각이다. 사랑하는 가족 재휘와 새미나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영광이 골고루 나누어지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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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작 대부분이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시의 형식적 요구는 만족시키고 있는 반면 상상력의 내면화나 깊이에는 미흡했다. 이는 언제부턴가 문화적 유행처럼 되어버린 시 쓰기 공부, 혹은 시인 만들기의 한 경향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 시단의 이슈였던 그로테스크 시와 환상적 상상력 혹은 가독성을 부인하는 시편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젊은 응모자의 새로움에 대한 시도와 함께 기존의 전통 서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생활고나 청년 실직자들의 좌절 등 현실과 세태를 반영하는 작품도 눈에 띄었고 함축의 어려움을 비켜가고자 하는 한 방편으로 보일 수도 있는 전반적으로 시가 길고 또 산문성이 짙은 경향을 보였다.

1,200여 편에 이르는 응모작 중 최종심의 대상은 신정남의 `인북천 피라미의 노래'를 비롯한 8편이었다. 그중 명순이의 `지각한 길'은 생을 조망하는 사유와 시각은 뛰어나나 다소 평이함에 머무른 감이 있고 김영삼의 `덩굴장미'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는 신선함이 돋보이는 반면 단정적인 표현과 상반되는 모호함의 혼재가 오히려 시의 진정성을 흐리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신정남의 `인북천 피라미들의 노래'는 생태적 상상력과 형식 면에서의 새로운 시도가 돋보였다. 그러나 관념성과 다소 교훈적이라는 측면에서 시의 리얼리티를 놓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 `산부인과 41 병동에서'는 개인의 고통과 사회적 병증을 병치시키면서 그 의미와 상징성들을 융합하는 역량이 괄목상대할 만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대성을 빈다.

 

 - 심사위원 이영춘 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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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1 / 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하다.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 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은유로 나는 고추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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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사람들은 수없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산다. 그 인연의 끈들 중에는 너무 오래돼 낡아서 끊어져 버린 끈도 있고, 벌써 끊어질 수도 있는 끈을 추억에 비끄러매어 잡고 있는 끈도 있다. 놓쳐버리면 삶이 무의미해지는 끈도 있고, 잡고 있을수록 힘을 주는 끈도 있다.내가 시(詩)라는 한 매듭을 달고 산 20년 동안, 거미줄에 걸린 듯 끊어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적도 있었고, 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것만을 안타까워했던 시기도 있었다.때로는 시에 너무 매달려 삶이 무거워졌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잡고 온 20년 동안의 시가 겉으로 보기엔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울했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은 기쁜 날 아는 형의 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이십여 년 동안 써 온 시를 줄줄이 묶어 혹 시집 한 권 내게 되면/ 책을 텔레비전 받침대로 쓰는 친구에게 꼭 줘야겠다./찌개그릇 받침으로 가끔 쓰는 아내에게도 한 권 주고. 갈 길이 멀기만 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헤쳐 나가야 하는 이 안개 속의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싶다. 그 길을 언제까지나 함께 가 줄 거라고 믿는 친구 권택삼과 이상문 형, 그리고 끝까지 나를 믿어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 주신 이승훈, 이영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말의 사다리 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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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독창적 구조 갖춘 수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한영서씨의 ‘나무 위의 아이’ 외 6편과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 그리고 유태안씨의 ‘관계1’ 외 4편이었다. 한영서씨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나무 위의 아이’는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동경하는 순수성과 추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면이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기존의 서정적 틀에 고착되어 있어 독창성이 미흡하여 새롭게 읽히지 않는다. 시적 언어감각과 어휘 선택, 언어 배치에 따르는 문장호응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4편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이었다. ‘오징어’는 선착장의 풍경으로 죽어가는 오징어를 통해 이 시대 삶의 알레고리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긴장감 있는 리듬감각과 상황묘사, 언어구사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화자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한 것이 흠결로 남는다. 독창성을 지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계1’ 외 4편을 응모한 유태안씨의 작품은 입체적 구성으로 TV드라마와 나와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이 ‘틈’의 장면을 절묘하게 매치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독창적인 구조와 시적 언어감각과 시의 생명인 리듬감각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미는데 쉽게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평범하고 안일한 소재선택이나 추상적인 시제들은 고려해야 할 요소들로 남는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더 큰 정진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이승훈(한양대 명예교수) / 이영춘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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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집 / 김정임

 

 

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굵은 밧줄 한 개씩 기둥처럼 세워서
수 백 개 다닥다닥 붙은 소라의 빈 집들
지금은 선홍빛 노을만 그물질하고 있어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밀물대신 갯내 나는 뻘밭을 메워가고 있어요
소라의 그물망을 드넓은 바다 어장에 던져두면
호기심 많은 쭈꾸미가 소라의 빈 집으로 스며든다 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능소화빛으로 색칠한 대문을 열고
미로같이 꾸불꾸불한 계단을 내려갔을 테지요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는
아득하고 속이 깊은 방으로 스며들어
제 꿈을 익히곤 했을 소라의 집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꿈의 한 가운데를 현처럼 긋고 나가곤 했겠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소라의 빈 집이 나를 자꾸만 끌어 당겨요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쭈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붉은사슴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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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빛을 얻은 언어의 새벽

 

오늘은 시가 내 안의 어둠을 말끔히 털어내며 내가 소망하는 경이로운 당선소식을 가지고 왔다. 

갑자기 울컥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한 덩어리의 붉은 슬픔. 

아마 중간 중간 너무 멀게 느껴져 무릎을 꺾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때의,

참담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예고 없이 경쾌하게 날아든 당선소식에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내 안에 깊숙이 숨겨진 상처와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아직 흰 종이에 담아내지

못한 언어들이 탄력을 받게 될 것 같다. 
용기와 힘을 얻었으니 채찍으로 알고 더 열심히 써 나가겠다. 
부족한 글을 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시의 아름다운 문장에 처음 눈뜨게 해 주신 문효치 선생님, 시의 삶을 직접 실천하며 보여주신

박제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를 고민하는 나의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마사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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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진정성으로 정제된 단아한 멋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올라온 열일곱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권혁찬씨의 ‘노트북’ 외4편과 김정임씨의 ‘소라의집’ 외 4편이었다.

권혁찬씨의 작품들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능력이 있고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공을 들인 문체에서 만만치 않은 문학적 역량이 느껴진다.

선이 굵고 리듬에도 탄력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산문적으로 읽힌다.

시는 확산의 문법이 아니라 응축의 문법이고 생략의 문법이면서 여백의 문법이다.

언어를 최소화하는 과정 뒤에 남는 광채나는 보석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이 좀더 정제되고 표현의 광채를 획득하기 바란다.??

김정임씨의 시는 단아하다 절제에서 우러나오는 응축의 힘이 있고 활달한 어조는 아니지만 작품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감정의 과장없이 조심스럽게 망설이듯 전개되는 그의 시들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깊이 각인되는 예리한 이미지들은 그의 시의 독특함이자 매력이다.

당선작 ‘소라의집’에서 확인 되듯이 노련한 장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인에게 요구되는 패기나 대담함 출렁거림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그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 심사위원 : 김창균, 이영춘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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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여인숙 / 김영식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 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漁撈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이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은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당겨 덮는다

 

 

 

숟가락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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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해안선 같은 차창으로 어둠이
숭어 떼처럼 참방참방 밀려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먼 곳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겨울 들판 같은 내 안의 나를 만나러가는 길이었을까요.
마을의 불빛들이 따뜻하게 엎드린,
수평선을 닮은 산자락 어디쯤 나도 흘러가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
해조음인 듯 낯선 음성 하나가 귓바퀴를 파고들었습니다.
잠시, 그리고 오래 목이 메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울러 속이 빈 제 시의 항아리에 형형한 눈빛과 생기를 채워
세상 밖으로 출렁이게 해주신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들과 문창반 문우 여러분 그리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따순 눈동자로
지켜보아주신 여러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낮게 걸린 저 불빛이 어둠의 심해를 건너가듯
뚜벅뚜벅 시의 행보를 쉼 없이 내딛는 것으로 보답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심습니다.
밀물에 밀물이 섞여 만조를 이루듯
어둠이 먼저 온 어둠에 살을 섞고
은하를 흘러가던 별 몇 개도 내려와 발목을 담급니다. 별들의 굽은 등뼈가 둥글게 빛납니다. 나는
오래 이 바닷가에 앉아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심사평]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 외 4편과 박창호의 `오십견'외 4편이었다.

박창호의 시는 일정한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체가 담백하고 과장된 진술이 없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씌어진 듯한 그의 시들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다. 상실감과 회한과 생의 덧없음, 차분한 어조는 시의 내용을 실감나게 하면서 독자를 숙연하게 하는 조용한 힘이 된다.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감상성은 그의 시의 큰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문 마늘을 먹으면/ 아버지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같은 진술이 그렇다. 감상을 절제할 수 있는 냉정한 가슴, 객관의 자리에서 세계를 응시하는 차가운 눈이 필요하다고 본다.

당선작으로 뽑은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은 선이 굵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이 있고 사물들과 자신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와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같은 묘사도 빼어나지만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같은 표현은 탁월하면서도 참신한 맛과 멋이 있다. 신인에게는, 그리고 문학에는 독자를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는 이런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소라 여인숙'은 표현에 공을 들이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무척 신경을 쓴 작품이다. 그러나 함께 응모한 다른 시들은 `소라 여인숙'과 다소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썩은 생선들과 고래냄새, 그리고 범죄와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신인의 독특한 시시계를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 심사위원 : 김영기·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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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무살의 열차 / 이병철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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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동양전통은 말에 대해서 가혹하다. 그것은 말의 불완전함을 단정하고 있다. 동양에서의 말의 사건은 이미 종결처리된 사건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여질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예 말 자체를 버려버린다. 정말 냉정하고 과격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상대적인 것만 표현할 뿐 절대적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노자의 사상은 도교적 미의식뿐 아니라 동양의 미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 할 수 없다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심사하는 과정에서 노자의 미의식과 공자의 미의식 사이에서 고민했다. 말해지지 않음을 극복하는 사유의 깊이와, 말해야 하는 인식의 철저함이 아쉬웠다. 그것은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강한 작품은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시어의 독특함이 부족했고 시를 잘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들은 인식의 철저함에서 오는 성찰이 부족했다. 사유가 생각의 논리적 전개라면 철저한 인식은 사유를 깊고 절실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박창호씨의 `표류'는 끝까지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시를 만들기에 급급해 내용이 형식을 얻지 못하여 표류하고 있는 게 흠으로 지적되었다. 그 반면에 정경희씨의 작품들은 사유와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이미 기성시인이었다. 그러나 페이소스 가득한 스냅사진이란 혐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을 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이병철씨의 `여행, 스무살의 열차'는 기성의 어떤 유행에도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주목했다. 상황에 대한 묘사와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져 개인적인 삶의 어느 한때를 보편성 있게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크게 아쉬웠다. 시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말은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솔직함이란 지금의 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부정의 불온성이야말로 시를 시대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 만드는 근거이다. 우리는 그 근거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심사위원 함성호·서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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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최재영

 

 

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 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깨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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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수련과정 거친 솜씨 탁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이번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전국 시인 지망생들이 무려 2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낸 1,500여 편의 시 작품 중에서 오직 한 편만이 당선작으로 뽑힌다. 그래서 시인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시인이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갖는다. 

예선을 거쳐 넘어온 12분의 작품 중 조용숙, 최재영, 심은섭, 이순주 씨의 작품들이 최종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네 분 다 일정한 수준에 이른 작품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논의 끝에 최재영 씨에게 당선의 영광을 안겨주기로 하였다. 

심사 위원 두 사람이 무엇보다도 관심을 둔 것은 시의 완결성과 참신성이었다. 시의 완결성이란 곧 시의 구조적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시는 특히 독자 공감의 의미 구조화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참신성이란 언어 선택과 언어 조합에서 느껴지는 시적 탄력을 말하는 것으로, 신인으로서의 신선한 언어감각과 문체의 힘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 분의 시가 모두 부분부분 구조적 오류와 진부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선택이 어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최재영 씨의 작품은 많은 수련 과정을 거친 솜씨가 돋보였고, 시적 완결성과 참신성 면에서도 높은 가능성이 인정되는 것이었다. 축하하며, 치열한 분석적 성찰을 통해 보다 좋은 작품 창작에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낙선한 분들이 가진 가능성도 매우 큰 것이었다. 도전 의식도 좋고, 상상력도 남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부분과 전체를 관계 짓는 안목에 미숙함이 보였다. 스스로가 지닌 시적 결함이 무엇인지 살피는 ‘눈’을 형성하여 새로운 창조적 도전 있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 심사위원: 신승근, 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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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입 / 신유야 

 

 

이사하기 삼일 전 미리 빈 집을 둘러보았다

물은 잘 나오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일행과 나누는 소리가 벽에 퉁겨 되돌아왔다

이사를 하고 살림의 자리를 정해주고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살림들이 소리를 먹고 있었다

집들이 손님의 왁자한 소리를 먹고

소리 몇 개는 아래층으로 흘러 경고를 듣기도 했다

살림들이란 주인의 소리를 삼키며 둥글어지는가

어떤 밤이면 내 말이 맞다며 딱, 무릎 치는 낡은 장롱

어릴 때는 이 소리가 무서워 어머니 가슴팍을 파고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어머니 무릎에서도 이 소리가 났다

어머니 쓰시던 문갑에 등을 대고 잠들면

겨울날 옷 속에서 훅 솟구치는 살내 같은 것이

이마를 가만히 짚어 오기도 하고

살림의 틈서리, 수천의 입으로 삼킨 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30년 후 내 딸아이의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인가

구들장처럼 식지 않는 몸의 온기

나이기 이전의 생부터 천천히 데워 온

어머니의 장작 같은 손바닥을 찾아간 것인가

새 집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20년 전의 어머니와 10년 후 딸아이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을 생각한다

잠든 척 가만히 오래 묵은 살림의 그림자

길게 목을 빼고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당선소감]

 

어둠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빛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동안에도 내 안에 웅크리고 앉아 세상을 더듬거리게 했다. 생각의 끝으로 더듬어지는 것들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두려워하고, 뒷걸음쳐 도망치다가도 어둠에 걸려 휘청거리는 일이 배멀미처럼 나에게는 어둠 멀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멀미도 오래 견디다 보면 이력이 붙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별이 하나 둘 보이고 그 별빛이 어둠이 슬며시 내미는 손으로 느껴질 때는 더듬거리던 생각의 끝이 환하게 젖어 드니 말이다.

 

아침부터 나물을 다듬고 찌짐을 붙이며 제사음식을 막 마무리 지을 무렵 전화를 받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먼 곳에서 어둠 속을 헤매다니느라 수고했다며 잔치를 벌여주실 생각이셨을까.

 

잘 알지 못하는 어둠을, 어쩌면 영영 잘 알지 못한 채 남게 될지도 모르지만 겁내지 말고 들어가 보라는 격려의 말씀을 오늘 밤에는 하고 가실 것 같다.

 

그리운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고마운 사람들의 손을 꼭 잡고 싶다. 그 사람들에게 된장찌개라도 맛있게 끓여 맛있지? 맛있지? 묻고 또 물으며 그릇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서로의 숟가락을 부딪치고 싶다.

 

많이 부족해서 힘이 난다면 우스운 말이 될까. 가슴 가득 힘을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강원도의 눈길에 내 발자국을 꼭꼭 찍어보고 싶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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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어떤 원로시인이 요즘 시인들은 자신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해마다 응모 편 수는 늘어도 올 신춘문예 역시 문학적 분발이나 열정 같은 건 찾기 어려웠다.

 

응모작의 특징을 몇 가지로 분류해보면 우선 그 내용에 있어서 격랑하는 세계의 모습이나 당대를 아우를 만한 서정성을 다룬 작품이 드물었다. 공허한 말 잔치나 미시적 내면투시의 현상들은 오늘의 문단의 반영일 것이고, 응모의 형태면으로 볼 때 여러 곳에 투고하기 때문에 작품 수가 모자라 그런지 제일 앞에 놓은 그럴싸한 작품 한 두 편을 빼고는 제대로 된 작품이 없는 응모자가 많았다. 이것들은 이른바 `선수'들이 요행을 바라고 하는 일 일텐데 문학에는 요행이 없다. 종합해보면 응모자들 대부분이 문학을 매우 가볍게 혹은 장난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터넷 글쓰기의 영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시인은 세상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하라고 붙여준 아주 오래된 이름인데 이 이름을 얻겠다는 이들의 진지함이 아쉬웠다.

 

예선에서 넘어 온 17명 중 마지막까지 남은 건 신유야 조혜경 최선호 강전욱 노미경 다섯 사람이었다. 노미경은 행마다 거리 풍경이 가득한데도 왜 `눈사람'이 무기력하게 읽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으면. 강전욱의 시편들은 따뜻하고 능청스럽고 재미있다. 그러나 산문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최선호의 `희망 한품'은 똑 떨어지게 된 작품이다. 그렇지만 여타의 작품들이 그 점수를 깎아먹고 있다. 기행시들이 지니는 상투성이 문제이긴 하지만 조혜경은 `사북을 지나며'가 특히 좋았다. 마지막으로 신유야의 작품 중, 첫 번째 연의 난삽함만 아니었다면 나는 `겨울로 가는 길'을 당선작으로 뽑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 이사 갈 집에 먼저 가서 거기서 살다간 사람들과 살아 갈 나의 생과 삶, 그런 속삭임들을 빈방의 반향에서 들어보는 `살림의 입'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거기에 인생이 들어 있어서였다. 모든 응모자들의 정진과 대성을 빈다.

 

- 심사위원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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