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응어리 / 김은
상자 안에 넣어둔 접질러진 종이 하나가 운다
흫건한 상자가 가슴의 문을 열자
눅눅한 창문에 나라는 사람이 새겨진다
김 서린 손가락으로 한 글자 서툴게 남기니
이번엔 나라는 글자 하나가 줄줄 흘러 운다
내 책 속 곰팡이를 향수병에 모두 담아
동화 속 아이처럼 하염없이 착하게 누그러진다
타다 남은 촛불 하나 생경하게 당겨진 시큰한 밤,
방이란 상자에 담겨 가슴을 톡 접질린 내가
축축한 얼굴로 그 미운 종이를 펴면서
천년 별빛을 타고 흐르고 또 흐른다
멸종하지 않는 바다처럼
멍울지는 이 더운 시간 속에
[금상] 갈고리 / 김희철
언제부턴가
그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유압프레스, 밀링, 선반, 사출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한숨소리를 삼켜버렸다
소리가 잘라버린 건
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소매 안에서
조심스럽게 칼을 꺼내었다
그것은 스치기만 하여도
자구만 가슴을 찌르려했기에
칼집 속에 숨겨두어야 했다
그는 칼을 들고 육교 위로 나갔다
사라진 팔의 빈자리는 너무 무거웠지만
행인의 시선을 단번에 베어낼 만큼
칼은 날카로웠다
바람마저 자를 수 있다는 듯이
소맷자락을 철럭였다
양은 냄비는 베어낸 소리를
쉴 새 없이 보여주고 돌려주느라
쉬이 닳아지고 찌그러졌다
구두쇠의 무딘 소리까지 베어지자
아주 쭈그렁이 되고 말았다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자 스윽 날이 보였다
[은상] 열망 / 황정민
물이 끓고 있다
단 한번도 드거움을 몰랐다는 듯,
그 열망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저 혼자 속으로 삼키고 있다
그러내는 것이 쉽지 않은 생,
조금만 넘치면 스스로도 견딜 수 없는
외부의 소란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절벽 같은 나날 속에서
또 다른 절벽으로 뛰어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때
물이 저 혼자서 끓고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
그 속에 사람이길 포기한 한 마리 짐승이
괴로워하며 물이 끓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고약한 열망이 힘겹게 그를 짓누를 때
짐승은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
끓는 물 속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고통스러움도 모른 채 물은 끓고 있다
[은상] 윈-윈 하는 법 / 박진호
1
아내이 늦은 외출은 사십이 넘어서 시작된다
하루세끼 먹고사는 고만고만한 일상
딸아이는 혼자 6급한자 자격시험 준비를 하고
늙은 장모는 소파에 누워 천수경을 외운다
시방세계에는
곳곳마다 부처가 있어 몰래 연애질도 하기 어렵고
예전에 벌써 버렸어야 할 낭만콘서트의 추억 되새김질
가당찮게도 첫 월급을 작부에게 던졌던 흐린 기억 탓에
기적처럼 바라는 유치한 것들이 내겐 어디 사랑뿌이랴
아무리해도 되돌아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젠 버린다, 관솔나무 마른 옹심으로 입 꽉 다물고
사리처럼 굳어진 그 욕망의 결정들을 부숴버린다
2
아내의 늦은 외출은 표정이 없다
카트라이더 게임을 하는 큰 놈은 제방에서 꿈쩍도 안하고
장모님 오늘밤에는 독경을 낮추세요
만만한 둘째 딸아이를 옆에 앉혀 자동차의 시동을 켠다
반즘 아카시아 숲으로 가려진 월드컵 기념공원
사바는 환청으로, 붉은 악마 가로등이 넘실거리고
달빛받아 잠든 아이의 얼굴은 사십대 중년남의 베이스캠프
검진 유소견자, 사후관리 대상으로 정밀추적 요함
파란 색깔의 건강검진 결과 통보서는 아내의 최후통첩이다
이제 쌍방과실이면 이놈의 어지럼증도 윈-윈 소리를 멈출까
쌍춘년 올 가을, 20년 장기근속으로 제주도 여행이 있다는데
사바응로 불을 밝혀 신전처럼 창백한 실내체육관 계단에서
이것저것 궁리하다 곤궁하고 멋쩍어져
나는 아내의 댄스스포츠 동호회 모임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동상] 철거 / 구기순
까치가 운다
겨우 나뭇가지 하나 들어냈을 분인데
펄쩍펄쩍 공중을 벌려대는 날갯죽지 사이로 정오의 파란 하늘이 금갔다
다시 사내의 손이 뻗치자,
이 무슨 날벼락이더냐고 생피 같이 쏟아내는 울음소리
전봇대 옆 구두 닦던 아저씨 나와 혀를 끌끌 차고
사내는 서둘러 까치집을 뜯는다
빈 전봇대에 집지은 괴밖에 없는 부리로 깍깍 항의하던 까지
맞은편 PC방 옥상으로 날아가
마지막 한 개비의 추억까지 똑똑히 바라보는 그 연한 눈망울 속으로
절정의 봄날이 으스러지고 있다
5분만에 내려온 사내는 한전 차량용 크레인 타고 부웅 떠나고
사람들은 어디로 바삐 가고들 있을까, 우리 모두는
잊는다는 것에 익숙해 바람처럼 흩어진 거리엔 금방 여름이 밀려오고
눈앞에서 빼앗긴 보금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허공을 빙빙 맴도는 까치여 숯으로 날아가
차압도 경매도 없는 숲으로 돌아가
다시 둥지 틀고 사랑해도 우린 아직 늦지 않다
[동상] 논개의 마지막 편지 / 천선자
어머니
엊그제부터 내린 조선 백성의 눈물같은 비가 그쳤습니다
무섭게 불어난 강물이 이따금 휘모리를 만들며 흘러갑니다
바람 한 점 불때마다
나뭇잎에 맺힌 울음 끝 여음 같은 빗방울들이
남강으로 후드득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덕천 강을 거쳐 흘러 온 이 물속엔
어머니의 살 비늘이 섞여 있겠죠
고향집 앞산에 내려앉던 우수 깊은 구름
울타리가 앞 다투어 피던 봉숭아 붉은 속살
혓바닥이 검도록 따먹던 뒤꼍 뽕나무의 달콤한 오디
모두가 그대로인지요
[동상] 그가 짓는 집 / 김일호
남루한 삶의 끝자리에 그가 터를 잡은 곳은
산이 어슬 어슬한 한기를 피해 내려온
햇살이 노루 꼬리만큼 남은 서산 기슭이었다
언제나 기댈 데 없던 마음 한 채
들여 놀 집 생각하다가
쉰이 넘도록 꼬이기만 했던 내장 같은 줄자
잡아 마음 앉을 품을 잰다
평생 떨칠 수 없었던 근심 네 귀퉁이에 내려놓으며
구부러진 마음허릴 세워본다
벽돌 쌓아 바람을 막고 펄떡 거렸던 핏줄 다독여
구들장 밑에 숨죽여 깔며
숭숭 들락거렸던 생각들 앉혀 보는 것이다
혹시 근심 새어 들까 황토 흙 구석구석
채워 다지며 기왓장 한 장씩 올린다
허리에 두 손 짚고 집안 구석구석 다시 재어 보다
아무래도 마음이 외로울 거라
처마 끝 제비 한 마리 잠재울 생각도 하고
끊지 못할 세상일 궁금할 것 같아
산그늘 시작되는 곳에다
새집 닮은 빨간 우체통 세워둔다
[동상] 농막 / 금은종
비오는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니
아버지의 농사가 생각납니다
긴 삽자루에 밀짚모자 하나면
타고난 비옷 젖거나 말거나
마른 논에 환하게 물 들어갈 때
어린자식 입에 밥숟가락 쑥쑥 들어갈 때
황새목이 되어 입매가 귀에 걸리던 당신
하늘 울음 시작하면 물꼬터라 물꼬터라
물 묻은 목소리 내 가슴속 강물처럼 흐릅니다
버려진 다랑논에 삽날 깊숙이 속을 뒤집다가
이 허기진 논바닥을 어떻게 건너
칠남매를 먹여 살렸을까
진흙 속에 빠지는 발만큼 땀이 눈을 파고들어
당신의 삽질 절반도 못미쳐 허리마저 아파옵니다
툭툭 갈라진 당신의 다랑논을 생각하면
농막 안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당신의 땀인 듯
그친 비 씻어넣은 석양 속으로
긴 삽자루에 걸린 논둑길이 아물아물
황새가 된 당신의 영혼 끝내 물꼬를 터는지
청산에 묻힌 농막 안이 축축이 젖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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