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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생명 / 이재일


오늘 하루도 바지랑대끝에 질긴 목숨 걸었다

무리하게 당겨진 련악기의 줄처럼 긴장한 사위가

핑핑 쇠울음 운다

산다는 게 그런 게야

너무 당겨지면 줄도 푸른 날이 서서 심장 베이고

느슨하면 희미하게 녹이 슬어버리지


누울 자리 찾아 가파른 산길 오르던 아버지 헉헉 폐기종 고단한 사람 등굽은 세월을 떼까치 물고 간다 뒤를 따르던 눈에 산색이 짓물러 내려 앉았다 길이 아니었다 가시덤불, 칡넝쿨, 남은 세월 질긴 고리 시퍼런 낫날에 피 푸른 피 뚝뚝 흘리며 널부러진다 만들어진 길을 가다가 마지막으로 작은 길 하나 내는 것이다 부러진 길 이어 붙이고 패인 길 메우며 무슨 후레자식 부귀 영화 꿈꾸며 아버지는 저리도 가파른 산을 마냥 눕히려 하는가


바지랑대끝 긴장한 목숨이 핑핑 현울림소리 낸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소리

떠날 자와 남아 있을 자를 구분하는 저 울부짖음에

산이 돌아눕는 사이 쨍하니 하늘에 금이 간다

위태한 목숨이 움찔 놀라 허공을 움켜 잡는다







[은상] 모슬포 기행 / 윤혁


1

5월 모슬포는 밀감꽃 머리 꽂은 열세 살 계집

눈빛 한 번에도

가슴을 다 여는 부끄러움바닥까지 누가 시켰는지 쪽빛 화장

언제부터였을까 모슬포의 첫사랑은

감귤향기 피워올려 기웃거린 한라산

제 가슴에 비치면

지난 밤

선녀가 내려 온 백록담을 살포시 껴안고

휠휠 벗어던진 비단잠옷 안개 때문에

아니다

5월에 펼쳐 찬미하는 유채꽃에 수정반지 끼워주면

안달이 난 모슬포는 하얀 물보라 일으켜

속치마 뒤집는다

변덕쟁이 제주바람도 모슬포 짝사랑에 깊이를 몰라

덩달아 포구를 갈아엎는다


은갈치 기행 때문에

마지막 일기예보 '파고주의' 설친 밤잠


모슬포에서 늦은 아침상의 칙사 대접은

하얀 면사포 쓰고

엉덩이 펑퍼짐한

다소곳 쟁반에 앉은 은갈치 뿐이라

순하디 순한 그녀 옷고름을 풀고 살맛을 보았을 때

밤새껏 풍랑과 싸운 어부의 일기 한 토막

황송스럽다

안개비는 점차 무겁게 오다가

제주 삼다와 부딪혀 외항 쪽으로 이동하더니

포구에 막대기 두 개 하나는 비스듬히 걸친다

저녁 무렵을 알 리 없는 나는

언제쯤 안개비가 한라산으로 올라갈까요

안달에

주인장의 느긋한 미소


2

통통배의 뱃길은 따로 없었다

이제부터 광대놀음 줄타기가 시작되고

파도의 골 따라 미로같이 헤맨 지 

육지는 망망대해가 삼켜 버렸는지 어둑한 자녁

어부의 넋을 찾아 헤매던 바다새도

깃을 접으려 우도로 가며

왔던 길 잊지 않으려는 박음질소리

통통거리는 발동기소리만 풍랑 위에 한 마리 새가 된다

이어도 어디쯤 생과부 애달픈 청승소리에

출항할 때 아낙이 실어준 가슴에 멍울

이끼 대신 멍울을 던질 때마다 바다가 요동쳤다

무표정한 어부의 주름살골마다 바다의 깊이가 새겨져 있어

마음 한 구석마다 바다와 닮지 않은 곳 있으랴만

은갈치의 행방은 묘연하다

만선할까요 계면쩍은 질문에

이빨에 끼인 질긴 소리로 은갈치의 혼백만 건질 때가 많지요


방랑자처럼 떠돌다 멈춘 곳

심청을 달라고 떼를 쓰는 풍랑

지난 날 대신 뛰어든 젊은 어부의 아낙만 서러운

집열등 창백한 바다 가장자리

마술하듯 집열등 선체를 감추면

삼각 파도에 숨어 붉은 눈알로 은비를 다듬다

날씬한 몸매

어부의 삶보다 더 날카로운 낚시에 걸리고

어부는 액자에 들어갈 사진이 좋아야 한다며

파도를 물고 있는 허연 은갈치를 번쩍 들어올린다

집열등 마지막 혼백이 바다에 빠지고

해신이 있기는 한 지

집집마다 매달아 논 오색 깃발 그 흔들림의 수평선에 붙박이가 된 아낙

수평선 먼동 속에 아스라한 차전이 온다

은비늘 만선

모슬포는 파시가 될 때까지 물새들 축하 비행

모슬포는 외도다

늦은 아침을 먹으면 은비늘 접시에서 내내 풍랑이 이는 것 보인다


* 갈치 : 비속어로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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