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대상] 그 해 겨울, 우리가 찾아 헤맨 과녁은 / 허남훈

 

서툰 한국말로 가족, 이라고 형이 말했을 때

술잔은 이미 넘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손을 거둘 수 없었다

가지는 없고 옹이만 남은 겨울의 끝

형의 손가락은 변압기 공장 어느 구석에 플러그처럼 꽂혔있을까

주머니 속에 움켜쥔 주먹은 더 작아져

어제 도망간 사장의 멱살을 잡아끌 기운도 없는데

누렇게 변색된 사진을 꺼내 보이며

소리 없이 웃는 그 표정이 싫어

형은 이제 버려진 거라고

여기에 남을 수도, 떠날 수도 없지 않느냐고

금방 후회할 말을 뱉어버린다

실내포장마차 낡은 백열등 아래

미아 찾기 전단지의 흐릿한 미소만이 떠다니는 밤

가족을 위해 더욱 한국인이 되어야 했던 형은

눈이 그치면 언제 축구나 하자며

내 어깨를 짚고 일어선다

그 텅 빈 손을 잡고서

아프가니스탄 카불 스타디움에서 어제

24년만에 FIFA 공식 경기가 열렸노라는 기사는

끝내 전해주지 못했다

 

 

 

 

 

 

 

[금상] 붉은 손톱 위로 내리는 눈 / 신민철

 

손을 펴 보면

피로 얼룩진 손톱처럼

잊힌 듯이 눌려 있다가도

어느 틈엔가

살을 비집고 나오는 거대한 몸부림

그 붉은 광주와 마주 치곤 한다

 

잔뜩 붉어진 꽃잎을 던지며

아듯히

두 손 가득 눈이 내린다

지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견고한 뱍을 뚫고 흐르는 손금

5월의 광장은 

당시 가슴 날리던 총성과

눈물처럼 쏟아진 최루탄의 최후를 기억한다

포탄을 받으면 받은 만큼

광주는 무덤을 올렸다, 무덤가 지칠 줄 모르게

엉켜 버린 띠가 증거하는 건

실핏줄처럼 터져 버릴 그리움이다

손으로 날카롭게 베어드는 내 그리운 영혼들이다

청춘은 넓은 잎을 잠시

앉았다 가는 푸른 상처지만

보라 후끈거리는 열기를

무덤가로 더운 입김을 내는 끈질긴 생명을

광주는 그저 숨 쉬고 싶은 거다. 다시는

 

연하디 연한 속살 베이지 않도록

갑옷 같은 손톱을 덮어쓰는 거다

부패된 어둠을 밝히며 붉은 꽃은

탄환 맞은 상처로 흐르고

환생의 무덤 위로 잦아든 야생의 빛

비상은 꿈꾸는 게 아니라

길이 되어 준 시간을 밟고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이다

 

난무하는 시간은 땅위의 모든 것을 쓸어버렸지만

난 보고 있다, 두 손 가득

겨우내 긴 숨을 생명의 입술로

푸-

터트리는 꽃의 숨결을

 

세상을 가늠해 보는 손짓이

무덤 가가이서 흔들리고 있다

손가락에 각인된 붉은 손톱

손때 하나 타지 않은

12월 내 광장 위로 눈이 내린다

 

 

 

 

 

 

[은상] 11월의 오솔길 / 윤영기

 

새벽 어스름에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축축한 공기 속에 잠이 덜 깬 나무들은

밤새 발밑에 잎들을 수북이 쌓아놓았습니다

단풍나무는 빨갛고 노란 작은 손바닥으로

촉촉한 바닥을 쓸어보고

플라타너스도, 후박나무도 커다란 손으로

햇볕도 이슬도 더 많이 받으려고

이제는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뼈 드러난 손등로 하얗게 널려 있습니다

 

가을의 첫 햇살이 이마에 닿았을 때

나무들은 이미 알았습니다

잎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얼룩진 손들을 매달고

찬바람 속에 수치스럽게 서 이ㅛ어야 한다는 것을

한겨울 지낼 곤충들의 이불도 될 수 없고

봄을 위한 밑거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먼저 잎을 다 떨구는지 내기라도 하듯

툭툭 잎 던지는 소리 한가득 11월의 새벽

엉킨 숨소리 고르며 오솔길을 따라가면

작은 것 하나 버리지 못하는

제 마음에도 어느새 평화가 고여 옵니다

 

 

 

 

 

 

[은상] 며느리밥풀 꽃 / 박함규

 

바람이 건넨

슬픔 빛 언어

 

며느리밥풀 꽃

치마폭 햇살에

 

앙상한 세월 담그며

온종일 비탈진 밭을 허기로 메고 있다

 

서러움 꼬옥

묶은 허리띠

 

조여 매며

굽이굽이 목이 지던

뒤척이며 잠들던 꽃

한평생 인고의 눈물 새김질 하는 생애

 

몽긋이 매달린 사랑

시리도록 환하다

 

말라버린 눈물에

수줍도록 피어나

 

어머니 가난한 뒤란 물들이던 며느리밥풀 꽃

 

 

 

 

 

 

[동상] 고향의 추억 / 이병희

 

토끼재* 가는 길

찰나를 거꾸로 되돌린다

 

흔들리며 다가오는 기적소리

허공에 시간을 풀어 놓는다

 

추억들은 조롱박처럼 매달리어

세월은 바람에 흔들리고

 

직선으로 다가와서

유유히 곡선으로 떠나가는

 

논두렁 배암 생각에

온몸이 허물을 벗는다

 

메뚜기 놀던 자리에

하늘 그림자 내려 앉고

 

새들은 부지런히

삶을 조각하고 있다

 

한일지를 수 놓으며

가슴 속에 불을 지른다

 

알랑산 넘어온 구름은

미내다리 건너면서 바빠지고

 

아버지 머리 위에선

들꽃들이 춤을 추고 있다

 

참다운 행복은

아버지의 그 평범한

 

이웃을 위하는 마음

그냥 그 삶 속에 있음을

 

거짓없는 순박한

그 웃음 속에 있음을

 

길섶의 할미꽃들이

고개 숙여 읊조리고

 

한 마리 파랑새의 비행

둥글게 둥글게

 

거품 흘리는 황소의

수레바퀴처럼

 

 

* 토끼재 :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방축리 4구의 마을 고유 이름

 

 

 

 

 

 

 

[동상] 어머니의 남해바다 / 이형철

 

1

주름깊은 얼굴에서 늙은 아침을 구워보낸

어머니의 남해바다가 택배로 보내졌다

매번 시키지도 않았던 돌출행동의 어머니

 

단단하게 묶인 끈에는 무슨 방식이 있으랴 했건만

옆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끈을 잘라야 한다며

급하게 부엌칼을 내민다

 

나는 고집스럽게 내가 꼭 풀고야 말겠다며

옹이 매듭이 어머니의

암호가 이어져있음을 알고서 그 끈을 쉽게 풀어버리자

아내는 멍하니 칼날을 쳐다본다

 

2

비린내가 풍기는 라면상자 안에는

세월의 검은 버섯같은 어머니 얼굴도 피어있고

수평선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그 바다의 햇살도

고운 햇살처럼 널려져 있다

 

손목을 둥그렇게 흔들거리며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생선비늘처럼 반짝이는 남해바다의 철벅거림

 

간간함이 뿌려진 생선의 뱃살과 아가미

가라픈 파도에 푸드덕거리는 표정과

싱싱한 횟감이 가슴에서 출렁거렸다

 

라면이란 글자가 거꾸로 씌어진 택배박스

남해바다의 풍경이 들어 올려졌다가

소리없이 내려앉는다

 

 

 

 

 

 

 

 

[동상] 봄나들이 / 문경철

 

울안 나무들이

안개의 면사포를 하늘로 날리고

알몸의 비명을 질러대는 휴일

밀린 작업복을 세탁하던 아내는

눈처럼 내릴 벚꽃의 안부를 되묻고

아이들 둥근 눈매에도

푸른 방적돌기를 거친 외출이

긴 거미줄로 뽑혀 나옵니다

일주일치 품삯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간절함 묻은 빗장을 열자

성근 움 틔우는 야생의 환호,

빈혈성 오후가 노랗게 익는

봄나들이 길 끝까지

쑥 내 나는 사랑 하나가 따라옵니다

밑불 끄지 못한

도굴 당했던 얇디 얇은 온기가

자꾸 부끄러운 몸속을 하고듭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