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나팔꽃 / 김희정
스물보다 몇 해 더 산
어린 시동생은
나를 잉태해 불어난 엄마의 배를 보며
조카를 얼른 만나고 싶다고
형수님 배 만져봐도 되냐고
담벼락의 붉은 나팔꽃처럼
수줍게 얼굴 붉히며 물었다지
아마 그즈음에도 이렇게
가금 바람 불고 비 내리고
해가 쨍쨍했겠지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 살
엄마 뱃속에서 몸집을 키워나갈 동안,
육사에 막 입학한 삼촌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거지
시집살이에도 도시락 싸주며 공부시켰던,
착하기만 했다던 시동생을 떠나보내며
엄마는 뱃속에 나를 이유로
양껏 울 수도 없었다지
형수님 많이 울지 말라고 그때 떠난 건지,
매번 궁금했다는 걸
아무도 모르지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매년 현충일 국립묘지를 찾을 때면
내 일 년 치 생활과 갖은 상념 젖은 편지
가족 몰래 묫자리 위에 올려놓고
삼촌이 다 읽겠지, 뒤돌아보며
매번 구원받았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그가 떠난 계절에 피는 나팔꽃 꽃말은
기쁜 소식, 결속, 덧없는 사랑
꽃말 따라 살다 간 것 같은 삼촌
매해 이 계절에는 그의 나이 세어보며
흑백 사진 속 얼굴에 주름 하나 더 새겨넣네
창틀에 심어 놓은 나팔꽃 화분에는
어느새 새싹이 피었다지
[금상] 외포리 요양원 / 송순애
바닷가 모로 누운 폐선 한 척
뒤척일수록 마른기침 흘러나온다
창가의 휠체어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노인이 자꾸만 한쪽으로 저문다
갈매기가 바람 다발을 뱃전으로 물어 나를 때
성한 데 없는 이음새가 삐걱거린다
더는 조일 수 없는 나사처럼
노인의 관절은 오래전부터 녹슬어 있다
누군가 찾아와 주었으면
어스름 속으로 길이 보일 텐데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파도를 따라 졸음이 밀려온다
가는 귀먹은 텔레비전에서는
입만 벙긋하는 가수가 콧줄에 걸려나온다
식도 어디쯤 가보았던 것인지
바람 소리가 목선을 휘감고 쿨럭인다
한때 해상을 횡단하던 선박이었던가
물살이 커튼처럼 접혀오는 저녁,
이곳의 문은 여전히 밖으로 잠겨 있다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잔할 것이다
갯벌처럼 드러난 병상에서
폐선 하나 쓸쓸히 밀물을 끌어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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