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새 벽 / 허영자
새벽이 새 벽일 때가 있다
날이 밝아도 잡고 늘어지는 아침잠에
떨어지지 못하는 눈꺼풀처럼
쉽게 걷히지 않는 안개 속 새벽은
넘어야 할 하루의 벽이다
마음 놓고 기대던 든든한 기둥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허정거리며 밖으로 나간 거리는 황량한 벌판
갈 곳이 없다
기둥 대신 기댈 곳을 찾느라
공부하듯 훑어 내려간 구인 광고지
키를 키우듯 점점 높아지는 벽 앞에 주저앉으면
갚아야 할 대출금과 자식 대학등록금이
삼킬 듯 넘실거리며 다가온다
새벽 인력시장 헛걸음질 하는 사람들 뉴스를 보며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드나무 가지처럼 처진 어깨를 추스려
새 벽이 새벽이 되는 날을 향해
주저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은상] 김일순 사원 / 김환철
“클스마아스 이일해 헤이헤이 슁엉
오능 추엉 따등히 임꼰 이일 해양영“
“어제 왜 나오지 않으셨어요?”
“실랑 아팡, 수울 마안이 마셩 또 아팡”
그녀가 가만히 가슴을 때린다,
늘 웃는 그녀
때로는 시장한구석 자판을 벌려두고
단속반 사내들의 발길질에도 당당했던
어머니였다가
홀로 부엌에서 군불을 때며 흐르던
그 소리 없는 아픔이었다가
헤어진 벙어린 장갑을 끼곤 퇴근길
내얼굴을 춥다고 만져주는 누이이곤 했다.
언제부터 그녀의 표준말은 천천히 오랫동안
듣고 있어야 연결되곤 했을까.
아카시아 잎처럼 정렬되지 않는 언어이면 어때
눈빛은 남루한 내 표준말보다 충분한 것을
점심시간마다 따뜻한 물을 떠
한 사람 한 사람 돌려주는
그녀의 손이
벌판에 남겨진 얼어버린 벼의 밑동처럼 얼어있었지만
내 떨리는 겨울의 무표정은
묶여있던 보자기 속에 햇살로 웃고 있었다.
[은상] 한낮의 퇴근 / 김장옥
공장 정문의 내곽
가리비 문양으로 우리는 모여있다
안과 밖의 경계에 선 경비는 이 선은 넘지 말라는 양팔의 암묵
드디어 종이 울리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흘러내리듯 공장은 사람을 비워간다
새벽 출근조의 퇴근은 해방이다
비가 내려도 탓하지 않는다
한잔 술과 한큐의 즐거움 그리고 쉬고 싶다는 생각들
살과 살이 스친다
빗물이 서로 마주 본다 이별이다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굴다리를 마주하기도 한다
길이 좁아지고 사람들은 자세를 낮춘다
우산이 있을 공간의 명분이 불투명하다
이제 하향의 방식을 배울 차례다
순서에 맞춰 우리는 하나둘 하나 따라 접히는 우산
주르륵 식은땀을 닦아내듯 빗물을 훔친다
장 우산 3단 우산 일회용 우산 서로 달라도
하나 된 문장처럼 반듯하다 휘어지는
골목 따라 우산의 생각도 굽어지다 활짝 펴진다
가는 손끝으로 빗물이 떨어진다
이건 노동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이다
온기가 건너온다
손과 대 사이 말없이 건너오는 이마의 땀이 환하다
저 땀방울에 한 마음 닿으면 현생이
다 읽힐 거다 이젠 너의 뒤에 쉼표 하나, 툭
[동상] 마이너리티 리포트 / 박한규
1. 개구리밥
하마나 불려 질까 동살 속 귀 세우는
선잠깬 인력시장 들레다 잠겨 들고
날품에 헤진 물갈퀴 허방 속을 떠돈다
2. 무화과
너볏이 대궁 올려 꽃등 걸고 싶었지만,
꽃받침 갈채 속에 만발한 꿈 그렸지만,
가슴속 씨오쟁이엔 거먕빛만 번진다
3. 달맞이 꽃
글러진 이생의 꿈 가슴에 묻었건만
언저리 외진 기도 해쓱히 벙근 걸까
달빛이 낭창한 꽃잎 신열 자꾸 도진다
4. 거미
빈 하늘 움켜쥔 채 나달대는 실타래
손끝이 다 닳도록 생의 솔기 기워간다
뒷등이 흠뻑 젖도록 빌딩 벽을 타면서
[동상] 집으로 오는 길 / 이창우
식전에 일 나가신 아버지께 가는
이랑 길은
검정 고무신의 맨 발목을
촉촉한 콩 풀들이 반가이 비벼대는
이슬 길이다.
어머니가 일러주신
이렇게 이렇게 하라던 얘기를
꼬깃한 메모처럼 자꾸 중얼거리면
기다란 두렁 길 어디서 나왔을까
흰 나비와 민들레가
손을 잡아 이끈다.
아부지, 어무니가
진지 잡수시러 들어 오시래요
또박또박 일고여덟 애 같지 않은 말투가 부끄러워서
작은 소리에 못들으셨나
아부지, 엄마가 밥 먹으래 외치고
냉큼 되돌아
그래, 가자는 뒤통수로 들으며 내달려
집으로 오는 길
옆집 마당
커다란 누렁소가 송아지 옆에 달고
쩔렁쩔렁 나서며
고단하게 울음 우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노래하는 내 친구
삼용이가
마루 끝에 앉아 하품 어린 눈 비비며
나를 보고 웃는다.
[동상] 사랑은 / 최지연
눈 밑을 찌르는 듯한 여름날
어미 개 한 마리가 흙바닥에 엎드려
다리에 난 생채기를 핥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수캐 한 마리와 싸움이 붙은 것이다
8월의 햇살 사이로 포화 같던
매미들의 울음소리
한참 동안 보이지 않던 새끼 두 마리가
어디선가 슬금슬금 나타나
상처로 가득한 어미를 연신 핥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금세 더러워진 새끼들의 주둥이를
어미는 목장갑 같은 혀를 내밀어
쉴새 없이 닦아내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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