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장미회담 / 안미선
그들은 지금
식탁을 사이에 두고 밥을 먹는다
서로 융통성을 묻는,
눈그늘이 볼까지 내려온 한사람이
하루 한 끼만이라도 지중해식으로 먹자한다
시래기 된장국을 맏 떠 넣으려는
때다
서울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를 오가는 호흡들
식탁 유리에 번진다
휘어지는 식탁을 조절하며 지구본이 돌아간다
해안선이 바닷물을 끌어당기고 팽팽해진다
육지가 넝쿨이라면
나무들이 공기방울 속에 뿌리박는 방식을
그들은 모르지만 모래사장은 안다
스위치를 누르듯 시선을 아래로 찍어 누르던 한사람
포크보다 젓가락질을 잘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윤리적인 생활이라 믿는다
탄수화물금단증으로 다리가 저릴지도 모를 사람들이
주사위를 식탁 위로 막 던지려는
때다
착점에 따라 첨부되는
장미주의보
그들의 대척 시점도 안정적인 변화의 선택
가능하다면 혹은 불가능할지라도
식탁 위에 남아야 하는 것
마주잡은 오른손과 오른선의거리
비로소의 안녕
[은상] 바늘구멍 / 우종율
- 낙타를 위하여
새벽 4시
도시락 세 개, 액봉지 혹에 넣고 낙타는 집을 나선다
때 묻은 막내아들 신발이 뒤집어진 채 걸린다
빈센트 고흐의 '구두 한 켤레'가 된 아이의 헤진 안전화
녹초가 된 아이의 희미한 미소가 따라 나온다
내 나이 65세, 낙타 나이 스무 살
툭툭 불거진 양 손가락 겨우 한번 밖에 펼 수 없는
눈앞에 놓인 노동 한계
발가락도 꼼지락거려 보지만 자기 위안일 뿐
낙타 한 마리 낭떠러지에 떨어졌다는 소식, 내내 발에 차인다
2호선 신남역에서 반월당으로
1호선 환승하여 대곡역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굳은살 박인 손아귀들
한때 조극 근대화라는 근사한 호칭으로 어깨 세우던 남자들
희끄무레한 머리카락 사이로 서릿발 같았던 눈빛 흐려진다
울긋불긋 낙타의 무리, 플래시 몹,
그 중에 나도 섞여 너울너울 춤추고 싶다
징이며 꽹과리 대신 나는 스웩스웩 늙은 레퍼가 되어도 좋으리
아파트 입구 떨어진 이파리 쓸고 돌아서면
처음으로 되돌리는 야속한 바람
낙엽에 대한 낭만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받는 이의 즐거움보다
되돌아오는 택배물건
반품 진열대에 오른 구겨진 여배우의 사진이 콜라주가 되면 툭,
휘청거리며 더 튀어나오는 낙타의 눈을 보시라
추락한 낙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바늘구명 앞에서 오랫동안 부유하고 있는 가족
'말등에 오르면 사지 못할 곳이 없네
말등에 오르면 죽지도 않는다네
말이 스스로 길을 찾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네'
희붐한 새벽을 타고 마두금* 소리가 진양조로 들려오고 있다
* 몽골지역에서 널리 연주되는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2줄의 악기
새끼 낙타의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고 함
[은상] 가물거리는 / 손숙경
성긴 바람이 머무는 그 마을엔 눈물뺘로 갈아 만든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웅덩이에는 허물이 가득 차 찰랑거렸다 달포 전에는 한 사내가 매미처럼 나무에 매달려 비명을 던지더니 어제는 술로 심장을 데우던 노인이 연못 몸을 구겨 넣었다 벌레들이 우글우글 지킨 시신엔 솔기 닳은 늙은이들이 먼 별 한 쪽이라도 더 잡으라며 허물 한 바가지씩 퍼내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날 밤 세찬비가 천만줄기 손을 뻗어 영혼을 오랫동안 위로했다
어슬어슬한 침묵을 껴앉고 선 마을이 있었다 너덜너덜한 문패가 더 많은 골목에 발자국 소리라도 쩌벅거리면 심장이 쭈삣 섰고 놀란 고양이 울음이 목젖에 걸리는 밤이 있었다 차츰, 웅덩이는 방치되었고 물이끼가 갉아먹은 허물은 더 이상 허물이 될 수 없었다
거적을 덮어야만 떠오르는 까막거리는 고향이 있었다 새벽이면 외등을 손에 든 안개가 울상을 지으며 문패를 훑고 다녔다 가혼, 날개 없는 꽃잎이 뜬구름으로 피어났지만 집도 추억도 그리움도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동맥을 긋거나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못 둑에서 보는 것이 흉이 아니었다
해 묵은 가난을 등짐 진 노인 몇몇이 오들오들 떨며 살고 있었다
노잣돈이 없어도 얼어 죽기 좋은 낡은 오두막집이 있었다 옆집이 멀어져 발목을 자른 골목이 있었다 스스로 가물어서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 마을에서는 허물도 관심의 뿌리에서 짜낸 꽃물이었다
[동상] 발가락이 그린 무늬 / 정한지
땡볕 뛰어다닌 퀵서비스
페달을 힘껏 밟아도 퇴근시간은 퀵서비스 되지 않고
배달통에 숨긴 발가락 통증이 아우성을 친다
이파리 가득 촘촘히 박힌 매미울음처럼
반 쯤 빠진 발톱 비명이 공기를 흔드는 한 낮,
빠졌다가 다시 차올랐다가 다시 빠진 발톱이
옹이 그득한 나무처럼 아픔 무늬를 그려넣고 있다
핏물 배어든 양말 속
통증이 지나간 자리는 새살 돋은 자리조차 붉고
매매소리 따라 들어선 도시공원 한켠
직립을 잊은 늙은 나무 한 그루가 굽은 등을 내어준다
옹이로 키운 수백년 나이텔를 발목에 감은 푸조나무
수피 벗겨진 몸을 점자처럼 읽으면
500년 뿌리에 새겨진 멍의 내력을 알 수 있을까
폭우가 할퀸 자리 굳은 살 박힌 문신으로 남아도
가지 끝에 틔워낸, 아가 젖니같은 움
뿌리가 잎을 밀고가는 길은
발바닥 땀으로 더운 밥 끓여내는 아버지의 길이다
흑백 잎새 펼쳐진 그늘 아래
멧새 한 마리 제 집인 듯 날개를 접는다
마른부리 적셔주는 수액 흐르는 소리
밴드 붙인 자리 겹으로 다시 밴드를 붙이고
볕살 속으로 달려간다
저녁식탁에 깃든 눈망울들 위해
나는 기꺼이 아버지가 된다
[동상] 바이오밥나무 / 김정석
후원자님 앞으로 온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마다가르카스 바이오밥나무 아래
흑인 아이가 웃고 있다
전화가 왔다
누구냐고 되물었다
나도 모르냐고
저쪽에서 환장할 노릇이라는데
배고프지 않은 기억은 지워져서
미안할 따름이다
생전에 아버지의 소나무는
자주 진흙길에 빠졌다
그때마다 나는 황토를 반죽해서
아이티 소년처럼 쿠기를 만들었다
바이오밥 나무는 무자비하다
저리 멀고 막막하게 열매를 달아놓고
배고프지 말라니
이름만 밥나무인
그 아래 배고픈 바오가 산다
소나무 껍질 벗겨 송구죽 끓여먹던
아버지는 한 생을 건너 아프리카에
가셨나 보다
오늘도 낯선 전화가 왔다
갔다
[금상] 무섬에서 / 전영임
한 폭의 수묵화 해 지는 뭍의 섬
도도한 강물 소리 현을 타듯 노래할 때
점점이
모래, 모래알들
깊은 잠에
가라앉는다
별을 따러 가려는가
피라미 자맥질
지치지도 않는지 온몸 던져 밤을 세지만
만만한 세상은 없지
뭇별 깜짝 놀란다
꽃가마 타고 오던 향기로운 봄날은 짧아
자옥하게 서린 정 홀연히 사라지고
헌 생은 외나무다리 아래
젖어 흐른
그리운 강
*무섬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소재, 마을 3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물돌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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