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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물렁물렁한 뼈 / 김태숙

         - 상훈이에게

 

잠든 아이의 발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낮에 갖고 놀던 고무공을

몸 속 깊은 곳에 감추었나보다

군데군데 물렁물렁한 것이

잘 익은 복숭아 같다

아이의 가는 발목이

어디 너른 들을 달리고 있는지

쌔근쌔근 가쁜 숨을 쉬며

내 손을 뿌리치고 있다

아직 여물지 않은 몸

어린 새가 상처를 몸에 새기며

너른 하늘을 혼자서 찾아 가 듯

단단히 여물어 가는 시간들을

온 몸으로 새기며

세상을 천천히 배워갈 것이다

그렇게 물렁물렁한 뼈들을

하나 둘 단단히 맞추며

내 품을 천천히 벗어 날 것이다

온 몸으로 새겼던 그 많은 아픔들을

어ㄴ날 지나가는 시간들 틈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며시 끼워 놓고

너른 들로 성큼성큼 내려 설 것이다

 

 

 

 

 

 

 

 

[은상] 젠트리피케이션* / 이만영

 

발단은 바닥이었다

낡은 시간을 뒤집어엎는 공사가 한창이다

 

무늬가 깔리고 있다

발설한 발자국과 말라가는 낙서들 누군가

그려놓고 간 모눈종이 칸과

밤새 페인트로 휘갈긴 몸의 음화들

 

해체 직전의 주유소 간판이 덜컹이고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취객의 손과 무릎이 꼬인다

 

함부로 떨군 독촉장 절취선과 기호

아침으로 달려가는 공기는 불규칙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어둠

낯선 시간이 개어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멈췄던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고화질로 전광판에 광고가 채워지는 시각

 

믿을 수 없는 건 소음의 방향

바닥에 뒹구는 스프레이 통과 녹슨 난간들

소멸 그 다음을 생각한다

 

한대

주유소였던

편의점이었던

원룸이었던

 

그 단단했던 기억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휘발된 유증기와 잠재된 불빛

뒤돌아 보는 순간 나는

어떤 눈빛으로 희미해질

 

누군가는 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누군가는 비명같은 비상벨을 누르겠지만

그건 모두 네모 안의 일

지면 혹은 모니터 속에 채록된 일

 

공사가 끝난 보도블록

누군가 흘리고 떠난 눈물자국을 세며 걷는다

모눈종이마다 숫자가 찍힌다

 

매장된 모서리가 흥건하다

 

 

 

 

 

 

 

 

 

[은상] 며느리 풀 넝쿨 / 신영순

 

봉제공장 담벼락 끄트머리

납작 올라앉은 며느리 풀 넝쿨

어젯밤 남편에게 얻어맞았나

물 오른 불 따귀 멍 자국 퍼렇다

비 오는 날도 꿈적 않고

재봉틀 돌리는 현장 안을

훔쳐 보다 두 볼이 발그레 하더니

 

며칠 후, 아이가 둘 있다고 어설프게

멋을 부린 젊은 아낙이 찾아 와

콩알 같은 눈물을 튕기며

남편이 실직한지 오래 되었다고

한 잎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가난의 덤불을 걷어보겠노라고 울먹였다

 

며느리 풀 이파리 납작납작 창문을 더듬고

젊은 아낙, 아슬아슬 재봉틀을 익혀가고

시계 한 번 쳐다보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아이들의 넝쿨 손 되어 어미가슴 키워간다

 

담벼락을 붙잡고 내려오던 며느리 풀 넝쿨

비빌 언덕이 어디냐고 소란스럽게 꽃 피우고

젊은 저 아낙, 이제 일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 볼만 하다고 거친 손으로 재봉틀을 닦는다

 

 

 

 

 

 

 

 

[동상] 꽃 / 유택상

        - 몽키 스패너

 

부속품에 애벌레를 심었어

등 대면 캄캄한 세상으로 빠져 나오는 볼트,

하나 둘 셋

온몸을 풀어 놓았어

반란하지 않을께요

어둠은 실어증에 시달리고 자동차에서 피가 흘려

달콤한 길 가보지도 못했어

달리고 싶어

피가 나도록 나를 고쳐다오

나의 쪼개진 발목을 붙여다오

새파란 몽티로 조여다오

목구멍에 오일이 엉켜서 핸들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

소리를 길러 주어도 번번이 변명만 늘어놓는 맥박들

모서리의 괄약근으로 순간을 조였다 풀었지

시속 몇 킬로로 달려왔지

누가 막장 같은 속력을 붙여 주었지

바람이 등 밀어도 고장 난 것은 허물 같은 춘궁기

신화를 창조하려는 것은 부상으로 숨어사는 것

한 방울의 질료가 필요해

몇 년 동안 등짝이 가벼워진 지산의 승객을 배웅했지

하늘과 땅 매듭을 풀고 퍼즐을 맞추고

나는 산자의 손 발끝

나는 암흑 속에서 혹 하나 돋았다

 

 

 

 

 

 

 

 

[동상] 탈피 / 신승아

 

간지러운 등닥지 터져

살갗이 비집고 나올 때

가재가 안간힘을 쓰는 것은

껍질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힘 다해 몸을 접으며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은

단단한 껍질 안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던 가닭이다

 

껍질을 벗는다는 건

한없이 약해진 자신과 만나는 일

말랑거리는 몸으로

천적들의 공격에 노출되는 건

못내 두려운 일

 

그래, 틀을 깬다는 건 온전히

자신과의 싸움이다

껍질을 벗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던 가재는 알고 있을까

가장 약해진 순간 두려움을 견뎌내야

더 크고 단단한 껍질을 갖게 된다는 것을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는 것을

 

 

 

 

 

 

 

 

[동상] 아름다운 가게 / 이정근

 

가게는 시간의 입구를 가졌다

연두빛 나뭇잎이 그려진 문으로 들어서면

쓸모없는 그러나 아직은 쓸모가 남아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앉아

서글프게 모서리를 반짝이는 물건들

때 낀 크레용은 눈맑은 아이의 하늘을 메웠으리라

나는 색종이를 만지고 리코더를 만진다

누군가의 추억을 끼웠을 퀭한 액자

헐렁한 운동화와 퇴색한 구두는 깊다

더 이상 온기를 지니지 못한 집기 사이를 돌아가면

하류로 떠밀린 인형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공허하지만 평안한 진열대를 산책하면

세월의 나이테에서는 정말 나무 냄새가 난다

때로는 일본 여자가 소곤거리다 가고

때로는 필리핀 여자가 옷가지를 고른다

물길을 따라 구르며 닳은 잔돌처럼 다정하게

각자의 가방을 낀 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물건들은 약간의 떨림으로 앉아 있다

미풍이 인다 쉼없이 미세전류가 흐른다

문득 누군가의 손끝이 닿으면 짧게

저들의 모세혈관에도 피가 돌고 온기가 흐른다

문밖에서 시간은 홍수처럼 물건을 휩쓸고 간다

하지만 물건은 따뜻하고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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