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매화 / 정성수
통도사 영각 앞, 삼백오십년된 늙은 매화나무가
튀밥 같은 매화를 활짝 활짝 피워내는 것은
밥값을 하기 위해서라는데
노전암을 찾는 중생들에게 내놓는 점심 공양상은
반찬이 스무가지도 넘어서
허기를 채운 어떤 중생은 시줏돈이라며 봉투를 내밀기도 한다는데
웬 밥값?
부처님께 절 삼배면 충분하다고
주지스님 껄껄껄 웃으신다
공밥을 얻어먹은 매화가 꽃잎을 날려
극락전 옆 돌확 수조에 새겨진 작은 돌거북에게 합장을 하고
대웅전 꽃문살에 제 모습을 비쳐보며
작은 것들에게서 뜻을 보고 마음을 읽는다
‘일로향각 一걙香閣’
한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해서 향기를 만든다는
추사의 예서 중, 백미를 가슴에 담은 매화나무
추위가 다 물러가기 전에 남은 꽃망울을 터뜨려야 한다고
온몸에 힘을 준다
매화나무가 절집 처마선과 이마를 마주하는 동안
여기에 발자국을 찍은 중생들은 모두 엎드려
밥값을 해야 한다고
매화 같은 부처님 말씀 영각 앞마당에 그득하다
[은상] 대나무 / 강문석
비에 젖어
파르르 떨면서
마디 하나를 새긴다
하늘 향하여
한 뼘을 내디디며
지나간 날에 매듭을 짓는다
마디 사이로 대나무는
파란 바람 소리를 내는데
마디 사이로 대나무는
여린 잎 새를 피우는데
우리는
하늘 향하여
몇 번의 마디를 새기었는가
세상 향하여
파란 바람 소리를
어디 낸 적이 있었던가
[은상] 의자의 슬픔 / 곽향련
의자가 기울어진다
앉았던 내가 일어서면 중심이 스르르 풀리며
뒷모습을 보이는 의자
어디가 잘못됐지?
다리를 잡고 고장 난 흔적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내게서 등을 돌린 반점 같은 희미한 기억이 있지
그때, 내 등의 서늘함을 껴안느라 며칠 밤을 설쳤다
의자가 네 개의 다리로 앉아 있다는 것은 나의 착각
그것은 제 슬픔을 몸속으로 웅크린 모습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내 서늘한 등을 껴안아 준 의자
등과 머리를 받쳐 주면서도 고통을 참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
이제는 낡은 제 등을 한 번 보라고 내 등을 떠민다
온 종일 내 몸을 그에게 맡기고 앉아
밥을 먹고
휴식을 하는 동안
그는 늘 서서 일해야 하는
한낱 도구일 수밖에 없는 슬픔, 그 안에서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는 늘 나를 위해 삐걱삐걱 울었다
[은상] 죽변, 아침바다 / 김춘기
바다가 출산중이다
어둠의 주름을 열며 에밀레종처럼 머리를 내미는 해
붉은 양수가 비릿하다
탯줄을 끊고도 바다는 쉼 없이 괄약근을 조이고 푼다
물의 부드러운 근육을 겹겹 쌓아올린 산맥이
바람을 앞세우며, 달려온다
파도가 볼륨을 낮추자
선장의 늙은 심박동이 빨라진다
어부의 투박한 손이 일제히 그물코에서
가지처럼 곧은 게의 다리를 풀어낸다
붉은 해도 함께 줄줄이 건져 올린다
만선의 깃발이 오르자, 바다는 다시 숨이 가쁘다
파도를 한 장씩 끌고 온 배들이
항구에 가슴을 내려놓는다, 스티로폼 상자가 하얗게 쌓인다
붉은 피부를 접고 펴는 게들의 몸짓
그 광경을 서로 응시하는 깨알 눈빛
태양을 숭배하던 울진대게
다리의 마디마다 힘을 압축한 집게로
허공의 뒤꿈치를 물고 있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씩 높아진다
갈 길이 정해진 게들이 트럭에 실린다
제 몸을 공양하기 위해 기도하는 게, 그 모습이 숙연하다
바다는 하늘을 몇 만평씩 끌어내려 다시 물밭을 경작한다
파도의 등성이마다 물꽃이 만개하는 바다
물밭의 깊은 골마다 어부의 숨소리가 가득하다
[은상] 청초한 신맛 / 박종영
매실나무 꽃 진 후 아흐레쯤 지나
솜털 보송보송 야무진 씨방,
철딱서니 없는 3월의
심술부린 눈발로 오돌오돌 추위 탄 어린 열매,
그런 줄도 모르고
선묘 옆 묵밭에 외로움 달래려 심은 청매실 열 그루,
오늘, 낯설게 찾아가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예년 같이
콩알보다 더 컸을 열매 보이지 않는다
찬찬히 살피니 가지 뒤에 숨어 두려운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씨방 몽구리던 날,
된 눈 맞아 눈시울 얼었으니 몸을 사리는 것이다
안쓰러워 몇 개 안 열린
어린것들 만지려니 웬걸, 날 가시가 콕콕 달려든다
이게 자식 키우는 어미의 본능인가?
손아귀로 가슬한 밑동에 힘을 주니
그제야 경계를 풀고 대견스레 안기는 풋풋한 웃음,
빙그르르 입안에 고이는
청초한 신맛!
[동상] 동백 / 박병준
동백꽃 송이 하나
또,
뎅그렁
햇살에 베어
떼구르르 자지러지다
한 목숨이
한 목숨을 이끌고
이제 막 지상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설 때
잡을 수 없어
잡을 수 없어
새파랗게 울며 떠는 나무가지들,
진양조의 바람은 중모리로 흐르고
꽃들의 산조(散調)
뎅그렁 뎅그렁
그여 눈부시게 누운 바다로만 떨어지고
이대로 보낼 순 없어
이대로 보낼 순 없어
뿌리까지 흔들며
중중모리로
자진모리로
떨고 울부짖고 소스라치는
저 동백의 멍든 몸뚱아리들
거제도 해금강,
국도 14호선의 눈부신 오후 한 나절
[동상] 저 부추전처럼 / 강하주
부추전을 부친다
부추, 당근, 양파, 홍합, 땡초
서로 서로 섞이며
노릇노릇 익어간다
맛과 맛이 어우러져
향과 향이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부추전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저 부추전처럼 한데 어우러져
천천히 익어가는 것
나의 일상도
둥글둥글 잘 어우러지고 있는 것일까
노릇노릇 맛깔 나게 익어가고 있는 것일까
서로의 맛이 되고 서로의 향이 되어
서두르지 않고 어깨 나란히 나아갈 때
부추꽃 향기 푸르게 깨어나리
속 깊어지고 마음 더 여유로워 지리
[동상] 금강 하구둑 / 심은석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낮과 밤을 만드는 경계선에
강물과 바닷물이 넘나들면서
민물고기 바닷고기 은색비늘 드러낼 때
물새와 바닷새의 날개 짓이 부딪치는 곳
해마다 봄이 되면
거친 심해(深海)에 길을 만든 농어 떼
장대비 여름엔
땅위에서 흘러온 플랑크톤은 생명의 근원
계절이 바뀌는 가을이면
해와 달을 벗하여 수만리 하늘 길 만든 철새 떼
시린 눈보라 겨울엔
강 얼음 깨치는 빙어 떼
서로의 간절함이 요동치는 곳
하지만,
태초에는 짜디짠 황해(黃海) 내륙까지 밀려와
고달픈 벼농사 망친 농(農)꾼들이
강나루 외로운 나룻배에 슬픔 실어 보기도 전에
서러운 장맛비는 싯누런 탁류(濁流)로 할퀴고
민초(民草)의 꿈 쓸어버리던 금강(錦江)
반만년 한(恨)서린 충청, 호남양안(겱岸)이
이제는 6차선 제방도로 뻥 뚫려 하나 되었고
군장(群張) 산업단지로 비약(飛躍)하는데
본래 인간이 소망하여 만들었지만
자연생태가 다시 만든 금강 하구 둑
이다지도
세상의 온갖 생명들이 팔딱대는
이곳은
해상(海上) 이며 지상(地上),
그리고 사람 사는 하늘아래
낙원(樂園)이리라.
[동상] 양화대교 / 전재필
여의도 봄꽃의 하얀 꽃빛이
양화진으로 흩날리던 봄날이었을 것이다
강물이 바다냄새를 품고
무겁게 푸른 물고기를 쏘아 올린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도
바다는 배부르지 않고
흐린 정오의 한켠에서
먹물같은 노래가 나에게로 역류해 온다
이 강물에 뛰어들면 죽을 수 있을까
모르고 몸을 던지면 모든 것은 바다로 갈 것이다
양화대교 위에 서 보니 알 것 같다
모든 죽음이 아래로만 떨어지지 않고
이별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며
견디지 못할 사랑도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음을
봄날에 용케 양화대교를 건너는 사람들은
배부르지 않는 바다와 친구였을까
바다냄새가 나는 강물속에는
모르고 사는 내가 푸른 물고기로 살고 있다
[동상] 부산역에서 / 정태교
경부선 열차를 따라 내려온 눈들은
더러는 역 광장에 몸을 풀었다
발길에 채이고
들것에 실려 나가기도 하면서
고단한 몸 일으켜 세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문경새재 험한 길 넘어온 몸이라고
허연 비늘 돋우는 눈들
바람에 쓸려 나가도
건물 귀퉁이에서 다시 스크럼을 짜고 있다
열차는 쉴 새 없이 눈들을 실어 나르고
분분한 눈발에 섞여 거리로 나서면
이 밤 다들 어디론가 총총히 걸음을 옮기고
불빛이 더없이 그리운 것인지
눈들은 가로등 아래서 서성이고 있다
어깨에 묻은 눈을 털면서
버스가 올라가는 산복도로를 몇 번이고 바라보다가
광장을 뒤돌아보면
희미한 포장마차의 불빛 너머로
눈들은 축복처럼 내리고 있다
[동상] 3월 / 진서윤
밤새 잔잔하게 비가 내렸는데요
흙 비린내에 취해 슬금슬금 달아오른 홍매화도
꽃가지가 붉어지기 시작했는데요
슬쩍 스커트만 들추다 말고
이월이 눈 흘기며 달아나기 시작하는데요
[동상] 재개발구역 / 홍만희
가벼워진 몸,
개망초 꽃망울 터뜨리고 있다
알토란같은 생애위로
소리 낮게 드러내며
아무도 훔쳐보지 않는 출구에서
몸을 숨기지 못한 채
발돋움하고 있다
어느 한곳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이웃의 얼굴들
변두리로 쫓겨
겹겹이 껴입은 세간살이
세상에 던졌을 부풀은 꿈들을
곱씹는다
아물지 않는 근심은 공복이 되어
생의 뒤편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수많은 햇살 담그며
앞 뒤 가릴 것 없는 삶
마주 오는 바람조차
비켜서지 못하고
젖어들은 처마밑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둔
햇살을 어루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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