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순천만 맛조개 / 김경태
맛조개를 캐는 일은
법당에 공양하듯 공손해지는 일이다
반나절 웅크린 고양이처럼
몸을 돌돌 말아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길이다
태양 아래 아무 것도 없는 허허 개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할머니
안동에서 순천으로 시집을 온 후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 속에서 혼자
거친 숨을 쉬었던 할머니
오늘도 맛조개를 캐러 순천만으로 나가신다
맛조개 하나에 시집살이 하나 맞바꾸며
한 세월 모두 바다에 공양하신다
맛의 힘으로 숨어있는 맛조개를 캐는 일은
인생의 쓴맛 단맛 가득 담은 손으로 세상을 캐내는 일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갈대숲처럼
어쩌면 한없이 낮은 몸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권태와 설움을 개펄에다 풀어놓는 일이다
개펄이 곧 세상이었으므로 할머니는
광주리에 인 모든 질퍽한 것들을
맛조개가 먹으라고 밀려오는 바닷물에 풀어놓은 것이다
초겨울의 햇살은 오래 전 돌아가신 증조모의 잔소리처럼 간지럽고
방파제에 한가득 맛조개를 풀어놓으면
순천만은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개펄을 솜이불처럼 다시 덮어 놓는다
[은상] 이순신 / 김양채
1
그냥 눈물 나는 사람
생각 없이 길을 걷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앉아
통곡하는 사람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야만 하는 현실
술 한잔에 날려버리고
앞으로 간다 기어서 간다
길이 없는 곳에도
풀을 베어 넘기며 앞으로 간다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지는 생
아직도 살아서 영원히 살아서
혼자서 가야할 길
통곡하며 간다
기다려 줄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아득한 바다에 홀로 남아
눈물꽃이 된 사람
2
하늘도 울고 땅도 울어
잡초도 피지 않을 땅에
꽃 한송이 피운다
쳐 내고 또 쳐 내고
짓밟아 만신창이 되어도
일어나 꽃을 피운다
불가능과 가능의 사이에서
불꽃으로 피어나
스스로 꽃이 된 사람
그냥 눈물 나는 사람
아득한 바다는 끝없이 아득해서
아득하게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눈물겹다
통곡의 피눈물로 꽃이 된 사람
3
모르는 적들이 흩어져 있는
아득한 바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술 한잔 시름을 달래며
동쪽 하늘에 뜨는 샛별 바라보았다
마쳐야 할 일들이
마쳐지지 않아 힘겨웠고
끝없이 다가오는 일들이 두려웠다
바다는 말이 없고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
몸에서 일어나는 병들에 짓눌렸고
병든 땅과 하늘에 짓눌렸다
마지막 바다는 오로지
어머니의 품에서 만들어진다고
화약냄새 진동하는 새벽 바다에서
그리운 어머니 얼굴 떠오른다
[은상] 처마 밑 고드름 / 김정식
저 얼음꽃들
좀 봐
마음
꽝꽝 언 채
거꾸로 매달려 있어
처마 밑
곶감처럼
한 실에 꿰어져
줄줄이
옆으로 나란히
달려 있네
기와 속
숨겨진 비밀
오금
저
린
채
검은 눈물
한
방
울
두
방
울
토
옥
토
욱
떨구고
회초리 든 햇빛에
이실직고 반성문 쓰며
거짓된 몸
깍
고
연결고리 문
풀
고
식은 땀
흘
리
며
처마 밑에서
투
욱
투
투
욱
투... ...
[은상] 학교에서 / 정기원
이층 끝 계단 첫 방은 교장실이다.
문을 열면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이 들어와 있다.
책상과 의자는 창문을 등에 진다.
언제나 밖은 엎치락뒤치락한 방대한 꿈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정면으로 마주하면 눈물이 난다.
35년을 걸어왔지만 창밖 풍경의 운동장은 공급 받으려는 특별한 자리다.
아이들로부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와 백일홍으로부터,
미끄럼틀과 시이소와 하늘사다리로부터.
아이들은 언제나 푸드덕 날개 짓을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날아오르기 위해 제법 긴 시간을 뛰어다니며
넘어지면 일어서는 정교함을 배운다.
내가 가르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품을 때까지.
목표는 가까이에서 허락되는 자신의 방법으로 날아올라,
극복하고 증명하며 인식하는 역사를 만든다.
그것은 꼭꼭 씹어 삼키는 운동장의 언어다. 전교생 85명이
무한동력이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느티나무가 있는가하면 몸을 웅크린 은행나무 둘레로
백일홍이 후렴처럼 맴돈다. 거기, 높고 행복한 하늘이 있다.
한 계절이 지고 한 계절이 피어날 때마다 아이들은 웃고 웃는다.
울고 우는 아이들은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감성에 상상력으로
발돋움한다. 창밖은 한 폭의 초심이다.
미래와 온기가 담장을 새어나가지 않게 끊임없이 여민다.
하늘 사다리는 자유를 닮았다.
철봉을 옮겨 잡을 때마다 마음속에 고여 있는 격렬한 실재를 만나기 위해
놓치지 않고 전진한다. 여전히 목표를 향하여 전하고자하는 아이들의
몸짓은 시작되었다.
시이소는 정직을 닮았다.
한사람의 무게가 진실을 입증하며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약속, 기우뚱거릴 때마다 혹은 떨려나오는 무게의 목소리. 미끄럼틀에서
스르르 미끄러진 아이들이 창밖 운동장에 가득하다. 멈추지 않기를.
[은상] 가장자리 / 박청환
중앙은 항상 고요했다
무거웠고 깊었다
가장자리는 항상 번잡했다
가벼웠고 얕았다
중앙은 항상 먼저 채워지고 먼저 녹았다
나머지가 가장자리 몫
큰 고기들은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크고자 하는 고기들도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이 때로는 첨벙 튀어올라 파문을 만드는 것은
가장자리의 플랑크톤을 약탈하려는 교묘한 술책
중앙을 키운 것도 먹여 살리는 것도
가장자리다
중앙은 망각의 장소다
치어들은 커서 중앙으로 향했고
중앙에 도착해서는
가장자리를 잊었다
그러고도 뻔뻔한 중앙은 때때로 가장자리를 찾아와
입 안 가득 먹이를 훔쳐 돌아갔다
그러나 가장자리는
중앙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먼저 마르고 먼저 얼지만
가장 늦게 녹고 가장 늦게 채워지지만
비 온 다음 날처럼 연못이 벙벙해지면
중앙으로 떠난 치어를 생각하며
철벙철벙 뒤척일 분이다
갈대를 부여잡고
그리움을 숨기려
스멀스멀 안개를 피울 뿐이다
연못의
가장자리는
家長자리다
[동상] 북한강에서 / 이상재
물뱀이 고요를 물고 나아간다
햇볕과 바람이 말려진 그물마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의 그림자만
어부의 손끝을 따라 엮어져 있다
강어귀에 전설이 닿았던 나무들도
그 속을 비워내다 쓰러져 가면
강은 터전으로 일군 사람들 차지다
나무의 빈 곳을 두드려 만든 배는
강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으므로
익숙한 안개의 군무를 지나
물고기의 이동을 따라 갈 것이다
달빛은 칡꽃향기를 따라 번져갔다
말질을 하던 사람들이 그물을 거둔다
비린 생선들이 살을 허물어 익어갔고
굴뚝연기는 별을 향해 내뿜었다
강에 흩어져 있던 소문을 물어
수다스러운 새들이 돌아오는 동안
늙은 잉어들은 강을 뒤집으며
거친 숨으로 안개를 끌고 갈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강에 기억을 내리고
강이 터전을 거둬가기까지
강은 언제나 고요하다
[동상] 졸업사진 / 김종범
그대들 떠남을 준비하세요
이제 당신들은 은유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 쳐질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그렇죠!
연못을 가로지른 징검다리와
여러분들은 훌륭하게 조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자의식 따윈
중심선에서 살짝 비낀 전신 프로필 사진 속에 던져버려요
지나간 날들이 두려운가요, 그럼 이쪽을 보세요
지금 이 순간 영원히 그 시간을 잡아드리죠
혹 나중에라도 이 사진을 보면 당신의 웃는 모습 너머
사진 속에 가두어 놓은 두려움을 깨우지는 마세요
좀 더 발전적으로
그런 후회 따윈 다시 하지마세요
긴장하지 마시고 살짝 웃어요
여러분들의 모습이 인화되어 규격화 되는 때
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할 것이므로
함부로 앨범 따윈 들추지마세요
꾹 꾹 눌러놓았던 지난날의 두려움이 당신들을 어떻게 습격할지
안전을 보장 못 합니다
그냥 이 순간에 존재하세요 넥타이를 고쳐 메고, 자 찍습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동상] 오두막집의 겨울밤 / 장민석
깊은 겨울밤
뒤란 대숲에서 사그락 거리며
댓잎 부딪치는 소리
짙은 어둠속에서
소름 돋는 소리로 달려온다
이따금 부엉이가 서럽게 울면
이름 모를 산새들 추위에 떨다가
애처롭게 우는 소리들이
무서움 다닥다닥 붙여서
찬바람 뚫고 오는 밤
식어가는 구들장에 몸을 웅크리고
무거운 솜이불 뒤집어 쓴 채
겨울밤 슬픈 가락을 엿듣는다
먼 곳으로부터 출발한
찬바람이 산등성이를 훑고
강을 따라 내달리다가
산골마을까지 들어와 가쁜 숨 내뱉으며
먼 곳의 겨울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사뿐 사뿐 대숲에 눈 내리는 소리에
산새들 잠드는 시간
어둠을 눈 속에 하얗게 묻어두는
겨울 대숲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안고
산골의 긴 긴 겨울밤을
홀로 무서움 떨쳐내고 있는 아이는
부엉이만큼이나 서러움 속에서도
햇볕 받는 꿈을 꾸며 잠이 들던
아주
오래 전 그 겨울 대숲 속의
오두막집이 그리운
오늘!
[동상] 차를 마시다 / 권덕은
중년의 어머니가
고스란히 상자에 담겨 내게로 왔다
때깔 고운 보자기를 풀자
쏟아져 나오는 찻잔들, 다구와 찻상
고단한 삶 속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친정집 진열장에서 빛을 내고 있던
어머니의 작은 조각들
야야, 인자 나는 다 필요없데이
차도 마실 만큼 마싰다 아이가?
찻잔도 손에 무거븐 나이가 된 기라
생의 허물을 또 한 번 벗고
저물어갈 채비를 하시듯
벗은 허물을 가지런히 정리하신 어머니
오목한 다기마다
고봉처럼 쌓여있는 어머니의 침묵들
또르르 찻물 따라내니
하나, 둘 깨어나 춤을 춘다
침묵은 혀뿌리에 걸리고,
입 속에 스미고 내 몸을 돌아
나직한 경이 되어 허공을 울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보듬어 찻잔을 든다
미련 없이 벗어 낸 어머니의 허물을 받아 든
중년의 내가 할 일이라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동상] 목재 파쇄기에 대하여 / 김태수
온몸은 쇠로 뭉쳐져 있으면서
식성은 어울리지 않게 나무의 속살을 좋아한다.
벌레들 구멍이 숭숭 뚫린 소나무 둥치를 쪼개어
입에 넣어주면 들어가기 바쁘게
몸을 부르르 떨며 씹는 소리가 땅을 울린다.
손발은 없고 입만 가지고 있어도
탈나지 않고 부지런히 먹어주는 것이 고맙다.
쌓아놓은 나무들은 많은데
소화기능이 고장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찐득찐득한 송진이 목구멍에 붙는 것을 주의하라고
일하는 사람들끼리 무언의 눈짓을 보내기도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욕심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씹고 갈고 빻는 모습이
사람이 하는 짓 보다 낫다.
소나무만 골라 먹는 것은 좋지 않아서
가끔 수액이 많은 활엽수도 주고
냄새나는 폐기목을 주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너도 나도 골고루 잘 먹어야 서로가 잘 산다는 것을
이 외진 공터에까지 어려운 세속의 사정이 전해지나 보다.
생장을 멈춘 나무들의 나이테가 안타까워서 그럴까.
병들어 죽은 나무들의 고통을 이해해서일까.
몸은 쇳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정 많은 사람처럼 나무들의 속살을 삼키지 않고
톱밥을 만들어 내어놓는 넉넉함에
축 처진 삶의 기운이 솟아난다.
[동상] 문화 상회 / 유상록
난리가 나던 그 해였던가, 피난민 열차가 설 적마다 억수같은 사람들을
부려놓고는 떠났다 한다.
사람들이 멧새처럼 터를 잡던 그 시절에, 처녀는 장마당 한 켠에서
채소를 따듬었다.
이슥해져 돌아오던 날마다 봄은 자꾸 어지럽기만 해서 걸음마다 달이
울렁이고
그런 밤에는 우거진 복숭꽃 마다 꼭 처녀귀신이 앉았다 했다.
저 너머 강변에는 몇번이고 큰 물이 져나갔다.
손이 야물던 색시의 점빵에서 아이들은 십리 사탕을 입에 물고 십리길의
재를 넘어 학교를 다녔다.
가난을 감춰 쥔 조막손들이 눈치를 볼 때마다, 소같은 눈을 꿈벅이던
신랑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해마다 진 벛꽃이 문에 날아와 말라붙으면 봄비가 몇 번이고 또
씻어내렸다.
덧칠을 잊어버린 창살 마디에 꽃물이 때가 졌다. 사람들은 벚꽃처럼 나고
자라 떠나갔고.
조약돌같던 점포들은 모두 이가 빠져버린 채, 공터에 남은 슈퍼 집
미닫이가 바람에 들썩인다.
노인네는 오늘도 떠나버린 이를 추억하며 누군가를 맞이하듯 문창을
닦는다.
이른 봄볕이 정갈한 유리창을 넘어와 과자 박스의 빛을 바래고 있다.
[동상] X레이 소견서 / 강경식
X레이 소견서 –박보검 방사선과
Name : 김명신 Age/Sex : 51 Date : 2017.봄
이 환자의 뼈 사진을 확인한 결과 특이점이 발견됐음
뼈 속이 비어 있고 가벼워진다는 건 조류의 전형인데
파충류도 아닌 포유류에서 조류로의 진화는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몇 안 되는 케이스임
특이변종이거나 애초 조류였음을 숨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환자의 남편에게 몇 마디 소견을 전할까 함.
이마트 계단에서 넘어졌다고는 하나 이 환자는 날 준비를 하는 것 같음
원인으로는 갈비뼈 속에 품었던 자식들 뛰쳐 나간 지 오래고
척추 마디마디에 디스크판 대신 받쳐주던 남편이 퇴행된 지 오래여서
묶여 있던 벼릿줄과 매심줄이 드디어 환자를 놓아 준 것으로 사료됨.
날개죽지뼈로 펴지는 갈비뼈가 우화등선의 초기단계를 벗어나면
날아야 하는 본능을 걷잡지 못하므로 미리미리 아내의 뼈 속을
채워 넣기 바람
참고로, 이 환자 몸 세포 구조는 현찰과 고기를 좋아하게끔 진화
되었으니 뼛속에 채워 넣을 내용물은 그 두 가지와 접착제 같은 당신의
관심이면 됨.
-----이 상----
박보검방사선과의원. 오래된 선녀 구조 전문의: 박보검
DR. PARK’S CLINIC OF DIAGNOSTIC RADIOLOGY.
[동상] 참나무와 주름버섯 / 안윤미
시들음병에도 끄덕없이 50년을 살아온 참나무를 벌목꾼이 베어버렸다.
나무 밑둥만 덩그라니 남아 겨울을 참아내더니 결국에는 말라버렸다.
참나무 썩은 등걸에서 주름 버섯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버섯은 나무를 빨리 썩게 만든다.
썩은 나무들은 또다른 거름이 되어
청설모도 주워먹지 않은 도토리에 싹을 틔운다.
겨울의 무서운 추위에 나뭇가지들이 말라붙었다.
말라붙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꽉 부여잡고 있는
썩은 고치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빈껍데기인줄 알고 툭 쳤더니 그 속에서
한겹한겹 옷을 벗으며 나비가 탈출을 준비하고 있다.
시내도로를 지나던 검은 차 한 대가 고양이를 쳤다.
무서운 타이어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내장이 제 살갗을 빠져 나왔다.
고양이의 피가 눌어붙은 도로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그곳을 지나던 굶주린 까마귀가
썩어가는 내장을 제 뱃속에 쓸어담고선 펄쩍펄쩍 날아오른다.
모든 썩은 것들에는 생명이 있다.
누구도 심지 않은 썩은 나무등걸에 으레 주름버섯이 자라는 것처럼.
주름버섯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듯 봄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생명은 계절의 순환처럼 이어진다.
봄이 온다는 것을 몰라도 겨울이 지나면 으레 봄이 온다.
봄은 겨울 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썩은 것의 아픔은 봄이 겨울을 밀어낸 힘으로 사라진다.
[동상] 아내의 장독대 / 김헌기
손 없는 날 아내가 장을 담근다
눈가에 잔주름이 그윽한 아내는
이제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맵시나는 생활한복을 입고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메주를 건져 낸다
한 뭉치 지푸라기 솔로 팍팍 문질러 닦아내어
쨍쨍한 햇볕에 메주를 말려서
정성 가득히 장을 담그는 아내
하늘 한 자락 잘 발려
새끼손가락 휘저어 입맛을 쩝쩝 다시며
꼼꼼하게 연신 장맛을 보고
햇발이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장독 항아리를 문질러댄다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
행여 미쳐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답답한 가슴을 쿵쿵 쳐대며
햇볕에 보타져 장졸아 줄 듯
해마다 아픔으로 되돌아올 기억을 쟁여두고
아내의 마음도 저렇게 타닥타닥 보타지는 것일까
나는 온기 가득한 장독대 항아리를
무심코 들여 다 보다가
훅, 순간 뜨거운 숨결이 내 얼굴에 덮치고
문득 뭉글뭉글한 함박꽃이 환하게 피어
복이라곤 일복밖에 없다던 어머니가 비치고
늘 짭조름한 인생 술에 절여 막 살다가
강물처럼 떠내려간 아버지가 밀려오고
옹알이가 한창인 큰 손주 놈
햇살이 시들 때까지 첨벙첨벙 물장구치며 놀다가고
쩌-억 쩌-억 갈라진 메주덩이 사이사이로
푸름 한 곰팡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고스란히 삶의 깊은 손맛을 내는 아내의 장독대
이따금 어디선가 톡, 톡, 톡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
장독대에선 보글보글 장 익는 소리가 나고
어느 덧 펑퍼짐한 동네 아줌마 차림이 물씬 묻어나는 아내는
여직 아물지 않는 상처 하나 묻어두고
벅차게 차아 오르는 장처럼 아내의 삶도 저리 익어가는 것일까
오늘따라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고여 있는 신열이
저 하늘에도 푸르게푸르게 번지는 것일까
[동상] 감자탕 집엔 손님이 많다 / 김일하
감자탕은 등골 빼먹는 재미가 쏠쏠해
젓가락으로 후벼가며 빨아먹는 것인데
먹고 나서 구멍 숭숭한 뼈를 보면
내가 빼먹은 등골에 바람이 들어
밤마다 바람 소리로 앓으시던 어머니
굽은 등이 생각난다
일가의 기둥이라는 든든한 배경 앞에
나의 잘못은 묵인되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뼛속부터 가벼워진 어머니
어머니는 따뜻한 밥이었고
먹고 싶을 때 빼먹을 수 있는 등골이었기에
등이 시린 건 나이 탓이라 일축했다
몸꽃인양 번지던 주름
골 깊은 그 길 마디마디에
바람이 살고 있었다는 건
몸을 벗은 일생을 습골, 봉인하며 알았다
마주하고 앉아 저마다의 뼈를 발기는 사람들
좀처럼 숙인 머리를 들지 않는
중앙시장 끼고 돌아 허름한 감자탕 집
빈 뚝배기에
세상의 어머니가 중추적으로 쌓이고 있다
[동상] 콩나무 시루 / 황덕조
발이 시렸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구멍 난 바닥에 제각기 몸을 뉘이고
꿈꾸던 시간들이 마르지 않게
서로의 여윈 발목을 끝없이 적셔주었다.
쳇다리를 지나
물받이 자배기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는
자주 꿈의 언저리를 적셨고
젖을수록 강해지는 꿈들은
조금씩 겨울의 빗장을 풀며 자랐다.
아무도 함부로 뿌리 내리지 않았다.
어깨에 어깨를 기대면서도
서로의 아픔과 기억을 더듬어 거리를 두고
서로가 일어서야 할 공간을 위해 몸을 움츠렸다.
뒤돌아보지 말고
오직 한 줄기로만 살아 오를 것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의 깊이와
무거움 침묵 속에서
제각기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리던
작은 주먹 같은 별들
그리하여 마침내 어둡고 무거웠던 하늘을 밀어올리고
검은 보자기 속에서 헤아리던 시간과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겨울 아침을 녹이는 국 한 그릇,
어울려 위안이 되는 나물 한 접시가 되었다.
오래도록 꿈꾸던 자들의 열망을 모아
소박한 밥상을 다독이는 샛노란 희망이 되었다.
[동상] 너희들이 내 삶의 시인 것을 / 박현동
가난한 시골의 詩人 선생님을
꿈꾸었지만
학급 환경정리를 위해
시 한 편을 달라는 실장의 말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시 한 편이 없어 못내 부끄러워
빈 교실 먼지 낀 책상 위에
그 부끄럼을 끄적인다.
괴로울 고 苦三 담임으로
입시지옥의 수문장처럼 버둥대면서
하루 종일 순종만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꿈이
악몽이 되는 요즈음의 나는
얼마나 또 어리석은 열심인지
그런데 아이들아
너희들이 졸리워 떨구는
그 안타까운 고갯짓이
하루에도 열두 번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는
그 눈물겨운 삶의 무게도
세상 속의 나로 서기 위해
세상 속의 나로 꽃 피기 위해
가슴에 거름을 품어
아프게 움트는 것이기에
꽃 피기 직전에 내지르는
절절한 향기 같은 것이기에
그런 너희들을 일구는 내 사랑이
그런 너희들이 내 삶의 詩인 것을
난 무엇을 바라
또 다른 부끄럼을 끄적이겠니.
[동상] 어떤 소리 / 김희관
동네 정육점에 들러
돼지 목살을 사들고 집으로 오는데
고기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꿀꿀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달아오른 불판 위에
붉고 두꺼운 목살들을 옹기종기 눕히자
고기들은 지글지글 소리 내며
뜨거움에 마구 몸을 비틀었다
익고 있는 고기를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아내는 돼지처럼 먹는다고 핀잔을 준다
중심을 잃고 허둥지둥 살아온 흠 많은 남편임을
아내와 한편이 된 눈치 빠른 돼지도 알고
불판위로 너도 얼른 올라가야지 하며 소리칠 것 같아
고기 숙숙 잘 넘어가던 내 목젖은
죽은 돼지를 위해 경건하게 묵념하듯
그만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현실에 안주하며 짜부라진 내 귀와
어설프게 열려 있어 두려웠던 내 입을 자책하며
술기운에 아내에게 넋두리만 길어진
창 밖 별들에게도 부끄러워지는 밤이었다.
술에 취해 집으로 오던 어느 밤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있던 정육점 앞을 막 지나는데
정육점에 걸려있던 돼지들이
여태껏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구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로
꿀꿀! 정신 차려! 꿀꿀꿀!
[입선] 노란 미소 / 윤상선
[입선] 얼음다리 / 차재연
[입선] 가라앉은 유채밭에서 / 이송이
[입선] 출장 가는 길 / 이건섭
[입선] 섬 아닌 섬 / 박창식
산길 험해 예전엔 자갈치서 기선으로 창아가던 곳
가슴 속 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 날
그대 안부가 절절한 날, 송도로 간다
사시사철 하얀 옷고름 풀어헤치고
푸른 젖가슴을 내놓는 그 바다
밤새 젖은 별로 깜박이던 묘박지 외항선들도 꿀잠에 빠져들고
밀물에는 끝없이 실려 온 상사가 켜켜이 쌓인 백사장에는
고운 모래가 눈물처럼 반짝거린다
고즈넉한 언덕바지 노송 한 그루, 해풍에 붙박인 채
굽은 등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풍파가 그은 시간의 날카로운 빗금이
나이테로 점점 둥글어지는데
언제나 올까, 등이 굽도록 기다리는임
파도가 쉴 새 없이 낮은 음표로 작은 모래 건반을 두드려도
납작 엎드린 밤은 불면을 뒤척거린다
언제나 올까
밤바다 가득 수놓은 금실 달빛을 거북섬 위에다 곱게 펴서
그대 사뿐히 지르밟고 올 구름다리 하나 놓아볼가
이국정취 물신한 밤이 찾아와 꺼져가던 추억들에 불을 밝히면
섬 아닌 섬에서 손짓하는 그대
횟집 수족관에 갓 들어온 어리둥절한 고등어 한마리가
이 밤,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놓치고 있다
[입선] 어떤 일출 / 최범석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이 알을 낳는다
어둠 깊은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양수가
검은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수평선 너머에 환한 얼굴 살짝 비친다
깊은 속울음으로 산란의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
아이처럼 어깃장 놓던 방게도 움직임 멈추고
수증릉 수비하는 갈매기도 날갯짓 멈춘다
해변에 늘어서서 이 순간 기록하는 카메라도
숨죽인 셔터소리만 조심스럽게 쏟아낸다
드디어 전설의 용울음소리 그 파문이 밀려오고
금방이라도 단물 쏟아질 듯한 수밀도 하나
조금도 흩트림 없는 둥근 얼굴로 둥실 떠오른다
고통의 틈을 메우던 양수덩어리 흐물흐물
고빗사위에 쐐기처럼 두 손으로 떠받치다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보고 탯줄 잘라낸다
산란이 끝나고 깊은 바다에서 솟아나는
허탈한 신음소리 출렁출렁 밀려오는데
막심 므라비치는 횟집마당에서 엑소더스를 연주하고
감은사지에서 사라진 종이 소리없이 울린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갈매기 때 일제히 날아올라
붉은 하늘에 까맣게 너울대며 축하비행을 한다
동해바다에서 용이 되어 천년을 산 문무대왕이
이제는 눈부신 하늘의 전설이 된다
[입선] 거꾸로 매달린 사람 / 김홍기
[입선] 말 / 김난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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