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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로드킬 / 전병호


길에서 길을 잃어버린 죽음들이

살점을 발라 부고장을 쓴다

한 바퀴,

한 바퀴 돌 적마다 부서지는 슬픈 기억들


속도에 길들여진 아스팔트 위

어둠은 속도를 숨기고 몰려왔다

속도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몸을 관통하는 순간

도살장 어느 외로운 죽음처럼

비명조차도 내뱉을 수 없는 찰나

검은 어둠이 몸속 내장을 핥고 지나갔다


바람도 길을 따라 흐르는 곳에서

각을 세우는 일은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바람도 길을 따라 흐르는 길 위에서 바퀴들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길가에서 들려오던 아이들 웃음이 이불속으로 눕고,

무서리 꽃으로 피어나던 새벽녘

자유공원 팔각정 아래

귀가 시간을 놓친 어느 노숙자의 죽음처럼

돌아가지 못한 사체 위로

별빛이 흩어지고 안개가 내린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을 만들고 길을 지우는 밤

고양이의 눈빛처럼 날카로운 속도는

길 위의 움직임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밟히고 밟혀도 아프지 않는 밤

길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체들이

살점을 발라 수만 통의 부고장을 쓴다

별빛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밤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들이여






[은상] 창문, 열다 / 한규동

[은상] 간이역 / 이종덕

[은상] 실러갠스 / 정석교

[동상] 늙은 홰나무의 기침 / 이성호

[동상] 오래된 의자 / 박해술

[동상] 김진국 / 김일하

[동상] 상가의 저녁 / 김성욱

[동상] 겨울 청대 밭에서 / 박영식

[동상] 무화과 / 변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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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구제역 풍경접종 / 김현근





[은상] 귀가 / 구민숙


여행에서 돌아와 낡은 목각의자에 앉는다

온 몸에서 파릇대던 낯선 길 위에서의 섬모들

아직 촉수 거두지 않고 섬세하다

어둑한 거실이 전세버스로 달리고

벽에 붙은 대형거울로

지나 온 풍경들이 선명히 스치는데

차창 밖엔 없던 여자 하나

웃지 않는 얼굴로 나를 주목하고 있다

풍경과 함께 흐르지 못하고 옹이처럼 박혀 있는 저 여자 

갈라지고 굽어진 선들을

둥글게 둥글게 끌어 모아

옹이꽃으로나마 생을 피우려나 보다

옹이의 어둔 꽃잎과 꽃잎사이로

지난 날 여자가 건너 온 강물이 수 만개의 얼굴빛으로 흐르고

강 앞에서, 혹은 강을 건너며

온 몸에 퍼졌을 차갑고 푸른 소름들

아직 촉수 거두지 않고 섬세하다

지금 저 여자

깊이를 물을 수 없는 강을 모두 건너

여행에서 돌아온 것일까?






[은상] 이발 / 김동선


그 많던 엑기스는 어디로 흘렀을까

형광 빛에 반사된 이발사의 손가락은 창백하다

푸석한 머리털의 사내들은, 스포츠신문 한구석을 들춰 음경 확대 광고문

을 찬찬히 훑어가며 차례를 기다린다

사각사각 푸르스름한 권태의 끄트머리가 잘려, 수북이 쌓인다

피곤한 사내가 슬그머니 잠속으로 도망칠 때마다 이발사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올려 터럭 속에 숨어 있는 새치를 골라냈다

욕구불만으로 비대해진 목덜미에 장미꽃 문양의 붉은 반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발사는 의자를 귀로 젖혀 발기부전으로 움츠러든 사내의 일상을 내려

놓고 하얀 거품을 풀어 따끈한 물수건으로 사나운 꿈자리를 데웠다

날카로운 면도날의 기울기를 조잘할 때마다 이발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문득 최면이 걸린 사내가 섬뜩한 전율에 목을 내어 놓은 채 잠속으로

빠져든다

전생의 궤적을 따라 풋풋한 청춘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은상] 지문 / 김준호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을 게다

날 선 비늘 하나

손가락 끝에서 밀어 넣어

낸 몸 안에 유영하듯

깊숙이 박혀 있는

이미 오래전 생채기는 아물었지만

끝끝내 없애지 못한 지나온 것들이 있을게다


다운타운 네온사인이 하늘 하늘거리며

이 지루한 혹성을 온통 보라색 하늘로 만들 때쯤

갑자기

화석처럼 희미해진 바늘 출구를 찾고 싶다

그리고

내 덜컹거리는 손가락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난 이제야 알아챈다


고생대의 삼엽충

백악기의 암모나이트


여전히 내 열 손가락 끝에서 화석처럼 돌고 있는

지난 추억들은

멸종을 거부하며 흔적으로 나에게 재생을 부탁한다


이 지루하고 지루한 혹성에서

같이 로켓을 쏘아 올리자며

달콤한 막대사탕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은상] 못 빼기 / 이성배


벽에 박힌 못을 빼는 것이 쉬운 일 아니다

가슴 깊이 박힌 아픔이었을텐데

벽은 단단히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끙'하고 몇 번 힘을 주고서야

간신히 빠지는 못

붉은 피 철철 흐르는 온몸에 피어있는

하얀 시멘트 꽃송이

벽은 아픔을 끌어안고 오랫동안 젖을 물리고 있었나보다

그 젖 먹어 살 오르고 피 돌아

꽃 핀 못 들고서야

상처가 무엇인지 알겠다

벽에 옷 걸듯 사람도 마음에 거는 것인데

그 사람 빠져나가고 남은 못

후벼 팔수록 아픔의 수렁 커지고

빼낼수록 허무의 구멍 깊어지는데

포근하게 안아주지도 못하고

따뜻한 젖 한 번 물리지 못하고

살이 되지 못한 상처만 안고 살았다.





[동상] 검은 비닐을 위한 기도 / 강기석

[동상] 우산이 있는 풍경 / 김용아

[동상] 선운사에서, 동백 / 이동암

[동상] 그녀들의 점심식사 / 이정숙






[동상] 손을 번역하다 / 전갑성


생의 지도를 촘촘히 읽는다

펼치면 출렁이는 바다

접으면 섬이 되는 조막막한 집

굽이굽이 삶을 풀어놓고 살았나보다

옹이 박힌 마디에서

둥글게 닳은 문지방이 펄럭인다

먼 길도 때로는 가까이 보이듯

맵고 짠 세월의 금 간 뒤안길이

훤히 들여 다 보인다

틈은 아픔과 기쁨이 함께 숨 쉬는 목구멍

노랫가락으로 휘어지다가

흐릿한 신음소리로 뭉그러진

수 천 갈래 굵고 여린 저 흔적들

곁에 살면서도 늘 부딪치기만 하고

따스한 사이가 되지 못한

좌우측 우리들

쥐었다 놓치는 것을 되풀이하면서도

고작, 아침저녁

도 닦는 흉내만 내었을 뿐

계속 옹그려 쥐기만 하면서 살았다

뒤집으면 바닥, 담는 그릇인 것을.






[동상] 진흙과자 / 조재형






[동상] 다랑이 논 / 진서윤


빈 논에 인근의 꽃무늬가 둥둥 뜬다

이 한철 수위에 든 바람의 파문

바닥을 지나간 구불구불한 문장엔

파종이라는 해석이 붙어 있다


물이 흐르는 계절 푸른 계단이 생기고

산이 듣고 버린 소리들이 논둑에 모여

가라앉은 바람에 뿌리가 돋는 철

논 고동 지나간 길을 걸어 오빠가 상고에 갔다


지나간 시간엔 단역의 얼굴들이 있다

첫새벽 헐거운 장화, 절벅거리는 소리

넘어진 질곡들이 이제 편안한 표정이다

워워, 늘 힘센 시간을 따라가던 아버지

긴 밭의 고랑이 지금,

아버지의 마른 얼굴에서 파종을 기다린다


봄이 없었으면 아버지도 없었을 것

무뚝둑한 지휘로

온갖 곡물의 꽃들을 피워내던 솜씨


오늘도 모서리가 조금 닳고

워워, 끌려가는 날들

그 겹겹의 기억마다 따뜻한 논물이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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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매화 / 정성수

 

통도사 영각 앞, 삼백오십년된 늙은 매화나무가

튀밥 같은 매화를 활짝 활짝 피워내는 것은

밥값을 하기 위해서라는데

노전암을 찾는 중생들에게 내놓는 점심 공양상은

반찬이 스무가지도 넘어서

허기를 채운 어떤 중생은 시줏돈이라며 봉투를 내밀기도 한다는데

웬 밥값?

부처님께 절 삼배면 충분하다고

주지스님 껄껄껄 웃으신다

공밥을 얻어먹은 매화가 꽃잎을 날려

극락전 옆 돌확 수조에 새겨진 작은 돌거북에게 합장을 하고

대웅전 꽃문살에 제 모습을 비쳐보며

작은 것들에게서 뜻을 보고 마음을 읽는다

‘일로향각 一걙香閣’

한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해서 향기를 만든다는

추사의 예서 중, 백미를 가슴에 담은 매화나무

추위가 다 물러가기 전에 남은 꽃망울을 터뜨려야 한다고

온몸에 힘을 준다

매화나무가 절집 처마선과 이마를 마주하는 동안

여기에 발자국을 찍은 중생들은 모두 엎드려

밥값을 해야 한다고

매화 같은 부처님 말씀 영각 앞마당에 그득하다

 

 

 

 

[은상] 대나무 / 강문석

 

비에 젖어

파르르 떨면서

마디 하나를 새긴다

 

하늘 향하여

한 뼘을 내디디며

지나간 날에 매듭을 짓는다

 

마디 사이로 대나무는

파란 바람 소리를 내는데

 

마디 사이로 대나무는

여린 잎 새를 피우는데

 

우리는

하늘 향하여

몇 번의 마디를 새기었는가

 

세상 향하여

파란 바람 소리를

어디 낸 적이 있었던가

 

 

 

 

 

[은상] 의자의 슬픔 / 곽향련

 

의자가 기울어진다

앉았던 내가 일어서면 중심이 스르르 풀리며

뒷모습을 보이는 의자

어디가 잘못됐지?

다리를 잡고 고장 난 흔적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내게서 등을 돌린 반점 같은 희미한 기억이 있지

그때, 내 등의 서늘함을 껴안느라 며칠 밤을 설쳤다

의자가 네 개의 다리로 앉아 있다는 것은 나의 착각

그것은 제 슬픔을 몸속으로 웅크린 모습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내 서늘한 등을 껴안아 준 의자

등과 머리를 받쳐 주면서도 고통을 참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

이제는 낡은 제 등을 한 번 보라고 내 등을 떠민다

온 종일 내 몸을 그에게 맡기고 앉아

밥을 먹고

휴식을 하는 동안

그는 늘 서서 일해야 하는

한낱 도구일 수밖에 없는 슬픔, 그 안에서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는 늘 나를 위해 삐걱삐걱 울었다

 

 

 

 

[은상] 죽변, 아침바다 / 김춘기

 

바다가 출산중이다

어둠의 주름을 열며 에밀레종처럼 머리를 내미는 해

붉은 양수가 비릿하다

탯줄을 끊고도 바다는 쉼 없이 괄약근을 조이고 푼다

물의 부드러운 근육을 겹겹 쌓아올린 산맥이

바람을 앞세우며, 달려온다

파도가 볼륨을 낮추자

선장의 늙은 심박동이 빨라진다

어부의 투박한 손이 일제히 그물코에서

가지처럼 곧은 게의 다리를 풀어낸다

붉은 해도 함께 줄줄이 건져 올린다

만선의 깃발이 오르자, 바다는 다시 숨이 가쁘다

 

파도를 한 장씩 끌고 온 배들이

항구에 가슴을 내려놓는다, 스티로폼 상자가 하얗게 쌓인다

붉은 피부를 접고 펴는 게들의 몸짓

그 광경을 서로 응시하는 깨알 눈빛

태양을 숭배하던 울진대게

다리의 마디마다 힘을 압축한 집게로

허공의 뒤꿈치를 물고 있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씩 높아진다

갈 길이 정해진 게들이 트럭에 실린다

제 몸을 공양하기 위해 기도하는 게, 그 모습이 숙연하다

바다는 하늘을 몇 만평씩 끌어내려 다시 물밭을 경작한다

파도의 등성이마다 물꽃이 만개하는 바다

물밭의 깊은 골마다 어부의 숨소리가 가득하다

 

 

 

 

[은상] 청초한 신맛 / 박종영

 

매실나무 꽃 진 후 아흐레쯤 지나

솜털 보송보송 야무진 씨방,

철딱서니 없는 3월의

심술부린 눈발로 오돌오돌 추위 탄 어린 열매,

그런 줄도 모르고

선묘 옆 묵밭에 외로움 달래려 심은 청매실 열 그루,

오늘, 낯설게 찾아가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예년 같이

콩알보다 더 컸을 열매 보이지 않는다

찬찬히 살피니 가지 뒤에 숨어 두려운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씨방 몽구리던 날,

된 눈 맞아 눈시울 얼었으니 몸을 사리는 것이다

안쓰러워 몇 개 안 열린

어린것들 만지려니 웬걸, 날 가시가 콕콕 달려든다

이게 자식 키우는 어미의 본능인가?

손아귀로 가슬한 밑동에 힘을 주니

그제야 경계를 풀고 대견스레 안기는 풋풋한 웃음,

빙그르르 입안에 고이는

청초한 신맛!

 

 

 

 

[동상]백 / 박병준

 

동백꽃 송이 하나

또,

뎅그렁

햇살에 베어

떼구르르 자지러지다

 

한 목숨이

한 목숨을 이끌고

이제 막 지상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설 때

잡을 수 없어

잡을 수 없어

새파랗게 울며 떠는 나무가지들,

진양조의 바람은 중모리로 흐르고

꽃들의 산조(散調)

뎅그렁 뎅그렁

그여 눈부시게 누운 바다로만 떨어지고

 

이대로 보낼 순 없어

이대로 보낼 순 없어

뿌리까지 흔들며

중중모리로

자진모리로

떨고 울부짖고 소스라치는

저 동백의 멍든 몸뚱아리들

 

거제도 해금강,

국도 14호선의 눈부신 오후 한 나절

 

 

 

 

[동상] 저 부추전처럼 / 강하주

 

부추전을 부친다

부추, 당근, 양파, 홍합, 땡초

서로 서로 섞이며

노릇노릇 익어간다

맛과 맛이 어우러져

향과 향이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을 이루는 부추전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저 부추전처럼 한데 어우러져

천천히 익어가는 것

나의 일상도

둥글둥글 잘 어우러지고 있는 것일까

노릇노릇 맛깔 나게 익어가고 있는 것일까

서로의 맛이 되고 서로의 향이 되어

서두르지 않고 어깨 나란히 나아갈 때

부추꽃 향기 푸르게 깨어나리

속 깊어지고 마음 더 여유로워 지리

 

 

 

 

[동상] 금강 하구둑 / 심은석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낮과 밤을 만드는 경계선에

강물과 바닷물이 넘나들면서

민물고기 바닷고기 은색비늘 드러낼 때

물새와 바닷새의 날개 짓이 부딪치는 곳

 

해마다 봄이 되면

거친 심해(深海)에 길을 만든 농어 떼

장대비 여름엔

땅위에서 흘러온 플랑크톤은 생명의 근원

계절이 바뀌는 가을이면

해와 달을 벗하여 수만리 하늘 길 만든 철새 떼

시린 눈보라 겨울엔

강 얼음 깨치는 빙어 떼

서로의 간절함이 요동치는 곳

 

하지만,

태초에는 짜디짠 황해(黃海) 내륙까지 밀려와

고달픈 벼농사 망친 농(農)꾼들이

강나루 외로운 나룻배에 슬픔 실어 보기도 전에

서러운 장맛비는 싯누런 탁류(濁流)로 할퀴고

민초(民草)의 꿈 쓸어버리던 금강(錦江)

반만년 한(恨)서린 충청, 호남양안(겱岸)이

이제는 6차선 제방도로 뻥 뚫려 하나 되었고

군장(群張) 산업단지로 비약(飛躍)하는데

본래 인간이 소망하여 만들었지만

자연생태가 다시 만든 금강 하구 둑

 

이다지도

세상의 온갖 생명들이 팔딱대는

이곳은

해상(海上) 이며 지상(地上),

그리고 사람 사는 하늘아래

낙원(樂園)이리라.

 

 

 

 

[동상]화대교 / 전재필

 

여의도 봄꽃의 하얀 꽃빛이

양화진으로 흩날리던 봄날이었을 것이다

강물이 바다냄새를 품고

무겁게 푸른 물고기를 쏘아 올린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도

바다는 배부르지 않고

흐린 정오의 한켠에서

먹물같은 노래가 나에게로 역류해 온다

이 강물에 뛰어들면 죽을 수 있을까

모르고 몸을 던지면 모든 것은 바다로 갈 것이다

양화대교 위에 서 보니 알 것 같다

모든 죽음이 아래로만 떨어지지 않고

이별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며

견디지 못할 사랑도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음을

봄날에 용케 양화대교를 건너는 사람들은

배부르지 않는 바다와 친구였을까

바다냄새가 나는 강물속에는

모르고 사는 내가 푸른 물고기로 살고 있다

 

 

 

 

[동상] 부산역에서 / 정태교

 

경부선 열차를 따라 내려온 눈들은

더러는 역 광장에 몸을 풀었다

발길에 채이고

들것에 실려 나가기도 하면서

고단한 몸 일으켜 세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문경새재 험한 길 넘어온 몸이라고

허연 비늘 돋우는 눈들

바람에 쓸려 나가도

건물 귀퉁이에서 다시 스크럼을 짜고 있다

열차는 쉴 새 없이 눈들을 실어 나르고

분분한 눈발에 섞여 거리로 나서면

이 밤 다들 어디론가 총총히 걸음을 옮기고

불빛이 더없이 그리운 것인지

눈들은 가로등 아래서 서성이고 있다

어깨에 묻은 눈을 털면서

버스가 올라가는 산복도로를 몇 번이고 바라보다가

광장을 뒤돌아보면

희미한 포장마차의 불빛 너머로

눈들은 축복처럼 내리고 있다

 

 

 

 

 

[동상] 3월 / 진서윤

 

밤새 잔잔하게 비가 내렸는데요

 

흙 비린내에 취해 슬금슬금 달아오른 홍매화도

 

꽃가지가 붉어지기 시작했는데요

 

슬쩍 스커트만 들추다 말고

 

이월이 눈 흘기며 달아나기 시작하는데요

 

 

 

 

 

 

[동상] 재개발구역 / 홍만희

 

가벼워진 몸,

개망초 꽃망울 터뜨리고 있다

알토란같은 생애위로

소리 낮게 드러내며

아무도 훔쳐보지 않는 출구에서

몸을 숨기지 못한 채

발돋움하고 있다

어느 한곳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이웃의 얼굴들

변두리로 쫓겨

겹겹이 껴입은 세간살이

세상에 던졌을 부풀은 꿈들을

곱씹는다

아물지 않는 근심은 공복이 되어

생의 뒤편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수많은 햇살 담그며

앞 뒤 가릴 것 없는 삶

마주 오는 바람조차

비켜서지 못하고

젖어들은 처마밑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둔

햇살을 어루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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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아이 / 김영희

 

아이는 물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반쯤 걸친 점퍼에서 봄이 어정거린다.

아이가 가고 그 자리에 서서

물밑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산이 있고

집이 보였지만

사람모습은 없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는 저만큼 가고 있다.

아이를 부르려고 입을 벌렸으나

너무나 조용하여

소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다시, 물속을 내려다본다.

물결이 바람을 몰고 다닌다.

피라미새끼하나 보이지 않고

바닥은 말갛다.

 

아이는 좁고 긴 둑길 끝으로 멀어지고 있다.

 

물에 햇살이 바스라 지며

조각조각 떠다닌다.

반짝 돌아보는 아이, 빛이 모아진다.

 

 

 

[우수상] 명파리에서 / 김철향(본명 金滿年)

 

1

더는 갈 수 없어

7번국도 끊어진 길 위에서

나는 오랫동안 북녘 땅을 바라보았네

녹슨 바람 가르며

오래전에 떠난 길 하나

묵은 곰솔 수북이 키우며

아슴아슴 늙어가고 있었네

저 길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가면

은모래 넘실대는 명사십리지

저기 구선봉 발아래 잠길락 말락

가뭇이 떠있는 섬이 해금강이지

걸어서 시오리 길

흐린 날에는 바다 새 울음소리도 들리지

송곳니 세워 가르릉거리는 철책너머로

통절痛切한 길 하나

그렇게 가물가물 울먹이고 있었네.

 

2

허리 잘린 절개지

명파리 바닷가에는 언제부터인가

기다림에 짓무른 눈빛들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었네

그리움도 오래되면 박제 되는 걸까

명태처럼 쪼글해진 눈빛들

쪽빛대문에 걸어놓고

낡은 세월 한 올 한 올 깁고 있었네

허기진 기억 한 톨이라도 붙잡고 싶은지

구부정한 지팡이 탁탁 치며

밀려오는 졸음 쫓고 있었네

먼 바다로 늙은 귀 열어 두고

나즉한 해조음 따라

느릿느릿 북향 길 떠나고 있었네

 

3

이제 그만 통문痛門을 열어야겠네

어메 허리춤에 촘촘히 박힌

녹슨 대못 불끈 뽑아

꽃삽을 만들어야겠네

들쭉 꽃 애기진달래 빼곡히 심어

톡톡 꽃물 터지는 소리로

한나절 울어 누울 꽃밭을 만들어야겠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네

툭 터진 실핏줄 따라

아배 떠나오던 쑥국 길

절룩이며 걸어가야겠네

철책 마디마다 말간 혈이 돌아

찔레꽃 하얗게 피어나는 길을 살아서

살아서 돌아가야겠네

늙은 길이 돌아눕기 전에,

 

* 명파리: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휴전선 접경마을로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우수상] 날치횟집 / 지영환

[우수상] 별이 빛나는 밤에 / 임종훈

 

[장려상] 지금은 참선 중 / 정승렬

[장려상] 나에 사알던 고향은 / 정영채

[장려상] 나는 죽어야 산다 / 문영일

[장려상] 부두의 꿈 / 박현조

[장려상] 유년의 가을 / 김태옥

[장려상] 섬진강2 / 정윤순

 

 

 

[심사평]

 

예년에 비해 응모 편수가 점차 늘어 가고 있다는 것은 퍽 반가운 일이다. 올해에는 총 응모 편수2818편 가운데 시 작품이 1913편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마지막까지 올라온 작품들은 상당한 수준작들이었다. 시의 구성력, 이미지 처리, 그리고 리듬과 호흡들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인다운 신선감은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기성인들의 시적 분위기보다는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고 참신성을 주는 시가 오히려 성장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우수작으로 뽑힌 김영희의 '아이'는 호수 주변을 거닐며 물속에 투영된 내재적인 세계를 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심도 있는 이미지화에 호감이 갔다. 일상어를 무리 없이 구사한 작품으로서 엄밀한 시적 구조와 의미의 명징성이 드러나 있고, 리듬감 있는 구성력을 높이 사 최우수작으로 결정하는 데 이의가 없었다.

우수작으로 선정한 김만년의 '명파리에서', 지영환의 '날치 횟집', 임종훈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범한 소재에서 정제된 언어를 가지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세 편 모두 주정적인 이미지의 내면세계가 차분하게 형상화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시의 내용이 쉽게 전달되고 있다.

장려상으로 뽑힌 정승렬의 '지금은 참선 중'외 다섯 편도 우수작에 거의 근접한 수준들이었으나 안이한 시적 발상, 시적 구조와 섬세한 시적 표현 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끝으로 이름을 숨겨 응모한 기성이 있거나 표절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후보작 세 편을 예비해 두었음을 밝혀 둔다.

이제 문단의 일원으로 등단의 영예를 안게 되는 최우수작 입선자(月刊文學당선자와 동일한 예우를 받게 됨-편집자)와 그 밖의 입선자들의 치열한 투혼과 미래를 기대하면서 더욱 분발해 주기를 바란다.

 

- 권용태, 신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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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피리구멍 / 이승은

 

난, 몸 속살 파내고

음(音)을 숨겨놓은 피립니다

 

구멍을 다 막으면

슬픈 음이 나옵니다

 

들숨 날숨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구멍을 열어주면

맑은 노래를 들려주겠습니다

 

그렇다고 구멍을 다 열진 마십시오

하릴 없이 가벼워집니다

 

숨을 아껴가며 찬찬히 막아줘야

웅숭깊은 노래가 나옵니다

음이 제대로 나오게 다른 구멍도 막아주세요

 

다 막혀 있지 않아

다 열려 있지 않아

 

내 노래가 둥근가 봅니다.

 

 

 

[우수상] 어머니의 바늘은 실을 물고 있었다 / 서문창

[우수상] 행복한 김장 / 지영환

[우수상] 낚시 / 조영웅

 

[장려상] 조장 / 임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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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구직 / 이기호

[장려상] 관찰5 / 김동선

[장려상] 마음찍기 / 엄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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