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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얼굴  / 오정국

 

 

기꺼이 무릎 꿇고 절을 하듯이, 머리를 진흙 속으로

들이밀고, 벌거벗은 궁둥이만 보여주시는

나의 어머니, 저렇듯 얼굴을 뭉개어

진흙이 되셨으니, 그 기쁨 홀로 누리시도다

진흙을 쳐발라 출구를 봉해버린

참나무 불길을 견디시고 이기셨으니

그 고통 세세연연 당신 몫이옵니다

  

타관을 떠돌던

낡은 가방 내려놓고

露宿의 험한 망치와 목장갑을 등 뒤로 감추고

이마에 재를 바르듯, 당신께 나아가

두 볼의 눈물을 경배하고자 하오나

얼굴을커녕 발가락마저

궁둥이로 눌러서 감추어 두셨도다

  

진흙 속으로 캄캄하게 묻어 버린 눈, 눈꺼풀을

어떻게 열고 계신지, 진흙을 눌러 붙인

사방의 손자국을 둘러보는 것인데,

오, 엉덩이로만 빛의 윤곽을 느끼시는

니의 어머니

 

 

 

파묻힌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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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야생의 허기, 야생의 꽃

 

이윽고 날이 저물고 밤낚시를 시작했을 때,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상의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통보였습니다. 처음엔 얼떨떨했는데, 낚시터의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기쁨과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느라고 대물 붕어를 몇 마리나 놓쳤는지 모릅니다. 저 혼자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며, 몽롱한 취기 속의 찌불을 바라보며 아득한 감회에 젖어들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저는 경북 영양 출신입니다.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는데, 초등학교 시절 읍내에서 시오리를 걸어서 멱을 감으러 다녔습니다. 그곳은 산그늘이 시원하고 너럭바위가 있고 물이 깊어서 소년들이 재주를 넘듯 다이빙을 하기에 그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주실마을 조지훈 선생님 생가 앞을 흐르는 시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상 통보를 받으면서, “그때 멱을 감은 효험을 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조지훈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이라고 말합니다. “거기가 어디냐?”고 되물으면, 속으로 이런 무식한!”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만큼 저에겐 크나큰 산이었고, ‘큰바위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내려주신 상을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과분한 일이 그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겁나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산간벽촌의 소년이 시인으로 자라나서 이런 글을 쓰게 됐지만, 저의 첫 장래희망은 트럭운전수였습니다. 무료한 한낮이면 감나무에 올라가서 마을 앞의 신작로를 바라보던 소년은 신작로 저 끝의 세상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트럭운전수가 되면 넓은 세상 어디든 가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래희망은 상점 간판을 그리는 간판장이 화가였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겁니다. 하교하면 곧장 동양미술사의 털보아저씨에게로 갔는데, 페인트 물감이 서로 엉기고 번지는 게 너무나 신기했고 붓끝에서 생겨나는 글씨와 그림이 놀라웠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당시 군청에 다니시던 우리 아버지를 안다고 했고, 물감통이나 붓을 전해주는 조수 일을 잘하면 십 원짜리 한두 장을 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최초로 알바를 해서 돈을 번 것인데, 그 찐빵 맛이 그렇게 달콤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 혼자 먹었습니다. 방천길을 걸으면서 오래오래 씹었습니다. 아버지나 식구들에게 들키면 그딴 짓을 하고 돈을 받았다고 혼쭐이 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향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때까지 야생의 산과 강을 쏘다니던 헐벗은 생명이었습니다. 페인트 색상들의 변화를 자못 신비롭게 생각했던 순진무구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소년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외따로 친척집에 맡겨졌는데, 그때부터 헛바람이 들었습니다. 마루의 서가에 꽂혀 있던 장식용 세계문학전집들을 빼보며 놀다보니, 그것보다 흥미진진한 성인의 세계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미궁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이었고, 시였습니다.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 제 속에서 들끓는 그 어떤 원초적 허기에 헐떡거리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 40대 후반까지 신문기자 일을 했습니다. 그때도 이상한 허기들이 들끓어 올라 저를 괴롭혔습니다. 대학은사이자 평생의 스승이셨던 구상 선생님의 질책과 독려로 등단을 했지만, 주위에선 저를 시인이라기보다는 기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마음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속이 쓰렸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앙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렇게 낚시터에 혼자 앉아 있었듯이, 저에겐 문단의 벗이나 선후배가 별로 없습니다.

 

저는 변방의 북소리였습니다. 그렇게 시의 수자리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저는 시를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와의 화해나 해석이 아닌, 이 지상의 형상이나 관념과의 싸움이지요. 주위에서 도시의 블랙홀’, ‘서울지옥의 묵시록이라고 칭한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낸 이후 틈만 나면 낚시터와 산, 계곡을 떠돌았습니다. 직장을 대학으로 옮긴 뒤엔 방학을 맞으면 사막이나 오지를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물질의 도시물화(物化)되는 인간을 못견뎌했고, 어떻게든 저를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거칠고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저는 야생의 허기를 보았고, 제 생명의 허기를 보았고, 생식(生殖)의 굶주림을 보았습니다. 그게 바로 시의 빛이며, 저의 숨구멍이란 걸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년시절의 원초적 허기들이 핏줄처럼 살아있었던가 봅니다. 그게 이번 시집 파묻힌 얼굴진흙들연작에 파묻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이번 시집을 보고 무슨 제목이 이렇게 끔찍하냐?”고 했습니다. 시집 제목을 피 묻힌 얼굴로 잘못 읽은 것인데,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니, 정말 시란 피 묻힌 얼굴일지 모른다고 여겨졌습니다. 생의 처연한 허기들이 거기서 꽃처럼 피어나고, 저는 그것을 훔쳐먹고 훑어먹고 퍼먹고 파먹는 몸 하나였습니다. 애당초 저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지훈 선생님의 풀잎 단장(斷章)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란 구절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이 글을 쓰는 초저녁, 봄꽃은 만개했고 바람이 참 시원합니다. 이제 곧 산책을 나설까 합니다. 저는 최소 하루 한 시간은 걷고자 합니다. 북한산 둘레길이나 시장바닥을 걸으면서 혼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절름발이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뭔가 달라집니다. 제 몸의 호흡에 발맞추어 이상한 리듬이 찾아옵니다. 그걸 잽싸게 느끼고 받아 적습니다. 외부에서 밀려들어오는 숨결과 제 호흡이 하나의 박자를 이룰 때, 거기서 시의 리듬을 느끼고자 합니다. 헛소리를 하듯 자꾸 말을 중얼거리다 보면, 또 다른 말이 불려나옵니다. 구상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언령’(言靈), 그러니까 언어의 영혼인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사용했던 무수한 이들의 귀신이 거기에 달라붙어서 자신의 목소리도 한번 불러내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걸 또 잽싸게 받아 적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스승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신, 불교에서 말하는 십악(十惡) 중의 하나인 기어(綺語)의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장님처럼 눈을 감고 걸어보기도 합니다. 눈을 감은 뒤의 이미지, 그게 참 재미있습니다. 저는 북한산 야간등산을 하기도 했는데, 시야가 지워지는 대신 청각과 후각, 촉각이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날 줄 몰랐습니다. 그 언제나 찰나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이 저에게 안겨준 생의 감각들이 눈부시고 아프고 처연했습니다.

 

이제 또다시 장엄한 허기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유년시절 이 세상을 향했던 호기심과 시인이 되고자 했을 때의 초발심을 되짚어봐야 할 때입니다. 방학이 되면 백담사 만해마을이나 원주 토지문화관의 창작실을 찾았듯이, 또 다시 저를 유폐시켜야 합니다. 이즈음에 와서 자못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제 시가 왜 아직도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현대시이면서 현대시가 아닌 시, 이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요? 이런 질문이 또 저를 괴롭힐 것 같습니다.

 

정말 과분하고 영광되고 겁나는 자리입니다. 수염을 쓰다듬으시며 허허허 웃으시는 구상 선생님의 얼굴을 오늘따라 너무 뵙고 싶고, 큰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고향의 까마득한 후학에게 이토록 커다란 격려를 내려주신 조지훈 선생님, 우러러 존경해온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나남출판사와 지훈상 운영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저에게 여러 차례 창작공간을 내준 백담사 만해마을과 원주 토지문화관 측에도 감사드리고, 제 삶의 허기진 시의 길을 묵묵히 믿어주고 받들어준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저보다 앞서서 이 상을 받으신 시인들의 존함과 이 문학상의 정신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눈먼 자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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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문학상의 심사규정에 따라 지난 2년간 출간된 성과들 중에서 심사위원 3인이 추천한 시집들은 다음과 같았다. 고진하 거룩한 낭비,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조용미 기억의 행성, 오정국 파묻힌 얼굴, 김진완 모른다, 장석원 역진화의 시작,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위의 시집들은 지훈문학상의 수상후보로 손색없는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2주간의 검토를 거친 후, 수상작을 선정하는 회합을 따로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고진하, 조용미, 오정국 세 시인의 시집으로 범주가 좁혀졌고, 다각도로 의견을 교환한 끝에 오정국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거룩한 낭비는 시인의 자의식이 선명한 진정성과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의 행성은 삶의 기미(機微)들을 풍경의 굴곡으로 섬세하게 표현해내었다는 것으로 탁월한 시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파묻힌 얼굴이 수상시집으로 결정된 것은 시집 전체를 긴장시키는 주제와 언어의 치열성이 고려된 까닭이었다.

 

그동안 오정국 시인은 실존의 불가지적 형상들을 시로 간파하려는 의욕을 실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시학적 성취로도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었다. 특별히 파묻힌 얼굴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진흙이라는 무정형의 대상을 통해 존재와 만나려는 그의 끈질긴 집중력이 시의 세계를 한층 심화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은폐된 실체에 가 닿으려는 시인의 열의만큼 뜨겁고 통절한 무엇이 있었다. 결핍과 헐벗음뿐으로 세계와 조우하려는 그의 힘겨운 고투는 마침내 실존의 근거를 돋울 새기고, 근원의 자리로까지 독자들을 안내한다. 한국 현대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그의 사색은 의미가 깊다.

 

심사위원 성석제 황동규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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