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문학상에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올해는 1,000편 가까운 작품이 투고되었다. 전태일의 정신을 기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에 우리는 놀랐지만 우려하기도 했다. 문학상의 취지에 동의해서 응모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전태일문학상조차 타락한 자본가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냥감으로 전락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많은 응모작 중에서 <들리지 않는 발소리> 외 5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안전화, 기게 소음, 주물과 목형, 잔업, 구조조정 등의 시어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장 생활의 면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련된 듯한 표현들이 노동 현실을 가볍게 하고, 설명식 문장들이 작품의 긴장미를 약화시키는 면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좀 더 고민하며 작품활동을 하길 기대한다.
이 빡에 <금속질의 빗소리> 외 작품들은 노동과 관계된 제재들을 아주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었지만 진정성을 주지 못했다. <공단 골목 수제 과자점> 외 작품들은 소시민의 일상을 차분하게 잘 그렸지만 아무래도 사회 인식이 약했다. <순이> 외 작품들이나 <신사임당 초중도병>의 경우도 유사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힘내라, 병아리> 외 작품들은 수준차가 심해서 아쉬웠다. <정치인의 식사 예절> 외 작품들도, <경우 2년, 결국 2년>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영 악화를 구실로 생산직 노동자를 대규모로 해직시킨 회사에 대항하기 위해 ㅋ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 여성을 응원하러 간 시민들을 경찰이 구타하고 체포영장이나 소환장을 발부하는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 일용직 노동자가 장마로 인해 일거리가 끊겨 자살하고 말았다. 전태일의 정신을 40년 동안 실천해온 이소선 어머니가 쓰러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시를 응모한 분들이나 시를 읽을 우리나 사회 인식을 더욱 가져야 할 것이다. 투고한 모든 분들께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만리장성은 어디에나 있죠. 너덜거리는 생활정보지 뒷면에서 찾았다면, 지금처럼 뭘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별로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는 토요일 오후일 수도 있고, 신발장 구석에서 발견했다면, 열두 번쯤 이삿짐을 쌌다 푸는 중인지도 모르죠. 삼박 사일 코스 여행을 떠올린다면, 구식 냉장고 옆구리에 붙은 만리장성 하고는 거리가 멀 수도 있죠.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배달해 준다면, 여기처럼 원룸이나 고시원이 많은 동네일지도 모르죠. 만리장성이 있는 골목 깊숙이 들어가면, 자장면이 30원일 때쯤 태어난 남자가, 와서 먹으면 천 원을 할인해 주는, 옛날짜장을 먹으러 가는 뒷모습이 보일지도 모르죠. 기름때 낀 주방 안에서 볶음밥을 만드는 여자는, 오래전 자장면은 배달하는 남자와 만리장성을 쌓았을 수도 있죠. 채널을 돌리다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오는 토요일, 아프리카 아이의 검은 눈과 마주치죠. 자장면을 기다리는 나를 보고 말하죠. 옥수수죽이라도 실컷 먹고 싶다고, 옥수수죽과 자장면 사이에 만리장성이 보이죠. 물을 길으러 점점 멀리 간다는 아이의 나뭇젓가락 같은 다리에서도, 내가 쓰다가 만 이력서의 숫자에서도 보이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자장면이었던 아이가, 그냥 자장면이나 시켜먹을까 하는 어른으로 불어 터져 있는 저녁, 만리장성 위에는 한입 베어먹은 단무지 같은 달이 떠 있죠.
리얼리즘적 경향은 작가들에게 시대의 평균적 사회의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중문학, 노동문학 작품들은 사회학에 주눅이 들거나 그에 충실하려고 하는 경향도 보입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은 오히려 사회 의식적 관계에서 패착된 현실적 난관을 감각적으로 뛰어넘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사회적 역할을 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시대적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신인에게 우선적으로 신선한 감각을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선을 거친 아홉 분의 시를 읽고 우선 세 분의 시를 추려보기로 했으나, (가)(18-2-다-075, 표제시 ‘째깍째깍.....’), (나)(18-1-다-181, 표제시 ‘금 캐는 시간’), 두 분의 시에서 일치를 봤습니다. (가)의 시는 상상의 자유로움과 표현의 기교면에서뿐 아니라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우면서 독특한 시각도 돋보였습니다.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랜 시간 습작으로 단련했음직한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중적 삶을 미화하거나 과장하거나 엄살을 떨지도 않고, 한발 물러선 관찰자의 입장도 거부하면서,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껴안으려는 자세와 이를 깊이 천착해가려는 노력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소양과 저력을 키워온 것 같습니다.
두 분 가운데 삶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전태일 정신을 살려내는 쪽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나)의 경우 투고작 모두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다소 가산점이 주어졌습니다.
(가)도 이미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그를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신인다운 패기로 기성 시에 주눅 들지 말고 맘껏 펼쳐 보이시기 바랍니다. 신인은 초보시인이 아니라 전위시인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지하철에서 휴대용 접착고리를 판다 쉴 새 없이 상품을 선전하는 남자 스티커에 붙은 도금한 고리가 3kg 철근을 번쩍 들어올린다 그리고 다시 이를 앙다문 고리가 5kg을 들어올린다 제 덩치보다 몇 백 배 많은 쇳덩이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하루를 지탱하고 있다 남자가 고리에게 눈을 찡끗 감는다 고리는 펑퍼짐한 아줌마 서넛을 들어올린다 졸고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깨어났다 남자가 신이 났다 고리가 있는 힘을 다해 지하철을 통째로 들어올리려 한다 절대 과부하가 없는 저 고리 남자의 생(生)도 번쩍 들어올릴 것 같은 견고하고 단단한 저 고리 좀처럼 끄떡없을 그 무엇도 번쩍 들어올릴 남자에겐 고리가 있다 남자가 구름 손잡이에 팔을 올린다 고리가 척 걸린다
본심에 올라온 열한 분의 시들은 대체로 시대적 변화의 흐름과는 무관해 보일 정도로 우직하고 정직한 사유를 펼쳐 보인다. 그만큼 노동현실과 노동자의 삶의 조건이 사회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큰 변화 없이 정체되어 있음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소외된 현실에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사회적 책임감과 의지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감각마저 현실의 중압감에 짓눌려서 고정되고 평균적인 시각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에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다. 변하지 않은 것 가운데 변화를 읽어내고, 누구나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할 때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 할 줄 알고, 집단 속에 숨어서 소리칠 것이 아니라 벌거벗고 나와 세계와 정면으로 대면하거나,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온갖 풍상을 감내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정직하지만 개성이 부족한 시들을 읽으며 즐거움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다시 읽고 나서도 두세 분의 원고를 읽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돋보이는 시들이 있어 우리를 긴장시켰다.
김후자 씨의 시들은 얼핏 보면 피상적이고 사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깊은 사유 없이 이룰 수 없는 작품들이다. 절제된 언어와 세련된 표현력 역시 적지 않은 습작에 의한 성취로 보인다. 당선작 가운데 ‘고리’는 자본주의 상품에 대한 쾌락적 추종이 만병통치약처럼 허무맹랑한 확신을 낳게 하고, 나아가 인간의 삶을 강박적으로 의탁해 버리게 하는 물신화된 현대인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그밖의 시들도 고른 완성도를 보여준다.
최일걸 씨의 ‘김밥말이 골목’은 비상구 없는 봉제공장 다국적 노동자의 일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공장이 밀집한 골목(닫힌 세계)과 목구멍(목숨)과 김밥(일용할 최소한의 양식)이 한 지점에서 만나 서로를 비추며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유폐된 노동자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밖의 시들은 긴장이 떨어지고 현실비약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두 분에게 새로운 세대, 새로운 노동시를 열어갈 전위의 의무를 지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전태일문학상에 작품을 보내주신 분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소외된 노동의 해방과 뭉그러지고 찌그러진 인간의 해방을 위해 스스로 빛의 길이 된 전태일 열사의 정신처럼 빛나는 글들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일하는 현장을 담아낸 이륜길 씨의「제305 창진호」, 김정원 씨의「오월哀」, 최늘샘 씨의「델몬트 망고 쥬스」에서는 현장으로 집중된 모순을 생생한 언어로 담아내는 힘이 빛났습니다. 그런데 함께 보낸 다른 작품들이 받쳐주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구광렬 씨의 시편에서는 의미를 끌고 나아가는 힘이 돋보였으나 응축되지 못해 아쉬웠고, 박주석 씨가 보내온 시 중에서는 「반가유상 앞을 지나다가」가 눈에 띠었지만 다른 시편들이 못 미쳐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응모한 작품 전체가 고른 시적 성취를 이룬 작품을 수상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은 전태일 사상의 핵을 이루는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실천 활동을 문학으로 왕성하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구를 충족하는 작품이 송유미 씨의「희망 유리 상회」외 2편이어서 이를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전편에서 인간 노동이 만들어낸 지혜를 새 세상의 골조로 삼아야 한다는 단단한 사상성이 돋보였고, 인상적인 면을 중심 형상으로 다듬고 그 안에 의미를 응축시키는 형상성이 좋았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 달리 현장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서 빛나는 인간적 가치를 찾아 예술적으로 드높이려는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당선작이 이를 전적으로 충족하는 바는 아니지만 출발점에 세우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송유미 씨를 “지느러미 돋는 한 마리 물고기”(「희망 유리 상회」)로 세상에 내보냅니다. 큰 진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전태일의 정신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살려내고 있는가를 심사기준으로 삼고 예심을 거쳐 올라온 많은 작품들을 읽었다.해마다 응모하는 작품 수가 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가지고 무엇을 썼는가는 물론이고 어떻게 썼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어떤 권력에 의해 억압되거나 유린당할 수 없다고 결연히 대항했던 전태일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한 것이다.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동자 계급으로 대변되는 약자들이 지배 계급으로부터 지나치게 지배받거나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 결과 이명윤의「수화기 속의 여자」외6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이명윤의 작품들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감각적이고 날렵해 자칫 가벼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자세히 읽어보면 그 안에 삶의 아픔들이 녹아 있음이 발견된다.체험의 내용들을 작품의 품격을 유지하는 요소로 만드는 성실성이 돋보였다.앞으로 자신의 삶을 보다 사회적인 의미로 담아내는 시선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면 좋은 시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송태영의「트랙터 순례자들의 노래」외2편은 상당히 긴 호흡을 가지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형상화가 잘 되어 있고 호흡 또한 유장하여 무리 없이 읽힌다.성급한 세계화의 추구에 따라 점점 위축되어 가는 농민들의 현실을 대변하면서 극복하려고 하는 정신은 그지없이 소중한 것이다.
김양진의「뒷간 천정에 목을 맨 그는」외3편은 투박한 면이 있지만 자신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담아내어 작품의 힘이 있다.가난과 멍에와 구조조정과 관계된 체험들을 인간의 가치문제로 담아내려고 한 성실성이 돋보였다.
유현아의「어머니의 청계천2」외3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려고 하는 시선이어서 좋았다.구체적인 아픔들이어서 시인 정신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밖에 김서하,박정민,김건,심은섭,최규하 등의 작품도 손을 떼기가 아까웠다.자본주의의 위력이 점점 거세지는 이 세계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계속 지키려고 한다면 좋은 작품을 쓸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에도 전태일문학상의 응모자 수가 많아서 심사자들은 즐거웠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장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인데도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이 노동문학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전태일문학상에 응모하는 예비 시인이 많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일이다. 그 연유가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권력과 불의에 맞서 헌신한 전태일의 정신이 더욱 필요한 시대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또 그 어떤 문학상보다도 전태일문학상이 가장 깨끗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심사자들은 믿고 싶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며 심사자들은 전태일의 정신을 오늘날 어떻게 살려내고 있는가를, 즉 지난 시대의 노동시가 아니라 2005년 현재에 필요한 노동시를 찾고자 했다.
그 결과 이맹물의 <비명-마이크로칩 공장>외 6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맹물의 작품들은 호흡이 상당히 길어 시적 긴장력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주제와 제재 간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극복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구체적이면서도 성실하게 담아내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상황을 비판 인식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산문적인 느슨함을 경계하면서 작품을 써나가길 기대한다.
박소란의 <겨울밤, 아기단풍>외 2편은 시적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아주 돋보였다. 다만 투고한 작품들이 우리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만큼의 힘이 약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주었다. 시가 꼭 목소리를 높이 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사상의 자장을 넓히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장종의의 <학춤>외 4편도 뛰어난 작품들이다. 소재나 제재를 달리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상상력의 폭이 넓어 참신했다. 또한 소재들을 시어로 조직해내는 능력도 탁월했다. 앞으로 작품의 소재를 선택할 때 시대성을 보다 반영하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진엽의 <철도원 부부>외 4편은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급식 빵> 같은 작품이 좋은 예인데, 삶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란 언어를 수단으로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표현력에 보다 다부지게 달라붙기를 바란다.
한편 임효림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외 4편을 특별상으로 선정한다. 작품의 수준도 갖추었지만 민주화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특별상을 수여하기로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했다.
이외에 한영숙, 공담, 홍성준, 표왕덕, 변삼학, 김륭 등의 작품에도 주목했다. 모두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좋은 작품을 쓸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전태일문학상의 응모자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간을 억압하는 불의에 맞선 전태일의 정신이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고 있다고 믿고 싶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12명의 작품을 읽으며 심사자들은 전태일의 정신을 현재적 의미로 되살리는 방법은 무엇이며, 특히 그것을 문학의 언어로 드러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 하는 점을 고민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심사자들만은 아닌 듯, 적지 않은 투고작들이 1970, 1980년대의 기억을 복원해내는 데 바쳐지고 있었다. 물론 그 과거형의 되새김질이 환기시키는 것은 결국 오늘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좀더 생생한 현재형의 질문들을 만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지만 응모자들이 시를 쓰는 태도가 진지했고 성실성이 돋보여 우려보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서상규의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인력시장과 소시장(「인력시장에서>), 농아부부의 수화와 곱사송어의 역류(<농아부부의 수화>), 노동자의 조끼 등판과 무당벌레의 경계색(<무당벌레의 경계색>) 등은 설득력 있는 유비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수준이 고른 점이 인정되지만 앞으로 더욱 좋은 시를 쓰려면 산문적인 느슨함이 엿보이는 대목들을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주영국의 <어머니의 단층집> <장마> <파장> <정읍을 지나며> <길만이兄> 등은 시적인 완결도가 높고 군더더기 없이 시어를 조직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그 유창함이 한편으로는 일정한 상투형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집중도를 좀더 가지면 상당히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김아름의 시편들은 유년의 기억을 섬세한 이미지의 직조를 통해 찬찬하게 그려내고 있다. <신림동, 봄><신림동, 여름><신림동, 겨울> 등은 일종의 연작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것은 통일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작품 사이의 변별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기성 시인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데,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정도로 지나치게 세공하다보면 오히려 시의 핵심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했으면 한다.
이외에도 장이권, 김훈희, 김 린 등의 작품이 일정한 성취와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시를 놓지 않는다면 분명 좋은 작품을 쓸 것이라고 믿는다.
'전태일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하는 제12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으로 소설부문에 김옥숙(35)씨의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가, 생활·기록부문에 정경식(45)씨의 ’결코 멈출 수 없다’가 각각 선정됐다. 시 부문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소설 부문 가작은 서창덕(37)씨의 ’꿈의 전화’와 조채운(24)씨의 ’그 많던 차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가, 시 부문 가작은 윤석정씨의 ’자목련’외 2편, 임희구(38)씨의 ’곱창’외 6편이, 생활·기록 부문 가작은 김명순(31)씨의 ’운명의 배반’외 1편이 각각 뽑혔다.
심사위원들은 “전태일 열사의 고귀한 정신을 간직하고 이어가되 현장투쟁이라는제한된 소재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다양한 우리 삶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모든 인간보편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의 주제의식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시상식은 다음달 7일 오후 5시 민주노총 서울본부 강당 3층에서 열린다. 한편 ’사회평론’은 이들 당선작과 가작을 전부 수록한 제12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품집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외)」를 출간했다.
[가작] 자목련 / 윤석정
다세대 주택을 지나면 사내의 아이들이 동네 초입 계단에 앉아 졸고 있다 노을이 아이들의 검은 얼굴로 스미면 밥을 안친 아낙들은 어둠을 집으로 당긴다 사내는 일당과 맞바꾼 돼지고기 네 근을 얇은 불볕에 굽는다 한 점, 한 점 사내의 아이들이 입을 벌리며 지저귄다 사내는 상추쌈을 싸서 아이들의 입속에 넣어준다 사내의 혀끝엔 봄 내를 덜 씻은 쑥갓처럼 쓴 약이 퍼진다 방문으로 기웃거리다가 입맛이 돋우어진 목련나무, 꽃망울에 구수한 냄새가 어린다 혹, 집주인이 잠을 털고 나와 홍자색 꽃망울을 바라볼까봐 사내는 조바심을 낸다 달빛이 소곤소곤 잠든 시각, 사내와 아이들은 오롯하게 목련보다 먼저 꽃피운다
[가작] 곱창 / 임희구
흰눈이 팡 팡 팡 쏟아지는 밤 양철 깔대기에 능글능글한 돼지창자를 까뒤집어 놓고 썩은 똥찌꺼기를 훑어낸다 돼지똥을 만진다 라디오에선 주의 탄일을 축하 축하하고 고무통 속 찬물에 담긴 돼지창자에선 죽어 나자빠질 똥냄새가 퍼진다 모락모락 퍼진다 진동한다 손가락이 얼어터져 손가락이 똥이 될 것만 같다 찜통 속 펄 펄 펄 끓는 물이 똥 뺀 창자를 기다린다 얼어터지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기가 막힌 돼지창자의 싯누런 똥냄새 울려 퍼지는 즐거운 메리 크리스마스
본선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높은 수준을 보였고, 안정감이 있었다. 특히 윤석정의 시는 구체적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대상 사물을 사람의 삶 속에 끌어들여 엮는 솜씨가 뛰어났다.
바닥에선 집 나와 서러운 지느러미들이 퍼덕거린다
출항 없이 헛물켠 그의 생활인양
빚진 자리마다 채반은 흠집투성이다
애써 살아보려 했던가
잘못 든 바닷길에서 압류당한 영혼을 채반에 넣고는
그의 굽은 등잔은 물결따라 너울지며 갯내음을 터는 중이다
- <멸치>일부
위에서 삶의 벼랑에 몰려 서울에서 내려와 멸치잡이가 된 그와 바다에서 잡혀와 말려지는 멸치는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일체가 되어 엮어져 있다. 감정과 사상을 대상 사물에 투사하여 일체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의 기본적 힘이다. 시는 불화와 갈등의 세상을 그러한 힘으로 넘어서려 한다.
그와 멸치의 삶은 모두 세상과 결렬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있지만 그 양자가 엮어져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그 힘으로 마침내 절망을 희망으로 전화시킨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멸치처럼 굽어 있던 허리를 펴고
묵직하던 지느러미도 높이 펴본다
- <멸치> 결말 부분
버려진 것, 하찮은 것들로 하여금 비늘을 반짝이듯 희망의 빛을 발하게 하는 시의 힘이 이런 곳에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시의 힘은 전태일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임희구의 시에는 삶의 절실함과 함께 구체적 사물과 현상을 통해 세상을 꿰뚫어보고 비트는 풍자성과 그것을 날렵하게 처리하는 재치가 있다.
온종일 밥그릇이나 가마솥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위장 속으로 들어갈 때를 기다리다 지쳐 굳은살
배기던 그 시절. 귀엽게 사랑받던 그때야 늘
내가 당당한 끼니로 군림했었지
(……)
무엇이 남을까? 어디에도 내가 몸 붙일 곳은 없어
간혹 손님 없는 식당에서 볶음밥이 되려고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그것은 내가 아니야 숨막히는
전기밥통 속에서 쉴 틈 없이 열 받다가 가끔 변질되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면 그때야 찬밥이 되지
- <찬밥> 일부
위 시의 화자는 ‘찬밥’이라는 사물이다. 찬밥의 시선으로 사람들의 소중한 끼니가 되었던 과거 찬밥의 처지와 전기밥통 속에서 뜨겁게 달달 볶이다가 변질되어서야 쓰레기로 버려지는 지금의 찬밥의 처지를 비교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찮은 것이 하찮은 것의 시선으로 이야기되면서 신선하고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말미에서 찬밥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로 전화하면서 우리들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편리한 첨단 문명의 사회야말로 인간을, 노동자를 결국 쓰레기처럼 내던지는 사회가 아니냐고.
썩은 찬밥이 되지.
내 설 자리가 없는 지금은 첨단 공화국
그대들도 언젠가 파묻혀 갈,
- <찬밥> 마지막 연
우리 시에는 풍자시의 전통이 미미하다. 소중한 재능을 잘 키워가기 바란다.
윤석정, 임희구의 시를 가작으로 정했다. 당선작으로 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의 시가 많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태일의 정신을 살리면서 한 시대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하는 시를 만나고 싶다는 심사위원들의 과도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올해 응모작품도 수준이 높다. “전태일”이라는 에피세트 때문에, 또 노동문학이라는 관형사 때문에 당연히 일반 현상 문예와는 일정한 수준 차가 있으리라는 예상은 이번에도 빗나갔다. 가장 좋은 노동문학은 가장 좋은 문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임성용(<저녁 무렵> 외)은 절제된 감정과 언어로 극한적인 상황을 형상화하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저녁 무렵>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작자는 흥분하지도 않고 분개하지도 않으면서 가난한 동네의 한 단면을 드러내 보이면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가난한 동네를 단순하게 형상화한 이른바 리얼리즘 시는 아니다. 가령 마지막 구절 “웃음소리 들리는 저녁 무렵/ 아이들은 저마다 한두 뼘씩 자라났다”는 작자가 보다 깊은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버려진 철근들을 주워 모아/ 곧은 진실로 펴고 불에 달구어서/ 백 년 동안 녹슬어도 좋을 기둥을 박아둬야지/ 참으로 어렵게 사람 노릇 끝내는 날/ 낡은 공구통이 내 관이 될 그 날을 위해”이라는 <착공>의 결구는 생활이 말에 의해서 완전히 체험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계단을 오르며>도 수작이다. “노동의 육체란 이렇게 날마다 해체되는 과정이다/ 어질어질 현기증을 타고 오를수록/ 오참이야말로 계단 끝까지 뻗은 역사라고 생각할수록/ 계단은 휘청거리며 소리를 낸다” 같은 표현은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리라. 그의 시들을 읽으면서 시에 있어서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결코 참됨과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임재동(<나는 모래를 꿈꾼다> 외)의 시들은 아주 재미있다. 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 같다. 특히 <나는 모래를 꿈꾼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헐벗은 삶을 황량한 사막에 빗댄 작품으로, 건설인부의 삶의 모습을 실감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먼 모랫길을 낙타도 없이 출근하고/ 모래바람을 맞으며 유랑민처럼 퇴근한다” 같은 구절은 삶의 비밀을 어느 수준 터득하지 못하고서는 쓸 수 없는 대목이다. “한 짐 가득/ 모래를 담은 바람이 도시를 배회한다/ 나는 모래 언덕에 올라/ 빛나는 먼 모래별을 바라보고 있다”의 결구로서 무언가 희망 같은 것을 암시한 것도 이 시를 빛낸다. 재생을 기다리는 고철들이 들어가 용해될 ‘용광로’와 새 생명을 낳을 산모를 대비시킨 <용광로>도 아주 재미있는 시다. 또 <식권>이나 <철야작업>도 재미있다. 특히 이름값보다 밥값을 하고 싶다는 <식권>은 단순하고 소박한 듯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형안 같은 것이 엿보인다.
이필(<우리끼리는> 외)의 시들은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시들이다. 밖에서는 아무도 내 노동에 감사하지 않지만 아내만은 내 노동에다 한 달에 한 번 절을 한다는 <우리끼리는>을 읽고 가슴이 찡하지 않은 독자는 없으리라. 결국 시란 이런 것이지 별 것이 아니다. 시의 울림도 생활의 울림에서 오는 것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실직 2>는 아버지의 실직을 딸의 위치에서 노래한 시다. 한 가장의 실직이 집안 전체에 몰아다 주는 불안과 슬픔이 실감 있게 형상화되어 있다. “엄마는 아빠 몰래/ 수북한 재떨이를 비웠습니다”도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인정의 기미를 날카롭게 포착한 훌륭한 표현이다. 노동시 하면 어깨에 잔뜩 힘을 주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이 없는 것도 이 사람의 장점인 것 같다.
김림(<낙타의 잠>외)은 시를 많이 공부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말재간도 상당하고, 시적 기교도 아주 초보는 아니다. 한데 바느질 자국이 보인다. 정말 뛰어난 솜씨라면 어디 바늘 자국이 보이겠는가. 세 편 중에서는 <낙타의 잠>이 가장 뛰어나다. 좀 모호한 대목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따뜻하고 훈훈하고 넉넉한 아버지와 아들의 애정이 자못 실감된다. <버린 沿革>은 추상화가 심하고 관념이 승하다. 그래도 시를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이만호(<온수동 파르티잔>외)의 시들은 옳고 그름이 너무 선명하다. 노동투쟁은 옳고 그것에 반하는 것은 그른 것이어서 자칫 갈등이나 고민이 없는 도식에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점,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시에서 단순성에 기인한다는 얘기다. <온수동 파르티잔>만 보아도 그렇다. 사내 네 명이 사는 동네와 그들의 삶의 서정적 기술에 이은 그들의 투쟁을 위한 결의, 말하자면 이것이 이 시의 내용인데 싱거울 것 같은 이 내용이 매우 힘이 있다. <거리에서>는 선동성도 있고 맑다. 지하철 파업이 소재가 되고 있는 <여운>도 재미있게 읽히는 시다.
구조조정이다 실직이다 해서 요즘 노동자들이 받는 시련은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현실을 반영하듯 시의 소재도 거의 실직이나 고용 불안 혹은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노동자가 당하는 착취, 박해 등이다. 국민의 정부가 서면 조금은 나아지려니 했던 기대가 무너진 데 대한 절망감, 분도 같은 것도 많은 사람들의 시에 나타나 있다.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실업일기 13’, ‘실업일기 14’, ‘안됐더먼’등 이지수의 시들이다. 일단 작중화자와 작자를 일치시킨다면 작자는 구조조정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실직을 한 것 같다. ‘어머니’라는 부제가 붙은 ‘실업일기 13’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긴긴 해 새참 내온 식빵도 우유도 마다한 채 후- 숭늉 한 양재기 벌컥벌컥 들이켜고 애비두 이젠 무슨 일이든 헤야 헐 텐데 넘새부끄러 워칙헌다니…” 시는 작은 말을 가지고 큰 얘기를 하는 것이란 말이 있지만, 이 몇 마디로 실직으로 걱정이 태산 같은 어머니의 모습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또 ‘광복 55주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안됐더먼’은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은 일절 배제한 채 노부부의 저녁 한때의 스케치를 가지고 지도자 또는 지배층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시력이 꽤 된 기성시인들로서도 쉽지 않은 일로, 작자의 솜씨가 상당한 수준임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배재운의 시도 재미있게 읽힌다. “지붕위에/ 하얗게 핀 밥풀꽃”에서 “온몸으로 불꽃과 싸우는/ 용해공”의 이미지를 보는 ‘밥풀꽃’도 재미있지만, 생일날 친구들을 초대해서 피자나 햄버거를 사줄 수는 없을 테니까 짜장면 한 그릇만 사달라는 아이의 작아지는 꿈을 노래한 ‘생일 선물’이 더 실감난다. “아이의 꿈은 자꾸 작아지고/ 아비 타는 속은 새까만 짜장이고” 같은 구절은 아무나 쓸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쉽사리 얻어지는 표현은 아닐 터이다. “용돈 좀 벌어 써야겠다고” 직장에 나가다가 이제는 남편의 고용이 불안하니까 아픈 팔 다리 끌고 기를 쓰고 직장에 다니는 ‘아내’도 오늘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시다. 배재운의 시들을 읽으면서 시는 본질적으로 현실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라는 마야꼬쁘시끼의 주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조경선의 시들은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농촌시 또는 농민시라고 하겠는데 그가 보낸 시들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쓴 것들로서, 농사꾼 냄새가 풀풀 나는 시들이다. ‘좋겠네, 도시 처녀 농촌으로 시집가서’는 그가 농촌으로 시집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노래하고 있는 자화상으로, 시가 각박하지 않고 넉넉하다. ‘동그런 밭’은 아름답다. “마침내 나도 그럴까/ 이 푸른 들판을 사랑하여/ 노동하고 뒹굴며 싸우다가/ 그대로 둥그런 밭이 될까” 같은 표현은 작자가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함께 그 마음을 말로 형상화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시는 역시 “새벽 이슬 누구보다 가장 먼저 차에 싣고/...막걸리 나르는 주조장 곽씨 아저씨”를 노래한 ‘주조장 곽씨 아저씨’다 어느 고장에도 한두 사람있게 마련인, 그래서 그 사람이 곡 시골의 풍경이 되고 있는 곽씨 아저씨가 바로 지금 술 배달을 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시다. 조경선은 사람을 몇 마디의 말로 그리는 데 특별히 재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은 잘 살리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표성배의 시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 있는 시였다. 특히 구조조정시대의 공포와 걱절감을 노동자의 아내의 독백의 형식으로 형상화한 ‘퇴출시대’는 실감도 나고 틀도 탄탄하여 울림을 준다. 그밖에 ‘겨울 둥지’를 보낸 사람의 시도 충분히 선에 들만큼 훌륭했지만 다른 여러 군데서 당선을 한 사람이어서 일부러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