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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 안희연(安姬燕)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장면을 상연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나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필라멘트

 

내 눈 속에는 돌을 안고 가라앉는 사람이 있지

누군가 내 눈꺼풀을 덮어주면

 

흰 천에 덮인 채로 말라간다

키에 맞는 나무상자가 곁에 있다

 

목덜미를 끌고 가는 새벽

나는 침대 밑에서 오래된 외투를 꺼낸다

닿자마자 물크러지는 열매 같아

연필로 그린 새가 날아가고

 

창문을 열면 나무와 하늘과 여름이

새의 무게만큼 비어 있다

 

나를 엎지르면서 또 한 대의 기차가 지나가고

 

발목을 끊고 그림자도 달아나버리고

 

살짝살짝 어깨를 떨고 있는 고요

나는 우산을 접으면서 작아진다

 

 

 

 

입체안경

 

스크린은 도로를 감추고 있다.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간다. 차창마다 똑같은 옆모습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를 가졌지.

 

버스를 그려서 그 안에 버스를 구겨넣었어. 원을 그려서 그 안에 얼굴을 구겨넣듯이.

 

긴 커브를 돌았다. 두 겹으로, 네 겹으로, 여덟 겹으로…… 흩어진다는 것. 목이 등 뒤로 돌아갈 때의 속도 같은 것.

 

손잡이는 말했어. 한 곳에 오래 머물기 위해 유연하게 흔들리는 법.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손을 내려도 여전히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있지. 오분 전의 얼굴. 삼십초 전의 가로수. 나는 나로부터 불시에 멀어지고

 

의자가 조금 흐트러진 것 같은데. 나는 의자의 구조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키 크는 일에 관해서라면 나도 조금 할 말이 있어요 허물어지는 계단을 달려와 단숨에 뛰어내리는 일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킥킥 비행기가 된 것 같지만 폭죽처럼 온몸은 터지고 바닥엔 흩뿌려진 색종이들 나는 아름다운 착지를 꿈꿔요 옥상은 매일 밤 높아져요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지요 나는 뺨이 붉은 소년이었다가 잇몸만 남은 노인이었다가…… 지금은 철길 위에 꼼짝없이 묶여 있네요 경쾌한 기적을 울리며 기적 없이 다가오는 것들, 바퀴가 끌고 갈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토막 난 허리를 상상하면 거짓말처럼 배가 고파요 얼굴을 뒤적이다가 가는 고양이들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어제 죽은 내가 전하는 안부 같아서 나는 양팔을 벌리고 검은 해일을 안아요 다음 장면에선 비가 오고 철골만 남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습니다 이곳에선 내가 주인공이에요 모자를 썼다 벗었다 쓰면서 스러져가는 불빛을 흉내내죠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괜찮아요 가위를 든 손이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져도

 

   꽃병에 꽂혀 있는 흰 뼈들 성냥으로 만든 집은 자주 흔들립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금 전 내다버린 상자들이 도착해 있고 창문은 추락을 보여줄 때 가장 선명해지지요 창밖의 아이들은 온종일 머리통을 공처럼 굴리며 놀아요 소매가 더러워지도록 땅을 파면 몸통들이 웃고 있고

 

   나도 따라 환하게 웃어봅니다 누군가 또 나를 찢고 달아나요 나는 다시 빛나는 눈을 가진 맹인이 되어…… 맹렬한 불 속에서…… 진짜 죽음이 와도 완성하지 못할 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벽에서 태어난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와요

 

 

 ▲ 안희연 / 1986년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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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제12회 ‘창비신인시인상’에 접수된 426명의 원고를 심사위원 3인이 한달 간 검토했고, 각자 3명 내외로 2차심에 추천했다. 이들의 원고를 약 2주 간 집중 검토한 후 10월 18일 최종회의를 진행했다. 시를 통해 실패를 무릅쓰고 세계라는 감성공동체에 지속적으로 참여해나갈 강한 의지와 체력이 엿보이는 신인을 우리는 만나고 싶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언어가 인상적이나 알맞은 그릇에 담기지 못해 언어의 긴장감과 시적 전개가 다소 정체되어버린 김지은의 시편들을 아쉽게 내려놓으며, 최종적으로 심도 깊게 논의한 것은 김숙, 안희연, 장혜령 3인의 작품이었다.

   김숙의 「저녁의 저울」외 5편은 탄탄한 서정을 갖추었고 언어를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서정적인 언어를 지루하지 않고 세련되게 다루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특히 표제작이 매우 아름다워 오래 붙잡고 있었다. 응모된 거의 모든 시편들이 큰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다른 시적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의지가 다소 약해 보였다. 시의 매혹은 어떤 완성에서 온다기보다, 지금껏 내가 내딛지 못한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가는 중에 낯설고 막다른 상처처럼 얻어지는 듯하다.

   장혜령의 「이방인」외 9편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 특히 「이방인」은 수작이다. 사유는 날카로우며 유연하다. 언어는 개성적인 에스프리로 흠뻑 젖어 있다. 돌발적으로 툭 던져지는 듯한 구절은 시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놀랍게도 뚜렷한 하나의 전언을 향해 화살표처럼 모여든다. 장혜령은 당선자가 결정되기 직전까지 우리를 고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고심을 「이방인」이라는 시를 통해서만 주로 안겨줬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이방인」을 통해 보여준 강점들이 거의 발휘되지 않았다. 만약 「이방인」이 이번에 응모한 시편들 중 비교적 최근에 창작된 것이라면, 장혜령은 지금 명백히 도약하고 있는 중이다.

   안희연의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외 9편은 매우 감각적인 언어를 수집하고 배치하면서도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의 진폭을 상당히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것은 진지한 고투의 산물이다. 동시에 실패를 무릅쓰고 부단히 다채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조탁된 시의 행간에는 침묵이 생명체처럼 도사리고 있고, 그 침묵이 주는 텐션은 매혹적이다. 이 모든 덕목은 최근 신인들에게 그리 흔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현재보다 미래를 더 기대할 수 잇다는 점에 신뢰를 보내며 당선자로 선정했다.

   심심찮게 관찰되는 무거운 추 같은 미완의 세계를 발목에 매달고 난바다를 건너 또 다른 시의 영토로 한 번 더 도약하는 것은 지금부터 온전히 그의 몫이다. 앞으로 있을 그 고투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부디 매혹을 선사해주길. 이 새로운 시인이 우리의 예감과 기대를 멋지게 증명해주길 부탁한다.

 

      [심사위원] 김중일, 박성우,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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