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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_ 가정(외 4편) / 최지은

 

                                                심사위원 : 이영광 문태준 신미나 박준(이상 시인)

 

가정 (외 4편)

 

   최지은

 

 

 

우리는 말이 없다 낳은 사람은 그럴 수 있지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동생을 나눠 가진 사이니까

그럴 수 있지

 

저녁상 앞에서 생각한다

 

죽은 이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한 사람이 완성된다

 

싹이 오른 감자였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푸른 감자

엄마는 그것으로 된장을 끓이고

우리는 뱃소리를 씹으며 감자를 삼키고

이 비는 계절을 쉽게 끝내려 한다

 

커튼처럼 출렁이는 바닥

주인을 모르는

손톱으로 주웠다

 

나는 몰래 그것을 서랍 안에 넣는다

서랍장 뒤로 넘어가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서랍을 열면 사진 속의 동생이 웃고 있다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다

환한 햇살이 완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우리가 눈 감으면

우리를 보러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 있었다

 

 

 

기록

 

 

 

구름을 그리던 손이 젖는다

 

주먹을 쥐면

구름은 작아질까

비가 올까

 

구름을 보며 코끼리를 생각한 적은 있어도

코끼리를 보며 구름을 떠올린 적은 없지

 

이런 내가

구름을 완성할 수 있을까

 

테두리를 모두 닫아도 되는 걸까

 

열린 선과 선 사이로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고이고

소문이 있고

그 밑에서 하염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의

아이와 아이와 아이들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소녀와

소녀의 이마 위로 떨어지는 하나의 빗방울을 생각한다

 

붓을 놓으면

이미 젖은 그림이다

 

창밖에는

검은 물이 가득하다

 

 

 

내가 태어날 때까지

 

 

 

   걷고 있다고 말했다 밤이라고 말했다 그대들은 밤에 어울리는 어둠을 찾았다 눈동자처럼 깊은 어둠이었다고 하자 그대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걷고 있었다 서로의 부은 손을 잡고 있었다 방 한 칸을 얻으려 했다 깊은 밤을 배경에 두고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가 되려고 걷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노래를 만들었다 포개진 유리그릇처럼 어울리는 몸이었다 둘은 노래 속에서 다른 몸이 되어 갔다 나는 끝없이 노래를 이야기했다 그대들이 만들어내는 멜로디 안에서 노래는 완성되고 노래 속에서 여자의 몸은 붓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했다 나를 낳은 사람과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들의 이야기 끝을 모르는 이야기 나는 작아지기도 했다 팔과 다리를 집어넣고 기억을 지우고 끝으로 끝으로 뒷걸음질하기도 했다 깊은 밤을 배경에 두고 걷고 있었다 이야기는 나를 환대하며 앞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태어나고 있었다

 

 

 

우리들

 

 

 

   심야버스였다. 내릴 곳을 몇 정거장 앞에 두고, 밝은 빛이 덤벼드는 검은 도로 위에 있었다. 우리들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냉장고에는 내가 오면 나누어 먹으려던 한 소쿠리의 무른 딸기. 잘자리에 과일을 먹어 어쩌니. 우리 중 한 사람이 말하고. 자꾸만 흐르는 과즙. 말없이 과일을 입에 물고서. 우리는 이불과 이불을 덧대어 잠자리를 만든다. 이불을 덧댄 자리에 서로 눕겠다고 조그맣게 같이 웃고. 이제 자야지. 그래 자야지 그만 자야지. 미루고 미루는 잠. 먼저 잠드는 사람이 있고 잠이 들려 하는 사람이 있고. 잠들기 위해 먼 길을 온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깨어 있기로 한다. 어금니에 낀 딸기 씨를 혀끝으로 건드리면서 잠은 어떻게 드는 거였더라. 서로의 잠을 위해 잠자는 우리들. 눈뜨면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고. 나를 핥는 검은 개. 몇 해 전 이 방에서 죽은 그 검은 개. 어쩐 일이야 물으면 작고 붉은 혀로 나를 핥으며. 개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 같다. 혀는 더 부드러워져서 손은 녹을 것만 같고. 아직 밖은 어두운데.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한 사람. 나는 본다. 헝클어진 머리. 손을 뻗어 액자를 손에 쥐는 한 사람. 바라보고 있다. 어두운 방안에 누워. 사진 속에 나는 개를 안고서. 웃고 있었다. 여전히 개는 나를 핥고. 이 장면 속에 내가 있었다.

 

 

 

벌레

 

 

 

   이 방의 주인은 아무 때나 이 방의 불을 밝히는 사람이다. 갑자기 환해지고 한꺼번에 어두워지는 이 방에서 자매는 종종 눈이 멀곤 했다.

   자매는 종일 이불 위에서 논다. 언니는 부모됨을 배운다며 달걀을 품고 다니고, 동생은 국어책을 펼치고 앉아 괄호를 그리고 있다. 이 괄호와 저 괄호가 등을 맞대고, 나비처럼. 그 사이를 건너뛰며 놀러 다녔다. 지워지는 비밀들이 생길 때마다 슬픈 소설이 되어갔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니. 신기하지 않아?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니. 두렵지 않아? 나는 태어난 날을 모르고. 엄마의 기일도 모르고. 이런 건 왜 부끄러워지는 걸까? 자매는 마주 앉아 끝말잇기를 한다. 둘만 아는 이름을 불러와 놀려주고 쓰다듬다가 아주 잊어버리고.

   사촌이 다녀간 날이면 동생은 자꾸 목이 마르다고 했다. 물을 마시며 생각나는 것들은 반성문이 되어갔다. 맹물을 마시고도 설탕물처럼 끈적거리는 기억들. 날계란처럼 미끄러지는 시간들. 소녀들의 반성문은 얼마나 더 길어질까.

   물을 다 마시고 나면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자매는 오래 목이 말랐다. 물 위에도 집을 짓고 사는 벌레들이 있었다.

   때로 너무 작은 벌레들은 있는 힘껏 손가락을 놀려도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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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崔智恩)

1986년생. 세종대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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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요약

 

   최지은의 시는 사유의 넓이와 감각의 깊이에서 길어 올린 것들로 신산한 생활의 풍경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진술들이 돋보였다. 시인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이내 감추는 삶의 불길함들을 곧잘 포착해내는 뛰어난 동체시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시 시로 재현해낼 때에는 자신만이 보고 느낀 특수한 미감만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의 정서에도 곱게 가닿을 수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획득해낸다는 점도 큰 장점으로 생각되었다.

 

 

 

                    —《창작과비평》2017년 가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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