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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가족 / 이동호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앉아 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조용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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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꿈을 꾸었다. 난생 처음 호랑이가 출몰했다. 내 꿈이 호랑이를 품었으니 吉夢이라 했다.

 

솔깃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열망 쪽에서 불현듯 소식이 왔다. 꿈속 호랑이가 물어다 준 신춘당선소식,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의식을 치르듯 신춘으로 보냈던 원고들이 나침반이 되어 나를 인도하고 있었던 것일까? 비로소 나는 그동안의 落選作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내가 드디어 신춘문예 당선 시인이 되다니'하고 감격해마지 않았다던 이수익 시인의 마음이 오늘 고스란히 내 것이다.

 

, 이 흥분, 이 감동,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불확실하다. 뺨이라도 때려 보아야 신뢰할 수 있을까. 오늘 봄꽃 같은 이름들을 호명한다.

 

어머니 여해영 여사, 장모님 이무순 여사, 나와 동충하초가 되어버린 해옥과 예나, 힘이 되어 준 두 분 누님과 여러 처형들, 한 주가 멀다하고 부산 중앙동을 오가며 함께 시 토론에 열을 올렸던 사람들, 그리고 고경숙 시인을 비롯한 '난시' 동인과 '창작노트' 인터넷 동인들, '시산맥' 동인들과 영남지회 문우들, 부산 부일여자중학교 박청정 교장, 전연희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전체 교직원들께 감사 드린다.

 

특히 내 꿈에 출몰해준 호랑이와, 연락주신 신춘문예 담당자와 아직 채 여물지 못한 시를 선뜻 뽑아주신 권기호, 정호승 두 분 선생님께도 큰 감사를 드린다.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꼭 보답하겠다. 창밖, 이제 아침이 탐스럽게 밝았으므로 거기 내 시를 꾹 눌러 찍고 싶다.

 

 

 

총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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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담담한 필치. 적절한 언어 돋보여"

 

예심을 거쳐 온 40여 편의 작품에서 최후까지 남은 것은 '이월의 우포늪'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조용한 가족' '밥 나르는 여자' '새들은 날아간다' '술래잡기' '통장정리' '공단 세탁소' '신라 주유소' '파장' '소문' 등이었다.

 

모두들 그만그만한 목소리로 자기나름의 색깔을 지니고 있어 선뜻 이것이다 라고 손을 들어주기에는 몹시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정서의 구체화된 표현의 적절성을 염두에 두고 고심한 결과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이월의 우포늪' '조용한 가족' '새들은 날아간다'로 압축되었다.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는 그 짜임새나 이미지 처리의 깔끔함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신인다운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덜한 점이 아쉬운 것이었다.

 

'이월의 우포늪'은 고대와 연결시킨 상상력의 확대가 우포늪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는 솜씨가 주목을 끌었으나 그것을 어떤 인생론적 내용으로 좀더 구체화시켰으면 하는 지적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새들은 날아간다'는 신인다운 활달한 감성과 거침없는 이미지 구사가 호감이 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속에 지닌 내용과 엇박자 되는 구절들이 있어 보여 이것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조용한 가족'은 가난이 빚는 아픔을 얄밉도록 담담한 필치로 그려나가고 있는 시선이 돋보인다. 시니컬한 이런 시선은 자칫 격정의 목소리로 떨어지기 쉬운데 끝까지 제3의 눈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이 호감이 갔다. 또한 작품을 이끌어가는 적절한 언어 구사도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예심에 올라온 앞의 열한 편들은 보기에 따라 어디에 내어놓아도 당선작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더욱 분발을 바라며 정진을 빌 따름이다.

 

심사위원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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