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도를 걸다 / 김점용
못박는 일은 쉽지 않다
단단한 시멘트벽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싶어 조금만 힘을 주면
튕겨나가고
튕겨나간다
사람들도 그렇지
내 사람인가 싶을 때
속잎에 비치던 눈물
녹이 슬고
등을 보이고
더 이상 기다리는 일 없을 때
패인 못 자국
닿을 수 없는 그림으로라도 덮어보자고
의자 위에 발끝을 들고
조금 더 위에
조금 더 위에
천장을 뚫고 윗집 7층의 벽에 22층의 벽에
아파트 옥상에 든 둥근 달의 거실에
달에도 못 걸고 그 위에 더 높고 먼 별의 창문에
별이 아니라 보일 듯 말듯 가느다란 별빛에 못질을 하며
우리부리한 눈빛의 달마도를 걸고
먼 별빛
자꾸 헛것 가리키는
퍼렇게 먼등 손가락에 못질을 하며
날마다
날마다
입 꾹 다문 달마도를 걸고
[심사평] 허공에 달마도를 거는 일과 시쓰기
시를 쓰는 일이나 사랑을 하는 일은 허방을 짚고 올라가 별빛 근처에 달마도를 거는 일이다. 심사를 하는 일은 허방에 걸린 달마도 속 보리달마의 표정을 읽어내는 일만큼 어렵다. 이번에 제2회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15편을 놓고 심사를 하면서 다양한 스팩트럼을 보여주는 시들의 표정에 한편으로는 즐거웠고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곤혹스러움도 있었다. 심사를 하면서, 가수에게 등수를 매기는 것이 마땅찮아 ‘나가수’를 보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시에 등수를 매기는 일은 가수에게 등수를 매기는 일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이처럼 문학상 제도가 많이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시인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매년 발표되는 문학상의 수상자를 살펴보면 작품보다는 작품 이외의 스팩이 더 돋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씁쓸한 느낌을 갖게 한다. 교수가 되기 이전에는 상을 별로 받지 못하던 시인이 교수가 된 후에 상복이 쏟아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시산맥 작품상은 우리문단의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하는 시산맥 가족의 순수한 소망이 담긴 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산맥 작품상은 후보작 선정과 심사과정에 이르기까지 투명하고 공정하다. 시산맥 동인이 주축이 된 심사위원단은 그동안 시산맥의 시인들이 엄선한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15편을 돌아가면서 읽고 무기명으로 복사된 원고에 A, B, C를 기표하는 방식으로 선정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점용의「 달마도를 걸다」,김행숙의「어딘가, 어딘가에는 」,문인수의「누」,유병록의「구겨지고 나서야 」,임경섭의「화석 」,허영숙의「49일」등 총 6편이었다. 이들 작품은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심사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심사위원단은 이들 작품 중에서 김점용, 김행숙, 문인수의 시를 최종 후보작으로 압축하고 자유토론에 들어가 제2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김점용의「 달마도를 걸다」를 선정하였다. 최종 후보작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될 만큼 훌륭했지만, 타 작품에 비해 당선작은 발상이 개성적이고 이미지나 서사의 이면에 시의 주제를 거느리는 응집력이 좋았다. 심사과정에서 작품외적 요인이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시산맥과 관련이 있는 시인을 무조건 배제하는 일 역시 역차별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당당하게 수상자로 선정된 김점용 시인에게 축하인사를 드리며,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은 간략하게 심사평을 하는 것으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대신하고자 한다.
최종심에 오른 허영숙의 「49일」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꿈 속에서 겪은 일들을 통해 꿈과 현실, 현세와 내세가 ‘맨드라미 씨앗’이라는 생명적 이미지로 순환하는 과정을 진정성 있는 언어로 부조해내고 있다. 이 시는 “피안에 들기 전에 머문다는 마흔아홉 날” 즉 49제를 시의 모티브로 삼아 시적 서사와 이미지가 균형을 이루며 통일성 있게 전개되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시적 발상이 너무 안정적이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으로 임경섭의 「화석」은 남녀 간의 이루어지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를 화석 이미지로 부조해내고 있다. 살아있는 물고기 이미지와 화석 이미지는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것임에도 시인 자신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과감하게 융해시키는 솜씨가 돋보인다. 하지만 시적 화자인 나와 애인과의 관계를 인간과 물고기의 관계로 설정한 것은 튼실한 비유가 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애인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고 나빠지는 것을 죽는다고 표현하는 등 임경섭 시인만의 문체가 개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이 시의 중심 이미지인 ‘화석’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어딘가 비약이 느껴진다.
유병록의「구겨지고 나서야」는 ‘어둠’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어둠을 구겨진 종이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시이다. 종이에게도 “눈부신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러한 종이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종이는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을 소유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구겨진 몸을 다시 펼치지 말라는 듯이 어린 새끼처럼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아 달라는” 종이의 고백은 뼈아프다. 유병록의 시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좋은 시이지만 안정된 시의 중심을 넘어서는 발상이 아쉽게 느껴진다.
수상작과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던 김행숙의「어딘가, 어딘가에는」은 화자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자리의 모양이나 별똥별의 움직임 등을 통해 어쩌면 자신이기도 한 누군가의 꿈을 읽고 있다. 김행숙의 시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현대철학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우주 어딘가 고여 있을 절대적인 시간을 자신의 시간의 일부로 경험해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시적 상상력을 다각화해서 시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좀 더 구체적인 서사와 만나지 못해서 주제를 응집시키는 힘이 부족해보인다.
역시 김행숙의 작품과 더불어 수상작과 마지막 까지 경합을 벌였던 문인수의「누」는 세렝게티에서 힘겹게 태어나서 대평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끝내 악어에게 희생되기도 하는 누의 삶을 통해서 끈질긴 생명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서사나 이미지가 선명하여 군더더기 없이 이어지는 화법이 매우 능숙하다. 이것은 문인수 시인의 다른 시에도 흔하게 보이는 것으로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사나 이미지의 선명함에 비해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어야 할 주제가 상대적으로 빈약해보인다.
이상에서 거론한 최종 후보작들을 누르고 당당히 수상의 영예를 안은 김점용의「달마도를 걸다」는 비교적 쉬운 어법으로 시를 끌고 나가고 있으면서도, 평범한 현실적 공간을 허물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이다. 시인이 시멘트벽에 못을 박는 일의 어려움을 이루기 힘든 사랑에 비유한 것은,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묘미와 어우러져 새로운 울림을 창조해내고 있다. 시인은 못이 튕겨져 나간 자국, 즉 사랑의 상처를 덮기 위해 그 곳에 달마도를 걸게 된다. 이러한 시인의 상상력은 달마도가 지니는 결핍의 상징성과 만나서 그 의미가 훨씬 증폭 된다. 특히 이 시의 후반부에 달마도가 집이라는 공간을 초월하여 달과 별이 있는 우주공간으로 상승하는 모습은, 시인이 현실 공간을 드높은 시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의 비유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의적이다. 이 시는 이러한 중의적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쓰라린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묵묵히 달마도를 거는 행위를 통해서, 아픔을 간접화하여 극대화시키는 발상이나 기법이 범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특히 이 시는 기존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범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발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당선자에 대한 믿음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우선 그의 두 번 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 손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 글자 은주
나는 그것이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인지 파란만장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인지 알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나무 주위를 맴돌다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그 나무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맞아 죽어서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는 중인 것 같은데 거기에 소 한 마리 매어서 딸려 보낸 주인이 누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한밤에 부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깔고 앉을 때나 강원도 깊은 산골에 두꺼운 방석을 펴면 이따금 귓전에 울리는 소 방울 소리가 메롱메롱 은주, 하고 날 놀리는 것 같아 평생을 그렇게 놀림받으며 살 것만 같아
―「메롱메롱 은주」전문
화자는 깊은 산 등산로를 오르다 “사람들 손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 은주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과연 은주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에게 은주는 남몰래 사랑한 여인의 이름일 수도 있고,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隱柱)일 수도 있고, 파란만장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隱舟)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은주’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이든, 아니면 隱柱나 隱舟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 의미의 범주를 열어놓는다. 굳이 은주의 의미를 짚어보면 여기서는 은유(隱喩)로 상징되는 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지고 보면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 손잡아 주는 것이 시이고, 어떤 사람, 즉 시인과 눈이 맞아 죽어서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는 중인 것이 시가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메롱메롱 은주’라는 놀림은 문명과 자연으로부터 모두 놀림감이 되어있는 시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으로 그의 또 다른 시 「건너다니는 우물」을 읽어보자
한밤에 누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내가 말해도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수화기 저편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듣기만 했습니다
삽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차갑고 냉정한 사람
술을 많이 만신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중간중간 코를 풀어가면서 말입니다
먼저 말을 꺼낼까 몇 번을 망설였지만
어떤 말이 위로가 될지 몰라 그냥 듣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망설이며 그의 울음을 들어주는 사이
내게도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이 추운 겨울밤에도 얼지 않는
깊은 우물이 하나 생긴 것 같았습니다
―「건너다니는 우물」전문
‘은실에게’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시는 은실이로 짐작되는 누군가 밤에 울면서 전화를 걸어와서 달래주려고 말을 걸었지만 말은 하지 않고 계속 울고 있는 울음소리를 듣다보니 자신의 마음에도 깊은 심연같은 우물이 생겨났다는 내용이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사랑했던 여인인 ‘은실’과의 사이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이면적 주제가 드러난다. 여기서의 은실이는 실제로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시라는 이름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의 시에 나오는 ‘은주’나 이 시의 ‘은실’이는 모두 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은유의 은(隱)자를 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서 은실이를 시로 읽는데 무리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를 다시 읽으면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아무리 사연을 들어보려해도 시의 울음소리만 들렸는데 그 울음소리를 듣다보니 어느새 시인 자신의 가슴에 ‘말 못할 사연’ 즉 시심이 생겨나게 되어서 시인이 되었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인 ‘건너다니는 우물’도 ‘건너다니는 시의 우물’의 의미로 읽히게 된다.
수만 가지의 색깔을 품은
바닥 없는 검은 우물
배추흰나비 한 마리
그 안을 날고 있다
―「심연에 대하여」전문
‘서시’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이 시에도 ‘우물’이 나오는데, 이 시의 ‘우물’ 역시 앞의 시의 ‘우물’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이 시에서 “수만 가지의 색깔을 품은/바닥 없는 검은 우물”이 인간의 마음이라면, 그 안을 날고 있는 배추흰나비는 시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에 나오는 ‘심연’은 시의 심연인 셈이다. 이렇듯 김점용의 시는 짧은 시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의 시는 그의 아픈 가정사를 꿈속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외양간의 소가 외로워 보인다 배가 고픈 줄 알고 풀을 주었더니 먹지 않는다 펌프질로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소가 안 채 기둥에 매여 있다 얼굴에 비누칠을 하다 말고 왜 집에 아무도 없냐고 소에게 묻는다 소는 대답하지 않는다 뭔가 숨기는게 분명하다 내가 괜찮다며 말하라고 하자 소는 자기가 어머니를 죽였다며 운다 문득 안심이 된다 하지만 나는 슬퍼해야 하므로 소 머리를 안고 함께 운다 소 얼굴에 비누거품이 가득하다 내가 어디에 묻었냐고 묻자 부엌 앞 펌프 밑에 묻었단다 그리고 또 운다
하나뿐인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서든 자발적으로 망가지고 싶었다
내 안에 칼을 품고 있었구나
비누로 씻어 속죄할 양이면
나보다 더 간절하게
지나간 삶 전부를 되돌리고 싶으실
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
어머니
―「소가 어머니를 죽이다-꿈 14」전문
이 시의 화자는 꿈속에서 소가 어머니를 죽이는 서사를 통해 어머니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했던 시인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고 있다. 2연에서 시인이 “하나뿐인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서는 자발적으로 망가지고 싶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애증의 관계를 넘어 근원적 트라우마를 갖게 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시인의 이러한 트라우마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셈이다. 1연에 나오는 꿈속의 소는 화자인 ‘나’와 구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나의 또 다른 분신으로서 화자의 또 다른 퍼소나라고 말할 수 있다. 화자가 소 머리를 안고 울 때 소 얼굴에도 비누 거품이 가득하다는 표현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를 죽인 소가 외로워 보이고 그 소가 안채 기둥에 매여 있다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화자가 어렸을 때에 얼마나 어머니로부터 억압을 받고 자라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소’는 앞에서 살펴본 시「메롱메롱 은주」에 등장하는 ‘소’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점용의 시는 대부분 그 안에 시인 자신의 서사를 숨기고 있다. 그의 시에 숨겨져 있는 서사를 올바로 읽어내는 일은 그의 시를 제대로 읽는 지름길이다. 김점용의 시가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그 안에 의외로 깊은 뜻을 내장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에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한 「달마도를 걸다」도 범상한 듯한 표현 뒤에 범상치 않은 의미를 숨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제2회 시산맥 작품상은 범상한 듯 하지만 범상하지 않은 좋은 시인을 새롭게 조명해주는 의미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동안 허공에 못을 박고 달마도를 거는 일로 힘들었을 김점용 시인에게 다시 한번 제2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박남희(시산맥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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