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언제나 진다 / 김종미
나를 항복시키려고 꽃이 핀다
어떠한 권력도
어떠한 폭력도 이와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없어
며느리밑씻개란 어처구니없는 이름의 꽃도
내 앞에 권총을 빼들었다 총알을 장전한
꽃 앞에 이끌려 나오지 않으려고
이중 삼중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으나
몽유에 든 듯
여기가 어딘가 깨어보면
꽃에 코를 처박고 있거나
눈동자에 그득 꽃잎을 쑤셔 박고 있다 나는
이미 수형에 든 것이다
네가 꽃인 것이 죄인지
내가 사람인 것이 죄인지
쏟아진 물처럼 살아있는 것은 다 스며야한다
이 지독한 음해의 향기에
수갑 채여
꽃비 촘촘한 창살 속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 바치며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어 완전히
내가졌다고 생각할 때
꽃이 졌다
나를 항복시켰으면 너는 잘 나가야지
꽃은 언제나 져서 나를 억울하게 한다
[당선소감]
추석이 지나도 지칠 줄 모르고 더위가 이어지니 도무지 가을은 이 땅에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살면서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 산을 오를 때가 그렇지요. 힘에 부치면 도저히 정상이 나올 것 같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시를 쓸 때도 그런 기분이 들곤 합니다. 경력 십년을 훌쩍 넘겨버린 뒤로는 세월에 빚지는 것 같아 지나간 날들을 자꾸 돌아봅니다. 근데 웬일입니까. 외로운 그 길 위에서 하나의 작은 봉우리를 만났습니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고맙게도 재충전을 하고 다시 산을 오를 수 있겠습니다.
‘시산맥 작품상’ 제1회의 영광을 누릴 수 있어 정말 행운입니다. 하지만 ‘제1회’라서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제1회’가 주는 그 사심 없고 순수한 상에 값할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 기회를 주신 시산맥 식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시산맥』이 더욱 발전하여 정말 시의 큰 맥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심사평] 간략한 작품평을 대신하며
<시산맥 작품상>은 시산맥지에 발표된 작품 중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수여되는 상으로, 작품상 제정 취지나 상금이 여타의 문학상에 비해서 소박한 편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은 어느 문학상보다도 올곧고 바른 것이어서 문학상 심사과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산맥은 심사위원을 소수로 한정하지 않고 시산맥 동인 전체로 심사위원단을 구성하여, 자칫 몇몇 심사위원의 개인 취향이나 사사로운 감정에 흐르기 쉬운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기존의 문학상에서 드러난 객관성 결여의 풍토를 바로잡고 오로지 작품의 우수성만을 선정작업의 잣대로 삼으려는 <시산맥 작품상>의 제정 취지가 반영된 것이다.
시산맥 동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무기명으로 복사된 본심 원고를 골고루 나누어 읽고 각 원고에 A, B, C를 기표하는 방식으로 선정작업에 들어갔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권혁웅의「숙맥」, 김백겸의「불꽃 이야기」, 김신용의「섬말시편-무릎이 환하다」, 김영은의「달에 걸리다」, 김종미의「꽃은 언제나 진다」, 배한봉의「바다표범의 잠」, 이순현의「흘려넣는다」, 이승희의「핏물」, 임동확의「용대리의 여름」, 송재학의「건탁」, 신동옥의「도감에 없는 벌레」, 장옥관의「나사못 박듯 송두리째」, 장순금의「햇빛 비타민」, 정용화의「식물성 오후」, 정윤천의「경첩」등 총 15편이었다. 이들 작품은 나름대로의 우수성을 지니고 있어서 문학상 후보로 부족함이 없었다.
심사위원단의 1차 기표 과정을 거쳐서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권혁웅의「숙맥」, 김종미의「꽃은 언제나 진다」, 송재학의 「건탁」, 신동옥의「도감에 없는 벌레」 등 4편이었다.
이들 작품은 심사위원단의 고른 지지를 받은 작품으로 어느 작품을 수상작으로 해도 될 만큼 좋은 작품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작품을 놓고 자유토론을 벌인 결과 만장일치로 김종미의 「꽃은 언제나 진다」를 <제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본심에 오른 분들에게도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특히 최종심에 오른 분들에게는 이 지면을 빌어서 간략하게 작품평을 하는 것으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최종심에 오는 송재학의 「乾拓」은 달 위에 마농지를 덮고 탁본묵을 문질러서 마른 탁본을 뜬다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자칫 현실감이 결여된 시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과정이 시인의 섬세한 언어와 정신의 촉수에 가 닿아있어서 그 이면에 숨어있는 메시지가 범상치 않게 읽혀진다. 이 시에서 ‘달’을 탁본하는 일은 마치 시인이 시를 쓰는 일과 같아서 시적 화자의 오랜 수고를 통해서 ‘은색 실선’이 드러나고 ‘목에 걸 수 있는 둥근 테두리’, 즉 ‘은화 한 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달의 길을 “저녁에서 새벽까지 걷는 묵언의 길”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길은 달의 길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길이다. 시의 말미에 “모서리마저 부드러워지자 목에 걸 수 있는 둥근 테두리가 만들어졌다. 은화 한 잎이 생겼다. 이걸로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 생계보다 많아졌으면 한다.”는 구절에는 시라는 은화 한 잎만으로도 생계의 걱정을 훌쩍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어보고 싶어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녹아들어있다.
신동옥의「도감에 없는 벌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나’와 ‘옛 애인’의 관계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일종의 생태시라고 말할 수 있다. “옛 애인에게 받은 속옷을 셔츠를 입고 옛 애인에게 받은 바지를 입고 나선다/ 옛 애인에게 받은 안개를 바람을 입고 옛 애인에게 받은 황사를 입고 나선다”는 이 시의 서두에서 보면, 화자가 옛 애인, 즉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옷은 ‘바람’이나 ‘안개’, ‘황사’와 같은 자연의 옷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시인에게 있어서 현재 상황은 “잿빛 웃음으로 낱장의 표정을 여미다/살갗을 떠나는 각질에 지는 꽃잎”이 있는 ‘변절기(變節期)’이다. 여기서 꽃잎이 잿빛 웃음으로 낱장의 표정을 여밀 수밖에 없는 상황은 자연과 인간의 오랜 사랑이 끝나고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도감에 없는 벌레’라는 이 시의 제목에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의 잔인함을 풍자한 시인의 의도가 숨어있다. 약간의 알레고리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적절한 비유를 통해서 심각해져가는 현대의 생태환경을 풍자한 수작이다.
권혁웅의「숙맥」은 헤어져서 쓸모없어진 미투리(짚신)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으로, 얇고 얇아진 ‘승혜’로 상징되는 ‘문학’에 대한 연민이 섬세하게 녹아있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문학은 시인의 개인사를 넘어서 우리 문학사에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앨빈 커넌이 ‘문학의 죽음’을 예견한 이래, 우리 문학사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 작품에도 나오지만, 문학이야말로 인간을 위로해주는 위약(僞藥)이면서 인간이 살아온 척도가 되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문학은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하던” ‘곡두’ 즉 환영(幻影)이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처럼 보였으므로 때로는 비웃거나 만홀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얇아지고 해어져서 마지막 시효(여섯 날)가 다 되어가는 것을 깨닫고 돌연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특히 ‘승혜’, ‘구경가마리’, ‘곡두’, ‘가르친사위’와 같은 순우리말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개성적인 작품이다.
이번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김종미의 「꽃은 언제나 진다」는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사랑이나 문학과 같은 이상적인 것을 향한 인간의 매혹이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에 닿아있음을 갈파한 수작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은 수많은 아이러니로 점철되어 있다. “나를 항복시키려고 꽃이 핀다”는 시의 서두와 “내가 졌다고 생각 할 때/ 꽃이 졌다”는 말 미에 이미 아이러니의 속성이 들어있다. 시적 화자는 “며느리밑씻개란 어처구니없는 이름의 꽃”에 조차 “몽유에 든 듯” 매혹되어버리는 자신이 이미 수형에 든 죄수임을 자각하며 꽃에게 항복을 해버린다. 하지만 이 때 꽃은 돌연 져버린다. 여기서 ‘꽃’이 ‘문학’이든 ‘사랑’이든 한결같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시인을 매혹시키는 문학이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꽃처럼 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김종미의 시는 인간의 삶 속에 숨어있는 아이러니를 ‘꽃’이라는 대상을 통해 보편적인 자연의 섭리와 만나게 해준다. 이렇듯 이 작품이 뽑힌 것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보다 근원적인 사유에 닿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통해 인간의 삶과 연결되는 근원적 아이러니를 발견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1회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한 김종미 시인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박남희(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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