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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의 지주(地主)이다 / 차주일

늙은 삼각형의 공식

 

 

땀내 한 다랑이 경작하는 농사꾼과 악수할 때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악력(握力)은 삼각형의 높이이다

얼굴이 경작하는 주름의 꼭짓점마다 땀방울이 열려 있다

땀이 늙은이 걸음처럼 느릿느릿 흘러내리는 건

얼굴에서 발까지 선분을 그어 품의 높이를 구하기 때문

소금기를 남기며 닳는 땀방울 자국을

사람의 약력(略歷)으로 출토해도 되나?

겨우내 무너진 밭두렁을 족장(足掌) 수로 재며

뙈기밭의 넓이를 구하던 이 허리 굽은 사내는 나의 첫 삼각형

등 굽혀 만든 앞품을 내 등에 밀착하고

새끼가 품의 넓이란 것 스스로 풀이하게 한 삼각형 공식

어린 손등에 손바닥을 밀착하여

까칠까칠한 수많은 꼭짓점을 별자리로 생각하게 한

엄지와 검지를 밑변과 빗변처럼 괴게 하여

절대 쓰러지지 않는 높이로 연필 거머쥐게 하고

내 이름자를 새 별자리 그리듯 처음 쓰게 한

피라미드처럼 몰락해버린 한 사내의 악력은, 왜 지금껏

사내의 품을 땀내로 환산하게 하는가

늙은 삼각형이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흔들어댄다

내 팔꿈치가 농사꾼의 허리 각도를 이해할 때

내 몸 통각점들이 지워진 선분을 다시 긋는다

내 이름자 획순으로 흐트러진 사내의 골격이 내 몸속에서 읽힐 때

연필심에 묻혔던 침만큼의 땀이 손바닥에 어린다

내 눈은 왜 땀에 젖은 손바닥을 꼭짓점으로 이해하는가

젖은 눈은 왜 나를 타인 되게 하는가

내가 누군가의 눈으로

그의 얼굴과 손과 발 세 변의 길이를 잰다

내가 누군가의 눈을 껌벅이며 곤혹스러워할 때

삼각형의 높이를 잴 눈물이 제자리에서 마른다

내가 이 점()에 염기를 경작하여

누군가의 발까지 이르는 높이 하나 짠내 나게 그으면

나는 누군가의 지주(地主)가 된다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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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엄마, 살인을 했어요.

 

엄마, 오늘 참 서러운 일을 겪었어요. 그림 한 점을 삼백만 원에 팔았다는 화가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었어요. 물감 값이 얼마이고 들인 시간이 몇 날 며칠인데 지금 뭔 개소리하느냐, 천만 원도 헐값이라며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그럼, 선생님께서 극찬한 졸시 「얼굴」은 얼마쯤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시를 쓰는데 무슨 재료비가 들어간다고 돈을 바라?”라고 대답하더군요.


 엄마, 전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어요. 예절 차리느라 그런 게 아니었는데, 반박 못 한 이유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화를 다스리지 못해 당신께서 하지 말라는 욕을 뱉고 말았어요. 그런데도 상한 마음이 영 가시지 않았어요. 엄마, 열댓 정류장을 걸어 원고지 형식으로 배치된 고시원 쪽방으로 돌아와 문장 속 화자처럼 누웠는데, 내게도 십여 년 넘게 가져다 쓴 시 재료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외상값이 이토록 어마어마한 줄 몰랐어요. 그간 참 여러 종류의 잉크를 바꿔댔더군요. 그중 가장 순도 높은 잉크는 외로움과 슬픔으로만 살 수 있는 진품이었어요. 요즘은 가장 비싸게 산 잉크를 사용하고 있더군요. 한때 신처럼 존경하던 아빠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딸의 눈빛으로 산 잉크는 필기감이 으뜸이에요.

 

엄마, 저는 왜 외로움과 슬픔으로 잉크를 사는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요? 잉크를 살 때마다 장기를 도려내는 듯한 통증은 왜 그리도 황홀한지요? 아들의 지갑에서 도둑질한 돈으로 마약을 하며 영혼 몇 박자를 빌리는 뽕쟁이 음악가를 이해하게 될까요?


 엄마, 몇 날 며칠 걸려 쓴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구겨서 버릴 때마다 원고지 속 관찰자와 중심인물은 어쭙잖은 시인을 바라보며 또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요. 엄마, 화가 나서 잉크병을 집어 던졌어요. 잉크병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제 마음에서만 깨어지더군요. 삽을 잡았다가, 들통을 지었다가……, 결국 하루도 못 넘기고 다시 원고지 앞에 투항하여 펜을 잡는 탕자처럼 말이죠. 엄마, 이럴 때마다 외우는 기도문이 제게도 있어요. “딸아, 죄송하다.” 이 주문은 슬픔을 부르는 데 최고로 영험하더군요.

 

 엄마, 기억하세요? 제 꿈이 당신의 슬하에서 원색일 때, 준비물로 도화지 한 장 챙겨주지 못한 걸 자학하며 어린 화가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세요?

 

엄마, 그때 왜 “아들아 미안하다.”가 아닌 “아들아 죄송하다.”는 단어 하나 바꾼 주문으로 제 미래의 언어까지 혼색시켜 놓은 건가요?

 

 엄마, 어미가 자식에게 쓰는 “죄송”이란 말이 얼마나 아픈 색깔인지 써낼 수 없어 저는 내일의 통증을 오늘 느끼는 형벌에 살고 있어요.


 엄마, 어린 제게 도화지 대신 주셨던 “죄송”이란 말을 이제 돌려드려야겠어요. 엄마, 그동안 제가 무한정 가져다 쓴 시 재료가 “엄마”였더군요. 창조주보다도 높은 신성성도, 기꺼이 돌을 맞는 창녀의 영혼도, 심지어 제 진심까지도 엄마를 빌리지 않으면 온전히 적어낼 수 없었더군요.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화가의 뺨을 후려치지 못한 모자란 놈에게 너무 분했어요. 엄마, 당신을 헐값 취급당하게 한 죄송함은 살인을 생각하게 했어요. 그래서 화가를 만났던 곳으로 열댓 정류장을 다시 걸어갔어요. 칼을 쥔 한 놈이 홀로 남아 욕지거리하고 있더군요. 엄마, 구겨진 원고지 형식의 격자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놈의 그림자와 저는 관찰자와 중심인물이 되어 마주 보았어요. 엄마, 그놈을 난도질해버린 자가 관찰자였는지 중심인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엄마를 헐값 취급하는 놈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존경하는 가족을 버리고, 평온한 삶을 버리고, 직장과 일을 버리고, 부양의 의무를 버리고, 극복 초월이 아닌 실패 초월로 나를 버리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엄마, 당신이 씨앗으로 놓은 “사랑”을 “죄송”이라는 흉작으로 돌려드리니 제발 받아주세요. 엄마,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께 씨앗을 빌려야만 하는 계절이어서 저는 더 오래 홀로가 되어 떠돌아야만 해요. 그러다가 불쑥 외로움과 슬픔이 북받치면 다시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엄마, 당신에게 재료를 빌리려 가는 지름길은 왜 떠돌아야만 당도하는 외길뿐인가요?

 

 

 

 

냄새의 소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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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늙은 삼각형 혹은 아버지의 내력(來歷)을 찾아서

 

제5회 시산맥작품상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최근 1년간 ?시산맥?에 게재된 시 가운데 추천받은 20편의 예심 작품이 그 심사 대상이 되었다. 예심에 올라온 20편의 작품들을 무기명 표기로 심사위원들이 돌려본 후 최종심사 대상으로 5편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차주일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 김지녀의 「부화」, 정채원의 「새장을 키우는 사람」, 홍일표의 「북극거미」, 이덕규의 「고슴도치」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이미 문학상을 받은 경력이 있는 홍일표, 이덕규 시인은 최종 심사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난맥 끝에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게 된 영예의 작품은 차주일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이다. 젊고 신선한 문학적 감각이 돋보이는 김지녀의 시와 생(生)의 깊이 있는 사색과 노련한 표현력이 눈길을 끈 정채원의 시를 제치고, 마침내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게 된 차주일의 시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은 농사꾼/ 지주, 허리 굽은 사내/ 나, 악력(握力)/ 약력(略歷), 꼭짓점/ 별자리 등의 대척점들이 촘촘한 행간의 연결과 배치, 확장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써내려간 점이 심사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교와 무의미가 난무하는 최근 시단에서 이처럼 통찰력 있는 시편을 만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의 매력은 첫 행부터 강력하게 다가온다. “땀내 한 다랑이 경작하는 농사꾼과 악수할 때/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악력(握力)은 삼각형의 높이이다”가 압도하는 첫 문장의 힘은 마지막 행 “누군가의 발까지 이르는 높이 하나 짠 내 나게 그으면/ 나는 누군가의 지주가 된다”로 확장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재)발견은 뚜렷한 시적 성과로 여겨진다.

 

 차주일의 시는, 화자가 주름지고 땀으로 얼룩진 농군의 손과 (대비되는) 매끈한 자신의 손을 마주 잡은 순간에, 섬광처럼 악력(握力)에서 솟구치는 삼각형을 불현듯 마주하고 그 늙은 농군의 손끝에서 한 평 땅을 일구는 삼각형의 공식을 발견한다는 시상(詩想)의 출발과 전개방식이 눈길을 끈다. 농사꾼의 생(生)이, 마주 잡은 손의 악력(握力)으로 읽히는 시적 상상력이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특히 ‘늙은’ 삼각형의 공식으로 대변되는 ‘세월의 잔상’을 수학공식을 풀 듯 섬세하게 농군의 한 생을 풀어가고 있는 점이 매혹적이다. 마주 잡은 농군의 손은 내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기억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농사꾼 아들인 나를 발견하게 한 찰나의 깨우침을 던져준다. 농군처럼, 아버지 역시 생의 전부인 농지에서 평생을 산 농사꾼이었으며, 나는 그 아버지의 ‘지주’로 살아왔다는 (부끄러운) 사실이 뒤늦은 깨달음으로 다가와 “염기(鹽氣)의 짠 내”로 (나의 눈을) “젖은 눈”이 되게 한다. “그(늙은 사내, 아버지)의 얼굴과 손과 발 세 변의 길이”로 마주한 “악력”의 삼각형을 통해 나는 아버지의 품의 넓이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내 몸속에서 읽히”는 “통각점”들의 선분으로 만난 삶의 ‘공식’을 통해 아버지의 “약력”을 마침내 읽게 된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지주로 살아온 사실을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아버지 품의 넓이야말로 딱 내가 이룬 만큼의, 그만큼의 인생으로 남겨진 아버지의 삶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버지’들의 지주가 되고, 아버지는 우리를 ‘지주로 살게 하는’ 늙은 삼각형의 토대가 되어준다는 것. 차주일의 시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은 이러한 반성적 깨달음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시적 성취에 이른 ‘좋은 시’인 것이다. 영예의 시산맥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전해수(문학평론가, 본지편집기획집필위원)

 

 

 


[심사평] 당위와 존재의 짐을 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어떤 이익이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문단에 유수한 문학상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에게 주는 물 한 모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 한 모금을 마신 낙타는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갈증을 느끼게 되겠지만 그 물 한 모금의 희망이 낙타로 하여금 사막을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 된다. 물의 소중함은 가장 목이 마른 낙타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시산맥 작품상은 시의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인 시인에게 건네주는 물 한 모금과 같은 것이다. 시산맥이 수많은 낙타들 중에서 오랫동안 목말라 있는 낙타를 찾아내어 물 한 모금 건네주는 일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소중함은 낙타의 등에 무엇을 싣고 가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어떤 낙타는 당위(當爲,Sollen)라는 짐을, 어떤 낙타는 존재(存在,Sein)라는 짐을 지고 시의 사막을 걸어간다. 어떤 낙타는 이 두 가지 짐을 다 지고 사막을 건너는 경우도 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죽음을 맞게 되는 불완전한 현존재(Dasein)로서 결코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인 당위와 일치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당위를 지향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존재와 당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주체는 신(神)밖에 없다. 시인은 신이 아니지만 시적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서 존재와 당위의 일치를 꿈꾸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언어는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 춤추는, 주술을 지니고 있는 시적 영매(Mediums)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시적 언어로 당위와 존재 사이에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시적 공간을 창조해낸다. 낙타는 목적지에 기다리고 있을 어떤 이익이나 보상을 바라고 사막을 걸어가지 않지만, 낙타의 등에 실린 사유의 짐들로 인해서 그가 걸어가는 길은 비단길이 되기도 한다.

 

 우리 시단에서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을 찾아내어 작은 상을 주는 일은 사막을 걸어가는 수많은 낙타 중에서 어떤 특정한 낙타에게 물 한 모금 건네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선택에는 언제나 편견이 작용하게 마련이지만 시산맥은 이러한 편견의 신기루를 넘어서 새로운 시의 지평을 걸어가는 낙타를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제5회 시산맥 작품상 운영위원회는 시산맥 회원들로 구성된 수많은 시인들의 추천을 받은 20편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엄밀한 심사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다섯 분의 시인을 선정하고 2차 심사를 하여 최종 수상후보작을 결정하였다.

 

 최종 5편에 든 작품은 정채원 시인의 「새장을 키우는 사람」, 이덕규 시인의 「고슴도치」, 홍일표 시인의 「북극 거미」, 김지녀 시인의 「부화」, 차주일 시인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 등이다. 이들 작품들은 어느 것을 선정해도 좋을 만큼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심사를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심사자들은 이들 중에서 이미 물을 마셔서 갈증이 덜한 시인들보다, 오랫동안 새로운 시의 사막을 걸어왔음에도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한 시인들로 대상을 좁혀서 최종적으로 정채원, 김지녀, 차주일 등 세 분을 대상으로 심사를 한 결과 차주일 시인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를 제5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최종 후보작에서는 제외되었으나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준 홍일표 시인의 「북극 거미」는 마치 조정권의 「산정묘지」를 읽을 때처럼 비장미마저 느껴진 작품이다. 조정권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북극이라는 혹한의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아마도 극광(오로라)으로 표상되는 “공중의 혈맥을 더듬던 북극 거미”는 ‘국경 밖의 눈보라’가 되어 ‘눈썹 흰 노래’를 듣는 시인을 표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시인으로 표상된 ‘북극 거미’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詩)’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오는 ‘검은 남자(밤)’를 기다려 ‘얼음 같은 그믐달’로 형상화된 시를 포획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일종의 메타시로 읽혀지는 이 시는 빛나는 비유를 통해 비장미가 느껴지는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이덕규 시인의 「고슴도치」는 유적 속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녹슨 창’을 유월의 서늘한 숲에서 만난 ‘고슴도치’로 비유해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 ‘녹슨 창’이 정치적으로 은폐된 ‘민초들의 무장봉기’로 형상화되면서 이 시는 일정한 알레고리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 시는 아무리 오래된 정치적 억압도 결국은 고슴도치의 살을 뚫고 돋아나는 분노의 창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전언을 담고 있다. 시인이 ‘아름다운 창’으로 묘사하고 있는 ‘분노의 창’을 시로 본다면 이 시는 정치적인 폭력을 넘어서는 시의 위의를 보여준 명징한 작품으로, 힘없고 가난한 시인들에게 커다란 위로를 선사해준다.

 

정채원 시인의 「새장을 키우는 사람」은 ‘새장’으로 비유된 인간의 육체 속에 존재하는 ‘울음의 주체’인 새를 명징하게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 시 역시 메타시로 읽힌다. 여기서 시인의 육체는 “어느 쪽에 먹이가 더 많은지 어느 비탈에 걱정이 많은지”를 모르는 ‘눈 먼 방’으로 표상되어 “먹이보다 빛이라는 듯 제 그림자를 끌고 창가로 몰려드는 새들”인 시의 울음을 가둘 수 없는 새장으로 비유된다. 이처럼 새를 새장 속에 가두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새장 속에 갇힌 새의 울음을 듣는 일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러니야말로 이 시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주는 시적 장치라는 점에서 이 시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김지녀 시인의 「부화」는 나뭇가지 끝에 달을 잉태하는 창밖의 나무와 창 안에서 시의 부화를 꿈꾸는 주체인 시인을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관점에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 시 역시 메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에 의하면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나뭇가지 끝에 달이 뜨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손(나뭇가지)’을 향해 달(詩)이 뜨는 것과 같은 지난한 일이라서 나무들이 사나워지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새끼를 밴 짐승이 출산 때가 가까워지면 신경이 예민해져서 사나워지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시인이 꿈꾸는 알은 노른자위처럼 오롯하고 흰자위처럼 미끄러운 것을 흘리는 양면성을 지닌 알이다. 이것은 시가 지니고 있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보다 명징하게 읽힌다. 하지만 알을 둘러싸고 있는 밤이라는 껍질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시를 부화시키는 일이 “늙은 얼굴보다 더 두꺼워진 손을 잡고/ 담을 따라 이끼가 번”지는 인내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하면서, 끝내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시인의 손끝에서 달(詩)을 부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뛰어난 비유를 통해서 시창작 과정을 낯설게 현상화해 낸 수작이다.

 

 끝으로 제5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차주일 시인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는 시인 자신의 정체성을 농사꾼인 아버지의 존재성(삼각형)에서 찾아내는, 일종의 ‘뿌리찾기’라는 주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수작이다. 특히 이 시는 앞의 시들에 비해 농사꾼인 아버지의 땀과 흙으로 표상되는 삶의 진정성이, 시인이 스스로 지주(시인)를 자각하게 되는 내밀한 과정 속에 녹아있어 감동을 더해준다. 이 시에서 농사꾼 아버지의 얼굴과 손과 발을 연결하는 삼각형으로 표상되는 땅은 시인이 아버지로부터 생래적으로 물려받은 시인의 영토라는 점에서 시적 당위성을 획득한다. 차주일 시인에 의하면 시인의 약력은 “땀이 늙은이 걸음처럼 느릿느릿 흘러”내려 “얼굴에서 발까지 선분을 그”으며 흘러내리는 “소금기를 남기며 닳는 땀방울 자국”같은 것이다. 시인은 “겨우내 무너진 밭두렁을 족장(足掌) 수로 재며/ 뙈기밭의 넓이를 구하던” 허리 굽은 사내인 아버지를 자신의 ‘첫 삼각형’ 즉 시인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는 드디어 “등 굽혀 만든 앞품을 내 등에 밀착하고/ 새끼가 품의 넓이란 것 스스로 풀이하게 한” 아버지의 삼각형의 공식이야말로 시인 자신의 삶의 공식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시인의 깨달음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타자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갖게 해준다. 시인에게 있어서 타자의 눈물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일은 “염기를 경작”한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아 진정한 지주(주체적 시인)가 되는 일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차주일의 시는 삼각형으로 표상되는 튼실한 이미지의 영토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체험의 집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튼실한 뼈대와 땀내 나는 살은 차주일 시인이 앞으로 세워나갈 시의 집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울지를 가늠해보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끝으로 제5회 시산맥 작품상이라는 문패 위에 차주일이라는 뛰어난 시인의 이름을 새기게 된 것은 시산맥의 기쁨이다. 다시 한 번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된 차주일 시인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고, 아쉽게도 마지막 선에 들지 못한 시인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얹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박남희(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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