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속이기 / 최정란
노끈이나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오래 간단다
그 말 믿지는 않지만
바나나 한 송아리를 묶어두기 위해서
나무를 찾다가
바나나 한 송아리를 박아두기 위해서
못을 찾다가
바나나 한 송아리를 매달아두기 위해서
망치를 찾다가
망치를 든 채 전화를 받는다
망치를 든 채 안부를 묻고
망치를 든 채 수다를 떨다가
왜 손에 망치를 들고 있을까, 잊는다
왜 못 하나가 거기 있을까, 잊는다
대화에 열중하느라
무심코 가장 날카로운 말로 애인의 가슴깊이
대못을 박는다
손에 망치와 못이 있으므로
어딘가에는 박아야 하므로
날카로운 말은 빨리 허기를 부르고
배가 고픈 나는 바나나를 먹는다
내 몸 위로 미끄러져 오는 바나나
내가 밟고 넘어지는 바나나
이윽고, 바나나 껍질처럼 휘어진
미끄러운 밤이 온다
검버섯이 생기기 시작한 바나나
썩어가기 시작해서 향기로운 바나나
검버섯이 피기 시작하는 바나나
바나나 바나나 오 바나나
날카로운 말은 꼭 애인의 가슴에 박아 넣는다
철철 흘리는 피를 보고야 만다
짐짓 속아주는 척 하는 사람아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백하고 맹세하고
그리고 또 상처를 준다
몰래 기어들어가고 싶은 그림 속
무성한 파초잎 향기로운 이국의 마을에서
비로소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또 다시 망치 자루를 드는 나날이여
바나나는 속지 않는다
다만 검은 향기를 풀어놓을 뿐
브래지어를 풀어헤치고 파초잎 지붕 아래 누운
내가 나를 속이기는
바나나를 속이기보다 어려워
오랫동안 나를 속인 나
속고 있는 줄도 모르는 나
이미 속을 대로 속아
더 이상 속을 것이 없는 바나나
오 바나나
[수상소감] 시간 속이기
수상 소감 쓰기 강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작에 미리 좀 써둘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상소감 쓰기가 시 쓰기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막막하고 낯설고 새로우니, 수상소감이라는 문학장르가 생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또 쓰게 될 일이 생기면 그때는 능숙하게 쓸 수 있을런지요. 그때도 오늘처럼 크나큰 기쁨과 두근거림을 유지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담담한 척 하지만 저, 떨고 있습니다.
바나나 속이기는 죽은 바나나를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바닥에 수평으로 놓이는 대신 공중에 수직으로 걸려 있다고 바나나가 믿게 되면, 부패를 지연시켜 오래 싱싱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나나가 정말 속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죽음을 삶으로 다시 회복시켜 보려는 이 터무니없는 시도는 잎과 줄기와 뿌리를 떠난 바나나가 다시 온전한 식물로 복원되는 상상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시를 쓰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의 속도를 지체시키고 유예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바나나를 높은 곳에 걸어놓으면 빨리 시들지 않고 오래 간다고 믿는 것처럼, 이 믿음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겠지요. 바나나 속이기는 결국 시간을 속여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냥 속이면 시간이 쉽사리 속아 넘어가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반복의 리듬을 가져오고, 미끄러운 촉각의 이미지를 빌려봅니다. 바나나의 욕망, 망치라는 가학, 그리고 못이라는 피학과 동시에 가학을 삼각구도로 연결해 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가족과 사회가 가슴에 박는 치명적인 말의 못질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무관심만도 못한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명랑한 천사를 무기력한 괴물로 기르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이 사랑을 질식시키기도 합니다. 삶의 곳곳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못이 파놓은 못 자국이 어느 날 문득 블랙홀이 되어 삶을 통째로 빨아들이기도 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사실 괜찮아, 괜찮아 라는 위로가 필요한 때는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소리치고 싶을 때입니다. 이 시대는 정말 괜찮지 않은 일 투성이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위로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모든 괜찮지 않은 순간을 괜찮지 않다고 정직하게 바라보다 보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잘 참고 잘 살았어. 저녁에 다시 못 박듯 저를 위로합니다.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거야. 최소한 살아 있잖아.
시는 죽음의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를 살게 할 것이라고 저를 속입니다. 확신하건대, 시와 더불어 우리는, 조금 덜 부패할 것입니다. 조금 느리고 완만하게 죽을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 것입니다.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우뚝한 시의 봉우리를 키워가는 믿음직한 시산맥과, 시 앞에 더 오래 절망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딜런 토머스의 시 한 구절로 수상소감을 맺고자 합니다. “푸른 도화선을 통해 꽃을 몰아가는 힘이 나의 푸른 나이 몰아가네 나무뿌리를 시들게 하는 힘이 나의 파괴자이니 나는 벙어리가 되어 구부러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네 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졌음을”(끝)
[심사평] 성적(性的) 메타포와 사랑의 한 방식
『시산맥』작품상이 올해로 7회를 맞이했습니다. 1년간『시산맥』지에 실린 신작시 가운데 우수작을 선정하여 시상해 온 것인데, 해를 거듭하면서 수상자가 누구인가 관심이 커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만큼 객관적인 심사과정을 거치며, 선정된 시편은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올해는 작품상 후보에 오른 시편 가운데 각종 문예지 기 수상자와 『시산맥』 편집진의 작품을 제외한 7편이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즉, 강연호의 <인간적>, 윤의섭의 <느낌>, 이향의 <유리컵에 물기가 맺히지 않았다면>, 이화은의 <지독한 연민>,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 이영식의 <두부를 건너는 여자>, 송종규의 <사막> 등 7편입니다. 심사위원들이 (이름이 가려진) 모든 작품을 돌려 읽은 후 최종 논의에 올린 것은 이 가운데에 윤의섭 <느낌>, 최정란 <바나나 속이기>, 이영식 <두부를 건너는 여자> 등 3편이었습니다.
시인의 이름을 지운 상태라 순전하게 작품의 완성도와 시적 상상력만이 시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격론을 거쳐 심사위원 과반수의 득점을 얻은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가 시산맥 작품상에 최종 선정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는 애인과 나의 관계를 성적 메타포로 풀고 있습니다. ‘바나나 묶어 두기’와 ‘바나나 속이기’는 이 시의 중요한 맥락입니다. 바나나를 묶어두면 오래간다는 속설을 듣고 시적 화자는 “바나나 한 송이를 묶어두기 위해서” 못을 찾고 망치를 찾고 나무를 찾다가 불현듯 걸려온 애인의 전화를 “망치를 든 채” 받습니다. 여기서 “바나나를 묶어 두”려는 행위는 애인의 전화를 받으며 애인의 가슴 깊이 (말의) 대못을 받는 행위로 전이됩니다.
또한 “사랑한다 고백하고 맹세”하며 ‘바나나를 속이’는 ‘허기’의 ‘나날’이 또다시 바나나를 오래 (곁에) 두려는 욕구에 의해, 못과 망치를 들도록 자신을 내몹니다. 애인과 나의 관계 맺음은 바나나를 묶고 바나나를 속이려는 나의 열망(집착) 속에서 오히려 ‘나’ 자신이 스스로 속고 있음을 깨닫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줍니다.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는 요컨대 애인과 나의 불균형한 관계 맺음을 직시하고 ‘나’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긴요한 대상으로서 ‘바나나’를 설정하여, 그 성적 메타포를 통해 사랑의 한 방식을 드러내는바, 시적 성취에 도달하고 있는 수작으로 평가됩니다. 우수한 다른 시편들을 제치고 오랜 논의 끝에 최종 결정된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가 제7회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유안진 송찬호 고봉준 전해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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