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소나기 세탁 / 이일림

심심하던 바람이 구름의 주리를 틀자
세상은 세탁기가 되어 돌아가네
허공에서 우우, 하고 갑자기 물이 쏟아지자
사람들도 우우, 하고 돌고 돌며 뛰어가네
삽시간에 거리는 말끔해지고
무거운 흙먼지에 눌려있던
진록의 잎들이 바람을 타고 팔랑거리네
그 위에서 빗방울들 다다다다,
바쁘게 모터에 전동을 켜네
강풍이 몰려와 전동축엔 가속도가 붙네
세상은 가벼운 부레처럼 둥둥 뜨고
동그란 눈들 와글와글 물속의 부유를 누리네
땅바닥 흥건히 고인 빗물에 발을 담그네
가슴속 잠긴 모터 하나 돌아가네
훌라후프를 돌리듯 중심을 추스르자
두두둑, 잔뼈들 새하얗게 정립하는 소리
다시 나타나신 옥탑방 할머니 춘희씨
지원금도 장기도 返還하겠다는
양심에 김 오르는 고리 으사샥,
튤립나무 넓적하니 뒤집힌 치맛단에
잠긴 햇살 몰래 와 무지개를 슬어놓네
하얀 종아리가 무색무취로 빛나네
슴슴하던 땅
붕어처럼 연거푸 입술을 뻐끔뻐끔거리네

 

 


대차대조표 길論 / 이일림

누군가 도로에 호치키스를 찍어 놓았다
사는 일 더러 저장도 필요하듯
잠시 참조 철을 판독하고 간 자리
눈물 몇 방울 호치키스 옆에 떨어져 있다
나도 한때 깨알같은 글씨 눈 시려
현재를 꾸짖는 뒷바퀴에 걸린 적 있다
그는 얼마나 긴 길을 읽었던 것일까
밝은 날 어둠 같은 회계장부
앙칼지게 해독되지 않던
생의 전환점에서 잠시 바라본 높푸른 하늘에서
검은 갈가마귀 떼라도 본 것일까
호치키스 찍힌 자리로 자동차들 생각 없이
팡팡 길을 내고 있다
길은 흑지(黑地)를 널며 호치키스의 체온을 담는다
가끔 가슴이 뭉클한지 한쪽으로 기우뚱 쏠린다
바람결 일찍 떨어진 낙엽 하나 뒹굴며
괄호 안으로 들어가 보려 애쓰는 통에
끌리듯 빨려 내 안의 아직 마무리 못한
쉼표 찍어 둔 사항들 끄집어낸다
에이포용지를 넘기면 반복 읽어 내려가지만
좀체 소통되지 않는 글 속의 붉은 신호
잘 되면 파지로 이용할 수도 있다며
나를 짓누르는 누군가의 철저한 대차대조

신속한 신호정리를 하듯
푸른 눈 내려받은 도로
빠르게 길의 서책 넘기고 있다

 

 

 


시간의 화석 / 이일림

길가에 앉아 지렁이 한 마리가 쌓아가는
단단한 시간의 화석 바라본다
수많은 걸음이 땅 위에 지도처럼 남아 있다
군더더기 없는 바람이 맨살을 스치고 간다
저 젖은 우주는 얼마나 맵게 시간의 두엄을 삭힌 것일까
언제 풀어낼지도 모를 압축된 프로필
비가 되고 눈이 되던 그들 긴 이야기 속으로 우리는
가장 적막한 시간의 한 페이지를 알뜰히 걷는 것이다
스쳐가는 바람 속으로 나의 일부가 사라진다

그것은 흙에 가까웠다
육체는 결국 바람의 한 오라기
바람의 부피가 서서히 정점으로 내달아
세월의 담장과 담장 사이 談話가 쌓이고
대지의 둘레 그 껍질을 견고하게 만드는
일종의 聖禮式이 끝나면
영혼은 서서히 침잠하여 수로가 되는데
겹겹이 쌓인 시간의 등껍질 속
가만히 귀 기울이면
거기, 땅 속에 신비롭고 창창한 맑은 音 있어
꿈틀거리는 태아의 손가락 끝을 따라
소리의 긴 통로 두드려 보면
차륵차륵 우주의 물방앗간 물레질 소리
달큼한 생명의 향기 흙내음

나는 지금
먼 기억 회로를 떠듬떠듬 굴리고 있다

 

 

 


신발의 그늘 / 이일림

내가 물어보면
그는 어딘가를 간다고 한다
나도 알 수 없는데
그는 어딘가를 자꾸만 가자 한다
내가 가자고 말할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아차린 듯이,
내 위치가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울퉁불퉁한 길에 지치고 힘들어한다
잘 생기지도 부드럽지도 못한 나는
갔던 곳에 또 가고
갔다가 또 오는 가난한 본능이다
오랜 시간 부르튼 생각들
이젠 뒤꿈치에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언젠가 그 생각들 머리끝을 들면
발 속의 마른 창자를 휘감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는 火藥庫이므로
그동안 조용히 있으라며 군화 같은
명령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발은 신발의 그늘을 미처 보지 못한다
늘 신발이 발을 감싸고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또 하나의 발인 셈이다
누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모른 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는
나를 꼬옥 움켜쥐고 늘상,
끈끈한 대화를 주도한다

 

 


밤의 강단 / 이일림

깊은 밤이 날카롭게 운다
잠에 곤히 취한 사람들
밤의 밖 소리 틈에 합체한다
저 야생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
이 한밤 찢어진 어둠을 깁는 걸까
허공이 소리를 잡아와
열리는 신음
쫓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또 다른 울음이다
밤의 명치끝이 쭈뼛쭈뼛 흰 띠를 긋는다
날카로운 것은 어디서나 깊이를 숨기고 있다
근방 어디쯤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잠 속의 꿈이 중얼거린다
모성의 본능이 잠든 옆 아이를 끌어안는다
층층 두껍게 쌓인 어둠 속에서
소리가 소리를 찾아다니는 허공의 난무(亂舞)
나도 언젠가 꿈을 트럭에 치인 적이 있다며
잊어버린 잠이 잃어버린 나를 찾는다
도로의 속도에 길든 기계들에
두 귀 매달려 삶의 핸들 잡는다
안심인 듯
불안인 듯
아침을 기다리는 본성으로
밤의 강단은 아른아른 깊어만 가고

새벽은 곧 흑백의 필름을 인화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