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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폭설의 기억/백상웅-  

 
1
북받친 사람처럼 눈 쏟아졌다.
녹슨 용골 드러낸 어선은 급한 마음에 뱃머리를 항구로 돌리고 육지를 밀었다.
눈발은 그대 아픈 곳에 관심도 없어 척추 부러진 어선을 껴안았다.
뼈마디 뚫고 솟아오른 엔진이 늙고 비릿하였다.
눈덩이가 기름때 낀 심장을 철퍽 삼키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파란 페인트칠 벗겨진 앙상한 배를 하얗게 씹으며,
눈발을 고장난 어선의 멱살을 잡던 쇠줄을 깨물어 끊었다.

 
2
백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마을 바깥에 그리운 이 있었지만,
발신음은 산을 넘지 못하고 귓바퀴에 차가운 신호음만 뿌렸다.
귓밥을 파내면 짠한 이름만 묻어나왔다.
주먹 쥐면, 길은 튼 손등처럼 툭 끊어졌다.
그리움도 백년 만에 부러졌을까?
혼자 남을 때, 내 사랑의 방식은 바닥에 깔려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이었다.
겨울볕에 누워, 얼고 젖기를 반복하며 어선의 등에 업히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
발자국은 방파제 끝까지 질질 끌려다녔다.
눈덩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배의 후미는 출렁 가라앉았고,
폐선의 굽은 등에 꽂힌 깃발은 외로운 이의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듯,
하얀 쇠창살에 갇힌 수평선을 그만 놓아주라는 듯,
온몸으로 울며 눈송이의 귀싸대기를 올리고 있었다.
허공 속에 오롯이 찍혀 있는 눈송이의 발자국,
오래 서 있었기에 단단한 발자국이 먼 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2>-아버지의 터널/백상웅-

 
공주에서 천안 사이, 아버지가 뚫었다는 터널을 지나간다.

 
산의 늑골 속으로 고속도로를 집어넣던 아버지,
속도가 없는 터널 속에서 길은 늘 바위 속에서 똬리를 틀고 꼭꼭 숨어 있었다.

 
어느 겨울에는 뒤돌아보니 눈발이 둥근 출구를 쇠창살처럼 가리고 있었다고 한다.
감옥, 속에서 오히려 환한 아버지의 눈은 석달쯤 벽만 보고 살았다.
맞은편 쪽으로 나가기 위해 밤낮으로 허공에 백열등을 매달고 구멍을 뚫었는데,
터널이 마침내 뚫린 날, 감옥에서도 밀려난 아버지의 눈에 터널은 한마리 거대한 구렁이로 보였다고 한다.

 
속도는 금세 아버지를 잊었다.
늙은 두더지의 말린 가죽처럼 마루에 앉아 볕을 쬐는 아버지,
나는 창호지 구멍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방 안에서 훔쳐보고는 했다.
아버지는 저렇게 평생 갇히기 위해 전전긍긍 살았나?

 
터널을 통과하니 폭설이다.
아버지의 터널에서 나는 서서히 멀어져야 한다.
눈발을 파헤치며 버스가 두더지처럼 기어가기 시작한다.


<3>-코끼리 무덤/백상웅-

 
이 노란 코끼리는 지축을 쿵쿵 울리며
걸어오지 않았다, 숲에서 숨을 거둔 뒤에야
대형트럭에 혼자 실려 왔다
늪으로 걸어가서 스스로 가라앉지 못한
기름진 심장은 마지막 두근거림까지 뜨거웠다
주인이 흥정을 끝내고 숲으로 돌아간 뒤
백제폐차장 앞마당, 코끼리는
딱딱한 땅에 코를 박고 깊은 잠이 들었다
코끼리가 여기까지 끌고 온 육중한 길이
땅에 내려놓은 코끝에서 마침내, 끝났다
아름드리나무의 옆구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하늘 속의 번개를 끌어내리고
무허가 판잣집의 처마를 귀뺨 치듯 날려버리던
이 길쭉한 코는, 아파트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고
주름진 들판을 반듯하게 잡아 펴던
고독한 손이었다, 고독해서
아무지 잡아주지 않아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코끼리의 손,
그렇다고 진흙 위에 물렁한 발자국을 새겨
대지에 심장의 엔진소리를 들려줄 수도 없는
코끼리의 발은 이제, 녹슬고, 뻣뻣하고
거무튀튀하다, 이 노란 코끼리는 울고 싶을까
혈관을 잘라내고 뭉클했던 오장육부를 떼어내기 전에
크게 한번 울어 지평선을 자욱하게 물들이고 싶은 것일까
땅에 자신의 무덤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데
제 코를 한치도 들어올릴 수 없어
작고 까만 눈 감을 줄 모르는 이 노란 코끼리를
그렇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동성
포클레인이라고 불렀다


<4>-꽃 피는 철공소/백상웅-

 
철공소 입구 자목련은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망치질 소리가 앞마당에 울려퍼지면요
목련나무 우듬지에 남은 살얼음에 쨍 하고 금이 가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은 강철을 얇게 펴서 봄볕에 달구죠

 
한 잎 한 잎, 끝을 얌전하게 오므려 묶어서
한 송이 두 송이, 용접봉 푸른 불꽃으로 가지에 붙여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의 팔뚝에도 꽃이 벙글거려요
팔목에 힘을 줄 때마다 자목련꽃이 팽팽하게 열리죠
자색 화상 위에 푸른 실핏줄이 돋아나요
그걸 보고 여자들이 봄날처럼 떠나기만 했대요

 
용접봉을 손아귀에 쥔 내 친구 스물일곱살
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
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

 
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 있고요
밤에는 하늘에다 꽃잎을 붙이느라 잠도 못 자요


<<백상웅 시인 약력>>


*2006년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200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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