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도 제9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
수달의 집 외 2편
이서령
모음으로 미끄러지는 동그란 것들은 금세 빠져나가요
미꾸라지의 매끈한 언어 속에 담긴 촉감을 사냥하기엔 나는
너무 몸집이 커요 차라리 나를 수증기처럼 가볍게 혹은
푸른 물결 무늬로 만들어주지 그랬나요?
나는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촉촉한 책
두껍고 작은 소리들을 책갈피 삼아 적들의 습격을 감지하죠
나를 스치는 모래알들의 평온함을 따라
밤새도록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요
내 머리 위로 드리우는 달의 반짝임을 도도하게 쓰고요
내 수염을 튕겨낼 때 나는 열대과일처럼 달아오르죠
사람들은 내가 물속에만 있는 은둔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비오는 날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해요
온 세상이 숨구멍을 열어놓은 밤에 평온하게 익어가는
바람의 숨소리로 나의 영역을 표시하는 거죠
나는 물을 좋아하지만 잎사귀를 갉아먹는 여우비,
혹은 나무 밑에 자라는 식물의 꿈을 꾸는 수달입니다
창백한 세상, 어지럽게 굴러가는 눈동자들을 떠올려요
한데 헤엄치며 구르다가 앞발 뒷발 서로에게 내밀다보면
내 작은 수달의 집에 나무 하나 심을 자리 생기지 않겠어요?
나무의 방
나는 나이테가 달팽이관으로 꿈틀대는 이곳에서 소리를 키우지
내 안에는 발성연습을 하는 성악가가 있어 여름을 핑그르르 돌리지
동그란 알맹이로 삼켰을 때의 간지러움이랄까
비 오는 날 온몸은 피아노 줄이 되어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해
개구리와의 싸움은 생각보다 치열하거든
나는 소리를 데굴데굴 굴려 하나의 줄로 노래하는 걸 연습중이야
내 안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바람의 통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지 이 길 위에서 만난 호탕한 개미는 번개를 흉내내고 있잖아
그때마다 천장이 무너질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어
내 속눈썹 위에서 파르르 떨어지는 노을은 곱게 개여
감잎으로 물드는 중이야 유리병에 어둠이 담기듯
공기가 새어나오는 저녁이 되어도 나는 잠들지 않아
늘어지는 오페라는 지루하다며 빨리
가을을 몰고 온 옥수수수염의 지시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 있는 푸른 수염을 허무는 중이거든
당분간 휴업을 선언한 매미를 감시할 예정이야
나무의 방에
볼일이 있으신 분은 발밑에 떨어진 잎사귀에 메모를 남겨주세요
카프카의 도서관
구름이 뱉어내는 우레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는 오늘도 내 영혼이 깃든 도서관으로 간다
오래 묵은 책의 첫 페이지를 열자
누군가 밑줄 그어놓은 연필심냄새가 아찔하게 좋다
예쁘고 화려한 책 속에 나를 가두고
부패한 하루를 구겨넣는다
창밖으로 비의 그림자가 바람을 몰고 나올 때
나는 책의 오솔길을 따라 산책을 나선다
책갈피에서 나는 소멸의 냄새들,
나는 이곳에 꿈과 설렘을 코끼리 발자국처럼 묻는다
밤이면 책들이 울울창창한 관목숲이 되는지도 몰라
내 몸에는 햇살과 바람 그리고 여우비의 숨결이 있다
보름달이 풍경을 갉는 나비의 애벌레가 되고
박쥐들이 햇볕의 젖이 좋아 꿈을 꾸는 이곳은
카프카의 도서관, 언제나 고독의 그림자만 가득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식물성과 육식성의 욕망들이
뿔을 맞대고 있는지 그것들이 힘을 뿔끈 쓸 때마다
나는 『변신』의 그레고리의 삶을 떠올리는 것이다
창밖에는 다시 햇살이 잠자리 날개처럼 날카롭다
나는 푸른빛 어스름의 글자들을 배불리 갉아먹고
책을 덮듯이 내 얼굴을 도서관에 처박고 낮잠에 든다
- 『창작과비평』2011.봄호
* 이서령 :1991년생. 서울예대 문창과 1학년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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