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뜨는 방 외 2편
배성현
새벽안개 속에서 물살은 포복을 감행한다
그 집에 닿자마자 벽을 긁는 차가운 수면
오차 없이 불어난 강물의 발육을 기록한다
수목 예정지구의 버려진 방안에 숨어, 오늘도
숨을 쉬는 남자, 크리넥스 휴지 한 장을 집어
흰꽃을 접는 일로 물안개 낀 뿌연 아침을 연다
남자의 얼굴에 원무와 수납계원이 새겨놓는 독촉의
입김은 마른 땅을 삼키는 강물의 이빨보다 사나웠다
치유를 거부하는 여자의 몸은 그래서 남자의
발목에 채워진 서늘한 수갑 같았다
강물 속으로 허공의 한 귀퉁이 꺼지는 소리
폐옥에 몰린 그들을 위협할 때마다 여자는 머리의
모공을 활짝 열어 죽음의 시간을 앞당긴다
여자의 머리에서 뽑힌 검은 모발이 기구한
흔적만 남은 남루한 장판을 어지럽히면 그림 속
연필 선을 집어올리듯 남자는 몸을 잃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쥐어 마른 입술 사이에 문다
여자의 몸속에서 호흡의 선율이 낮아지는 잠
수몰을 노리는 강물의 그들의 방을 포위한다
남자는 여자의 죽음이 두려워
입속에 문 머리카락을 천천히 실패에 감고
더 이상 감을 것 없는 실패를 겨드랑이에 품고
휴지를 뽑아 계속 똑같은 꽃만 접는다
새벽녘, 수면이 뱉어내는 낮은 음성을
꽃잎의 감촉으로 견뎌내고
그들이 방 안에 들여놓은 유일한 비키니옷장 하나
허기진 뱃속을 마른 수의 대신 흰 꽃잎으로 채운다
문턱을 넘어서면 바로, 남자의 발등을
움켜쥐는 서늘한 물의 관절들이 있다
물에 잠긴 남자의 구두속에 알을 털어낸 민물고기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몸을 흔들며 강물 속으로 사라진다
새로 품은 알의 부피만큼 더 큰 몰락의 기쁨을 핥아가는 강물은
문턱을 향해 가늘고 긴 손가락을 뻗는다
강물이 방안으로 밀려들어 여자의 몸을 축축하게 적신다
남자가 비키니옷장의 지퍼를 가르는 순간
방 안을 점령한 얕은 수면 위로 흰 꽃들이 터져나온다
자신의 낡은 혁대를 풀어 여자의 시신을 허리에 매다는 남자
물속에 발을 담그고 천천히 방문을 나선다
여자는 바람의 숨결에 접착된 봄나방처럼 방 안의 꽃잎을 이끌고
가볍고 부드렵게 물살에 떠가고
수면 아래 부력의 법칙을 배반하며 서로의
무게로 서서히 가라앉는 여자와 남자
그들의 부피를 품어 수위를 높인 강물은
폐옥을 넘어 어둠 속 달빛에 닿기 위해 손톱을 세운다
꽃살문
여자의 팔과 다리는 발육의 증거가 아니라
퇴화의 흔적이었다 그녀의 손발은 미친 여자의
자궁 속에서 태양의 흑점에 닿은 적이 있다
태양의 표면에서 꼿꼿이 직립하던 원시의 불꽃들
바람의 입김처럼 날아 그녀의 팔다리에 달라붙었다
접촉이 뜨거움이라는 것 아는 달팽이 촉수처럼
밖으로 내밀지 못한 만큼 몸속으로 파고든 그녀의 팔과 다리
그녀만 아는 내밀한 꽃길이 되어 몸 안에 열렸다
입속에 달을 물고 침만 흘리던 모자란 연수아재
그녀의 몸을 품고 들개처럼 후각을 열었다
꽃길을 찾아내어 수눅선 세운 발끝으로
사박사박 걸었다던 연수아재
두 마리 새가 넝쿨로 서로의 부리를 묶어 시간의
태엽을 감는 동안 연수아재 입속에 고인 침이
원시림의 빗물처럼 흘러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녀 안의 꽃길은 물방울의 힘줄로 생성된 석화동굴처럼
온난한 공기를 품고 은밀하게 깊어져갔다
팔다리가 없어 발톱도 손톱도 없는 여자
그녀의 기쁨은 오직 머리카락으로만 자랐다
달만 알아 모욕과 구박의 설움만 훔치던 연수아재
꽃길과 이어진 내밀한 굴속에 숨어
그녀의 내부를 끌어안았다
바람이 새들의 저격을 노리고
새들의 부력으로 갈대가 눕는 겨울
그들은 무너진 암자로 갔다
떨어진 문짝에는 봄꽃만이 푸르렀으니
연수아재, 꽃살문의 안팎을 바꿔 달았다
팔다리 없는 그녀의 배는 먼지 낀 꽃밭에 누워
지구를 공전하는 태양의 둘레를 닮아가고
연수아재, 그녀의 긴 머리 잘라내어
겨우니 아기의 검은 배냇저고리만 짰다
그녀의 몸 안에 생성된꽃굴 속에서
아이와 함께 자라나는 연수아재
꽃망울 속에 잎을 숨긴 성긴 겨드랑꽃눈이 되었다
화분을 마치지 못한 봄날의 벌과 나비들이
꽃살문 바깥으로 달라붙어 밤새 날개를 태우고
말을 잃은 꽃들은 온몸을 흔들며 수화를 나누었다
꽃들의 묵음은 그렇게 향내가 되어 천천히
겨울의 차가운 폭설을 지우고 있었다
그들의 피부호흡법
강물의 허리를 자르고 발끝을 세워 수심을 짚어가는 꽃제비들
그늘의 남루한 옷 속에는 그들도 모르는 피부가 숨쉬고 있다
어둠을 찌르는 탄환 한발, 막 총구를 빠져나온
저 너머의 비명이 강물의 허공을 뒤흔든다
생생한 죽음의 육성을 들으며 두 눈을 감았다 뜨는 소년
골반에 고요한 수면을 걸친 채 온몸을 부르르
떨다 강물에 오줌을 섞는다
온기에 굶주렸던 담수어들 차가운 아가미를 벌려
소년의 사타구니 사이로 서서히 몰려든다
그림자를 흘리며 다가오는 것들
소년의 입속에 맺힌 물방울들 하나씩 지워가고
두려움에 눈뜬 꽃제비의 혓바닥은
마침내 단단하게 굳어 묵직한 사슬이 된다
입 밖에 낼 수 없어 딱딱한 혀끝을 삼킨 그들
위 속에 닿은 침묵의 결속이 풀릴 때까지
양서류의 피부를 벗을 수 없다
근시의 눈으로 앞서가는 형의 등허리에
촘촘한 시선을 박음질하는 소년
멈추지 않고 느릿느릿 강물을 건너다보며
발가락 사이로 불갈퀴 돋아나는 것도 모른다
국경선을 지우며 위태로운 강물을
횡단하기까지 허기는 초침이었던 것
굶주린 어머니가 소년의 메마른 호물을 물어뜯어
새로운 피부를 일깨울 때마다 그들은
피부호흡으로 지상의 마른 공기를 깨달아갔다
어둠을 떠가는 구름처럼 거부도 모른 채 입을 다문 소년들
하반신을 차가운 강물과 맞바꾼 채
비늘을 잃은 수십마리 물고기떼 거느리고
물속의 어둠을 휘적휘적 헤쳐 간다
혈관을 흐르는 슬픈 귀소본능으로
국경 너머 샛길을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꽃제비들
수도 없이 국경을 넘나들다 변종이 되어버린 그들은
하루의 절반을 음지 속 양서류의 마음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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