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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 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인다
발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녁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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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칼과 어머니 / 이덕규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칼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 칼을 가장 능숙하게 잘 쓰는 사람, 자르고 썰고 족닥이고 생선대가리를 아무 생각없이 뎅겅뎅겅 날려 칼집을 내고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한밤중에 물 먹으러 부엌에 나갔다가 움푹 파인 도마 위에 파랗게 실눈을 뜨고 누워 있는 식칼을 보고 들어와, 반월도半月刀처럼 웅크리고 칼잠 자는 어머니를 반듯하게 고쳐주면 날을 세우듯 다시 모로 눕는 어머니


 자는 척 늘 깨어 있는......, 이제는 당신 마음을 다스리던 인내忍耐의 사원 그 시퍼렇게 빛나는 천근 칼날 지붕아래에서도 평온한 어머니, 칼을 들었을 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칼끝이 오직 자식을 향해 열려 있는


 도마 위의 그 날렵한 칼솜씨를 보면 무인가문의 후손이 확실한 어머니, 그러나 칼의 볼모로 잡힌 이래 집 밖으로 칼을 내돌리지 못하는 몰락한 칼잡이의 딸, 쓰ㅡ윽,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내 가슴을 가르고 들어온 날선 비수匕首 한 자루






숙박계 / 이덕규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 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 또박또박 적어 넣고

  덜컹, 문을 열고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 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 이덕규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 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 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의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채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 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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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 이장욱


#천변여관


삭제. 나는 지우는 자이다.


#낡은 욕실


이빨을 닦을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거울. 그 순간 나는 유일하게 이빨에 사로잡힌 자. 나는 어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지나치게 집요하다. 누군가 내게 완고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려준다면. 나는 복종하는 자의 평화와 더불어. 그러나 오늘은 약간 어지러운 아침.


#산동반점


알리바이를 위해 당신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만나자 나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여전히 내 앞의 당신은 나를 의심하지 않고.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다. 나의 행방은 일간스포츠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YTN의 머나먼 소문 속으로 사라진다. 때로는 담배 연기 속으로.


#거리


담배와 신문을 사야 한다. 습관의 내부를 관찰할 것. 완벽하게 나를 은닉 할 수 있는 그곳.


#담배와 신문


나를 의심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편의점의 여자를, 가판대의 사내를, 유심히 관찰한다.그 표정이 나를 영원히 삭제하는순간이 있다. 변화는 아주 미세하다. 그때를 기다려 나는 편의점과 가판대를 떠난다. 삭제된 것들이 내 뒤를 추적하지만,나는 슬쩍 몸을 돌려 골목으로.


#내발산동


증거인멸을 위해 몸을 바꾸는 낮과 밤. 아직 모든 것은 혐의일 뿐. 그렇다. 나의 우울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지겨워.


#황혼


그러므로 이상한 동감의 순간이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는 당황한다. 방금 스쳐온 골목길의 그림자, 그것이 당신이라면.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황혼을 통해 내게 건너온 당신과 무관한 자. 황혼이란 아주사소한 우연일 뿐.


#방백, 혹은 삼성 파브


결국 나는 길가의 돌. 나는 극도로 천천히 발견될 것이다. 우연히 발에 치여 당신의 눈앞에 그 사소한 전모를 드러낸다는 것. 쇼윈도우에 진열된 삼성파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화면이 스프링복의 뿔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뿔의 배경으로 보이면서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초원의 태양.


-『문학과 사회』2003년 봄호-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골목, 이라는 발음을 반복하자 서서히 골목이 사라진다.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사라진다. 하지만 창밖에 골목이 있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팩을 꺼낸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유통 기한이 지난 날짜가 찍혀 있다.


하지만 음악은 발라드, 시인 오장환이 "백석은 모던 보이"라고 적어 놓은 글을 읽었다. 통장에 입금된 아르바이트 급여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국민은행으로, 내일은 선거일이다. 백석은 모던 보이.


나는 아직 과부하 상태인지도 모른다. 소실점을 향해 맹렬히 사라지는로러블레이드를, 골목이, 골목은, 골목과, 결국 골목을 ······ 나는 골목길을 걸어간다. 인터넷 카페의 초기 화면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肉에서 나온 것은 肉이며, 靈에서 나온 것은 靈이다."(요한 3:6)


한때 혁명가였던, 아직 혁명가인지도 모르는, 컴퓨터 수리점 사장 金을 먼발치로 발견하고, 나는 다른 골목을 택해 걷는다. 골목이, 골목을, 골목과, 결국 골목은······ 그는 나를 로맨틱한 동물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지만, 그날 밤 동해로 떠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아프트 신축 현장의 모래 바람이 골목을 휩쓸고 지나갈 때, 일당제 인부의 흰 모자에서 클로즈업되는 '안전 제일'. 백석은 모던 보이가 아니다. 통장에 아르바이트 급여는 찍히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면, 서서히 떠오르는 것들. 가령 골목은, 골목과, 골목의······ 도레미레코드점에서 울리는 음악은 발라드.


나는 肉이며 靈으로서 기한이 지난 골목을 통과한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국민은행의 간판에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까치 몇 마리. 내가 걸어가는 골목을, 골목의, 골목에서, 골목을 향해, 어느 먼 하늘 쪽으로부터 점점이, 명백한 자세로 밀려오는 동해의 파도.


-『문학과 사회』2003년 봄호-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 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 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문학사상』2003년 3월호





태양의 지식


나뭇잎 하나가 제 그림자를 서서히 넓히며 着地하자

그림자는 뒤늦게, 사라진다.


벤치에 누운 사내의 표정이 그림자를 따라 문득 지워지고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내부에 잠복해 있던 고요가 누설되고


나는 어느덧 사내의 표정에 갇힌다. 그의 곁에서,

'필림 있슴'이라고 적힌 채 나부끼는 깃발.

사내의 표정이 태양을 정면으로 인화하려는 듯 신중하게 움직인다.


제발 뭔가 찍어 봐,

환한 빛으로 가득한 그 텅 빈 인화지 속에서

나는 안 보이는 태양을 찾아 헤맨다.

거대한 건물이 그의 잠과 태양의 사이에 일어나고

때로 황혼에 젖은 잠 속을 횡단하는 오토바이.


사라진 것들은 모두 그의 공원에 들러

김치, 하며 웃어본 적이 있지.

하지만 태양의 지식은 떠오르고 지는 것뿐.


나는 사내의 각도로 누워

그의 잠에서 저무는 태양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을

약간 피로한 눈으로

추적하는 중.


『시안』2003년 봄호





사물들과의 이별


내 잠 속의 먼 곳에 내리는 비. 이것은 내리는 비와 더불어 걷는 꿈속의 피크닉. 손 뻗으면 만져지는 그대들로부터 나는 머나먼 곳으로. 비와 음악의 숲을 지나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라고는 중얼거리지 않는 이 희망의 나라에서.


천천히 삭제되는 내 더운 몸. 에네르기가 떨어진 아톰처럼 애수에 젖은 자명종이, 낮고 길게 울리는 이 모호한 경계에. 서서히 잦아드는 빗속에서 나는 인사를. 멀어지는 당신께 인사를. 나는 손을 내밀어 당신의 명료한 손을. 지표면을 떠나며 모든 것을 흔드는, 저기 저 비온 뒤 아지랑이.


『시작』2002년 여름호






수상소감 / 이장욱



나는 예측 가능한 삶을 선호한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스릴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생의 에너지를 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 유전자는 그 부류와는 거리가 멀다. 가능하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명료하게 구분하고, 하고싶지만 할 수 없는 것은 간결하게 포기하며, 불확실성의 위험 같은 것은 완벽하게 피하고 싶다. 평범한 인간답게 이런 욕망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내 삶이란 여기서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나는 가지 않은 길과 낯선 사람과 이질적인 삶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종류든, 새로움에 적응한다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몸과 마음을 가장 편안한 상태에 두는 것, 적응의 과정이 피곤할 듯하면 아무리 매력적인 것(혹은 사람)이라도 그냥 피해 가는 것, 디펜스 메카니즘을 최대화한 상태로 삶을 흘려보내는 것, 이런 것은 게으르고 대체로 소극적이며 언제나 수동적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익혀온 습성 같은 것이다. 나는 안전하고 온건한 삶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런 것이 나의 삶이었으며 또 삶일 테지만, 나의 글까지 그렇게 두고 싶지는 않다.

가령, 나는 예측 가능한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건드리는 무엇을 결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익숙한 화법과 낯익은 깨달음을 피하고 싶다. 그것은 자주 평균적인 이성의 산물이다. 나는 쉽게 점유활 수 있는 도덕적 우위를 전제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때로 스스로는 책임지지 않아도 좋은 계몽의 욕망에 굴복한다. 가능한 한, 나는 투명하고 명료한 글은 피하고 싶다. 이 용어들은 많은 경우, 삶과 세계가 단선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고 믿는 자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언어 실험의 옹호가 아니다. 언어 실험만큼 상투형에 빠지기 쉬운 것은 없다. 그리고 또 이 모든 것은 모호함과 난해함의 옹호가 아니다. 나는 내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내 몸의 리듬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적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글은 너무 자주 나의 생각을 배반했다. 나의 글은 자꾸 안전해졌다. 평론하기에 적합한 글들이 쓰여졌다. 나는 나의 글이 나의 삶에서 결여된 것들의 게토라고 생각했으나, 어느덧 글은 삶의 어쩌지 못할 상투성만을 추종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삶의 결여를 호명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꾸 무난해지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내 머나먼 위쪽에서 내리는 벌처럼 한 소식을 듣는다. 나의 조는 나의 조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어서, 이 상은 나의 조를 환하게 밝혀 끝내 자책하게 만든다. 그것을, 흔히 상을 받는 사람들은 <채찍>이라고 부른다.



수상시인 약력.


♣1986년 서울 출생

♣1994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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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 World / 이원


겨울밤

차고 미끄러운 불빛과

차고 울퉁불퉁한 시간을

짝짝이로 신고 다리를 건너

쇼핑몰에 간다


쫄깃쫄깃한 고단백 눈알 통조림을 두 캔 산다 캔을 안고 있다 보면 어느 별에 몸이 닿기도 한다 눈알은 들소나 야생 고양이나 송골매의 것이라는 설이 분분하나 화성에서 온 짐승의 것이라는 풍문도 있다 먹게 되면 한시도 몸이 어두워지지 않는 붉은 색의 눈알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나비 2천마리의 날개로 만든 분말을 한 병 산다 나는 서른다섯 번째 이 병을 산다 한 숟가락을 물 없이 삼키면 동남쪽에 폭우가 쏟아진다 다시 거기서부터 20리 떨어진 곳의 하늘에 해가 여럿 생겨난다 다시 거기서부터 50리 떨어진 곳에서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 곡소리를 일년 내내 듣게 되면 썩지 않는 영혼이나 심장을 갖게 된다


사과처럼 머리 꼭지를 사각사각 도려낼 수 있는 칼세트를 산다 혼자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 머리 깊숙이 칼날이 들어가도 육즙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면과 두통이 심할 때 머리 꼭지를 둥글게 도려낸 후 뇌를 꺼내 씻을 수 있다 전문 의료기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북쪽의 사철 내내 몽오리만 맺힌 채 꽃은 피지 않는 신품종 동백나무숲에 살고 있는 짐승들은 이 칼세트를 단체 구입한다 숲 밖으로 나오면 발소리만 나고 몸은 투명해지는 그들이 일년에 두 번이나 사들여 이 칼세트는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말굽 세트를 산다 약간의 빛이 스미는 곳에서 발목을 자른 뒤 끼운다 프리사이즈지만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면 맞지 않는다 말굽을 끼고 무엇이든 한가지만 간절히 원하면 바람의 길로만 다니는 좀비들과 놀 수 있다


낱개로 포장된 DIY 시간팩을 하나 산다 미로형으로 완성을 시키면 사방 7백리의 숲을 걸을 수 있으며 머리가 없고 몸이 새하얀 외짝신을 신은 사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손 안에 외눈이 박혀 있다 그들이 주식으로 사용하는 심야 전기를 나에게도 나누어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보존하던 5천년 묵은 뿌리를 버리고 새로 5십년 짜리를 산다 이 신종은 흙이나 쇠나 유리 그 어디에서도 잘 자라며 1백 8가지 모양의 잎을 한꺼번에 달고 꽃은 필 때마다 달라서 그 종류와 빛을 헤아릴 수 없다


-『문학사상』 2002년 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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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작품상 제정]

본지 창간 33주년 통권 400호(2002년 7월호)를 맞아 1990년대이후 중단되었던 “현대시학작품상”을 부활 시행한다.
현대시학작품상은 이름 그대로 작품을 중심으로 선정, 金宗三, 朴龍來 등의 시인이 수상한 훌륭한 전통을 지니고 있는 상이다. 이를 살려 현대시학은 작품다운 작품을 엄정 선별 상다운 상, 시인이면 타고 싶은 상, 시 문학사에 기리 남는 작품상으로 계승 발전시켜 갈 것이다.
특히 현대시학은 이 현대시학작품상의 심사 대상을 한참 성숙기에 접어들어 작품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등단 5년에서 15년 내외의 시인들로 삼고자 한다. 이 시기의 격려가 그 어느 때의 것보다 활력을 배가 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행규정

1. 심사요령
- 본상은 작품상임을 재확인한다.
등단 5년에서 15년 내외의 시인들이 발표한 전년 7월부터 당해년 6월까지의 시 작품을 심사대상으로 한다.
- 심사대상 작품은 본지 출신 시인 중심으로 되어 있는 현대 시학회 회원들의 2인 복수추천(작품 각 5편 내외)을 받아 5회 이상 추천된 시인을 선별 본심에 넘긴다.
- 추천된 작품들과 본심 심사위원의 추천작품을 종합, 한 사람의 작품 5편 내외를 수상작품으로 선정한다.

2. 발표와 시상
- 매년 7월호에 수상작을 수상작품론 및 기타자료와 함께 발표한다.
- 시상식은 적절한 일정을 잡아 시행한다.

3. 수상자에 대한 예우
- 본 상의 창작후원금은 500만원으로 한다.
- 본 창작후원금은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순수한 독지가가 희사한 정재에 의해 마련되었으며, 매해 상당액을 지원하기로 되어있다.
- 본지 현대시학은 수상자 특집을 낸다.
- 시상식을 통해 축하예식을 갖고, 수상자에게는 유명 서예가가 작품으로 제작한 선정서(족자)를 드린다.

이상을 위의 규정에 따라 2002년 7월부터 시행한다.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 2002년 7월호: 이 원
2003년 7월호: 이장욱 
   2004년 7월호: 이덕규

   2005년 7월호: 박형준

   2006년 7월호: 이병률

   2007년 7월호: 이인원

   2008년 7월호: 장석원

   2009년 7월호: 위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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