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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 World / 이원


겨울밤

차고 미끄러운 불빛과

차고 울퉁불퉁한 시간을

짝짝이로 신고 다리를 건너

쇼핑몰에 간다


쫄깃쫄깃한 고단백 눈알 통조림을 두 캔 산다 캔을 안고 있다 보면 어느 별에 몸이 닿기도 한다 눈알은 들소나 야생 고양이나 송골매의 것이라는 설이 분분하나 화성에서 온 짐승의 것이라는 풍문도 있다 먹게 되면 한시도 몸이 어두워지지 않는 붉은 색의 눈알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나비 2천마리의 날개로 만든 분말을 한 병 산다 나는 서른다섯 번째 이 병을 산다 한 숟가락을 물 없이 삼키면 동남쪽에 폭우가 쏟아진다 다시 거기서부터 20리 떨어진 곳의 하늘에 해가 여럿 생겨난다 다시 거기서부터 50리 떨어진 곳에서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 곡소리를 일년 내내 듣게 되면 썩지 않는 영혼이나 심장을 갖게 된다


사과처럼 머리 꼭지를 사각사각 도려낼 수 있는 칼세트를 산다 혼자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 머리 깊숙이 칼날이 들어가도 육즙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면과 두통이 심할 때 머리 꼭지를 둥글게 도려낸 후 뇌를 꺼내 씻을 수 있다 전문 의료기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북쪽의 사철 내내 몽오리만 맺힌 채 꽃은 피지 않는 신품종 동백나무숲에 살고 있는 짐승들은 이 칼세트를 단체 구입한다 숲 밖으로 나오면 발소리만 나고 몸은 투명해지는 그들이 일년에 두 번이나 사들여 이 칼세트는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말굽 세트를 산다 약간의 빛이 스미는 곳에서 발목을 자른 뒤 끼운다 프리사이즈지만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면 맞지 않는다 말굽을 끼고 무엇이든 한가지만 간절히 원하면 바람의 길로만 다니는 좀비들과 놀 수 있다


낱개로 포장된 DIY 시간팩을 하나 산다 미로형으로 완성을 시키면 사방 7백리의 숲을 걸을 수 있으며 머리가 없고 몸이 새하얀 외짝신을 신은 사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손 안에 외눈이 박혀 있다 그들이 주식으로 사용하는 심야 전기를 나에게도 나누어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보존하던 5천년 묵은 뿌리를 버리고 새로 5십년 짜리를 산다 이 신종은 흙이나 쇠나 유리 그 어디에서도 잘 자라며 1백 8가지 모양의 잎을 한꺼번에 달고 꽃은 필 때마다 달라서 그 종류와 빛을 헤아릴 수 없다


-『문학사상』 2002년 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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