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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칼과 어머니 / 이덕규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칼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 칼을 가장 능숙하게 잘 쓰는 사람, 자르고 썰고 족닥이고 생선대가리를 아무 생각없이 뎅겅뎅겅 날려 칼집을 내고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한밤중에 물 먹으러 부엌에 나갔다가 움푹 파인 도마 위에 파랗게 실눈을 뜨고 누워 있는 식칼을 보고 들어와, 반월도半月刀처럼 웅크리고 칼잠 자는 어머니를 반듯하게 고쳐주면 날을 세우듯 다시 모로 눕는 어머니


 자는 척 늘 깨어 있는......, 이제는 당신 마음을 다스리던 인내忍耐의 사원 그 시퍼렇게 빛나는 천근 칼날 지붕아래에서도 평온한 어머니, 칼을 들었을 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칼끝이 오직 자식을 향해 열려 있는


 도마 위의 그 날렵한 칼솜씨를 보면 무인가문의 후손이 확실한 어머니, 그러나 칼의 볼모로 잡힌 이래 집 밖으로 칼을 내돌리지 못하는 몰락한 칼잡이의 딸, 쓰ㅡ윽,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내 가슴을 가르고 들어온 날선 비수匕首 한 자루






숙박계 / 이덕규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 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 또박또박 적어 넣고

  덜컹, 문을 열고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 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 이덕규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 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 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의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채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 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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