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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외 4편 / 최재훈
 
나는 언제나 당신의 가방 안에
든 것이 궁금했다.
 
나를 만나는 동안 당신은
단 한 번도 가방을 열지 않았고,
우리 사이엔 늘 그 낡고 빛바랜 가방이 놓여 있었다.
밥을 먹다 화장실을 갈 때도
비좁은 버스 안에서도
막다른 골목에서 키스를 할 때도
당신의 가방은 당신의 손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마치 당신과 가방이 한 몸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어떨 땐 당신을 버리는 것이 가방에게도
가혹한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면서,
 
언제부턴가 당신과의 만남이
실밥에 걸린 지퍼처럼 막막해져 갈 때,
나는 당신의 가방을 의심하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당신의 가방은 철문처럼
입술을 열지 않았고
그 순간에도 당신은 그것의 등을 쓰다듬으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당신과 내가, 아니 가방과 내가
건너야 할 세계는 마침내 짝다리를 짚고 서서
우리를 밋밋하게 혹은 멀뚱멀뚱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보다
당신의 가방이 더 궁금했지만,
 
당신의 마른 식욕이 상한 나를 삼키고
화장실에 갇혀 식은땀을 흘리는 동안
나는 이미 당신을 토하고 입가를 닦고 있었다는 걸,
비좁은 버스 안에서 당신이 나를 찾아 입구를 헤매는 동안
나는 늘 출구 쪽에서 다음 정류장을 되뇌고 있었다는 걸,
우리의 키스는 모퉁이가 사라진 막다른 골목이었고 내 혀끝은
안간힘을 다해 돌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는 걸,
 
그러나 어쩌면 나는 당신보다 당신 가방보다,
나의 빈 가방을 당신에게 보여주기가
죽을 만큼 싫었는지 모른다.
 
나와 당신은, 아니 당신 가방과 나는,
아니 나의 가방과 당신은
그렇게 각자의 허공을 담고 있었는지 모른다.
마치 우리와 가방이 한 몸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어떨 땐 우리를 버리는 것이 빈 가방에게도
쓸쓸한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면서,
 
 
 

  
기이한 소년
 
소년은 태어나자마자 무섭게 자라기 시작했다.
왜소한 부모는 그의 엄청난 식사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소년의 몸이 반지하 단칸방을 모두 차지하게 되자,
부모는 그를 이삿짐 트럭에 싣고 무작정 동물원을 찾아갔다.
동물원 관계자들은 소년을 보고 공포에 질렸으나,
곧 그들의 쓰러져가는 동물원을 일으킬 모의를 진행했다.
소년의 몸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부풀고 있었고
부모는 안도하며 생활의 수렁 속으로 되돌아갔다.
동물원은 우리 안의 소년을 사진 속에 담아 부모에게 전달했다.
부모는 가끔 그것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그들은 우리 안에 갇힌 그들 자신을 보았다.
소년은 부모의 기억에서 손쉽게 잘려나갔다.
 
동물원은 소년의 몸이 더욱 거대해지길 원했다.
조련사는 닥치는 대로 먹이를 주었다.
그즈음 도시는 날마다 자신의 치부를 도려냈고
그 흉터 위에 콘크리트를 깔고 빛나는 대리석을 세웠다.
치부의 더미가 폐수를 따라 도시 외곽으로 흘러들어 악취를 뿜어댔다.
조련사는 그것들을 굶주린 소년의 우리 안에 던져주었다.
동물보호단체에서 동물원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항의했지만,
그들도 소년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한 채 되돌아갔다.
 
동물원은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오직 기이한 소년을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가 날아왔고,
고가로 출시된 동물원 패키지 여행상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조련사는 소년에게 몇 가지 동작과 말을 가르쳐
관람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질 쇼를 준비했다.
소년은 무거운 몸을 꿈틀거리며 춤을 췄고,
동굴 같은 입술을 열어 비명의 메아리를 토해냈다.
누군가 소년의 눈가에 맺힌 것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지만,
그도 곧 자신의 슬픔에 목이 메어갔다.
 
이윽고 소년의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지자
동물원은 그를 도살하여야 할 때가 왔음을 알렸다.
식량문제 연구가들은 소년을 신의 선물로 칭송했다.
세계 곳곳에서 전문 도살자들이 속속 도착했고,
소년의 살덩이는 그들의 정교한 칼날에 의해 분해되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부러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으나
그들의 몫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의 뼈를 보기 위해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무턱대고 울거나 이유 없이 웃고 떠들었지만,
곧 어른들의 기침 소리가 도착하자
어둠 사이로 재빨리 거대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들의 떨리는 입술을
소년의 앙상한 뼈가 천천히 핥고 있었다.
 
 



     
펜(Pen)
 
그는 외다리다.
혼자서는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다.
쓰러뜨리면 쓰러졌던 그대로 쓰러져있다.
뒤척이지 않는다.
누군가 일으켜 세워주면
어깨에 기대 기우뚱 말이 없다.
그의 발목은 뿌리가 없고
그래서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에 꽂아 놓아도
향기 한 모금 고이지 않는다.
그는 고개 숙여 발밑을 들여다본 적 없다.
어쩌다 그를 부축해서 걸어간 길 위에
검은 발자국이 드러나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텅 빈 곳을 향해 뚫려있다.
 
어떤 이는 그의 발자국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침을 뱉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운명을 바꾼 적 없으므로
그의 태생은 죄도 보람도 없다.
그러므로 그에겐 요람도 용서도 없으며,
다만 그의 뱃속에는 실패의 씨앗만
무성하게 자랄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뻣뻣하게 굳은 그의 몸을 쓰다듬으며
주술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무속인들,
저들의 연약한 입을 통해
그의 텅 빈 정신은 횡설수설할 뿐이다.
 
휘어진 길의 등을 망치로 때려 곧게 펴자
걷는 사람들은 더 이상 비틀대지 않는다.
거리는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아침을
깨끗한 백지로 갈아 끼우고,
행인들과 깡통 소리 나는 그들의 천적들은
밑줄을 길게 그으며 무심코 강조된 삶이 된다.
간혹 바닥에 얼룩을 떨어뜨리고 달아나는
청년의 꽁무니를 늙은 비둘기가 물고 있다.
비둘기들이 공원을 서성이면 노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먹다 만 과자부스러기를 던져준다.
 
그때 나는 한 방울의 진심도 이 길 위에
흘려본 적 없으므로,
좁쌀 쏟아지듯 내리는 빗방울, 따가운 바늘 세례.
내일은 믿기 어려운 종교를 하나 더 추가하고
그와 함께 가까운 사원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그는 태생이 외다리다.
혼자서는 어떤 꿈속도 걸어가지 못한다.
어느 날 난 그의 목발이 되어 주리라 다짐했다.
그의 발끝에 새까맣게 고인 핏물을
악착같이 짜내며
난 나의 결백을 주장한다.
 
 



  

 

거울이 없는 방에선 내가 종일 보이지 않는다.
 
바닥을 기어가던 바퀴벌레 한 마리가
벽 앞에 주춤거리며 서 있다.
그도 잃어버린 게 있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시력을 잃은 형광등 불빛이 비틀거리다 벽에 부딪힌다.
몇 개의 낡은 가구들이 이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다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
가구 위에 놓여있던 몸을 나는 간신히 일으킨다.
텅 빈 몸통을 뚫고 뻗어 나온 다리가
잎사귀 같은 걸음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무례한 침입자는 그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는다,
마치 그곳에 질긴 목숨의 뿌리를 내린 것처럼.
검은 몸을 감싸며 번들거리고 있는 그의 정신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려다 그만둔다.
 
너의 몸은 누구의 눈에서 빠져나온 검은 눈동자인가.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저 섬뜩한 응시,
 
어쩌면 저 눈빛은 두려움에 떨며 어둠 속에 숨어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의심과 공포를 납작하게 밟아볼 텐가.
마침내 그의 가는 다리가 벽을 기어오른다,
뭔가에 쫓기듯 뒤를 연신 힐끔거리며.
깨진 구슬 같은 눈알이 나를 빠져나와 벽을 타고 그를 쫓아간다.
너는 네 생의 불안 어디까지 도망갈 텐가.
한참을 기어오르던 그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정신없이 벽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곤 벽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멍하니 벽 앞에 서 있다.
빈 벽을 쓰다듬는다,
벽이 출렁거린다.
 
다음날 나는 거울을 달기 위해
창백한 벽의 얼굴에 못을 박는다.
순간 그 안에서 물컹한 혓바닥들이
우글거리며 기어 나온다.
 
 
 



 
절망에서 손쉽게 걸어 나오는 법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기분은 어떻습니까?
보안 요원이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가방에 주섬주섬 빈손을 주워 담으며 저는 식은땀을 흘립니다.
아무것도 들키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울음을 펼쳐 보입니다.
 
저는 주머니 없는 몸을 가졌지만 늘 검문검색을 당합니다.
사람들이 표정을 읽을 수 있도록 저는 손바닥을 펼치고 다닙니다.
주먹을 쥔 청년들은 표정이 없어 비장해 보이지만,
보안 요원에 의해 강제로 펴진 그들의 주먹은 텅 비어있습니다.
몇몇 늙은이들은 철근 같은 등뼈가 발각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딘지 모르게 저의 몸통은 수상해 보이지만 뼈를 소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제가 저편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습니다.
저는 저편의 저를 바라보며 주춤거립니다.
그는 온몸에 주머니를 가득 달고 있습니다.
옆구리를 똑딱 열더니 그가 무언가를 만지작거립니다.
보안 요원이 다가와 그의 눈과 입과 귀를 끄르고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아무래도 그는 뾰족한 것을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을 비벼 그를 지우고 저는 조용히 뒤돌아섭니다.
제 항공권에는 도착지가 적혀있지 않습니다.
저는 되돌아가야 할지 오랫동안 망설입니다.
창밖에는 거대한 비둘기들이 바닥에 떨어진 햇빛 부스러기를 쪼며
날개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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